OVERVIEW:
- 내가 살아가는 방법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주제로 글을 청탁받고 보니 갑자기 앞이 콱 막힌다. 이런 글이야 정말로 남다르게 살아서 타의 모범이 된 사람이나 정말 세상과 등진 채 비범한 삶을 살아가는 분한테나 어울리는 제목이다. 나같이 하루하루를 헉헉거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뭐 별다를 거 있냐는 생각이 앞을 가린다. 가끔씩은 나의 삶이 '대한민국 보통 남자 = 아저씨'의 표준적 삶과 좀 다르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봤자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이 더 많다. 그래도 반평생 넘게 살다 보니 자기 살에 대한 애착 내지는 자의식이 생기는 걸 어쩔 수는 없다. 이게 늙어가는 징표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건 나중에 들 생각이고 한번 우겨 보기라도 하자.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데?"라고 물을 듯하다. 이건 간단히 말로 하기 힘드니 여기(http://hyunjoon.kr.ne.kr)를 눌러 주시길. 왠 자기 PR이람? 어쨌든 내 삶의 신조는 별 게 아니라 '취직하지 않는다'였다. '직장에 매달리다가 한번 짤리면 인생 끝'인 한국형 기업 문화가 황당했을뿐더러 청소년기에 어설프게 전해 들은 '아메리칸 히피'들의 자유로운 삶도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모양이다. 배운 도둑질이라고는 글 읽고 글 쓰는 것밖에 없다 보니 여기까지 온 셈이다. 하지만 여기가 미국은 아니고 아무리 '프리 랜서'라고 하더라도 먹고 살려면 아득바득 일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새털처럼 가볍게 강물처럼 유유히 사는 듯 하다가도 끊이지 않는 원고 청탁에 시달려야 하고 '이번 주에는 원고가 몇 개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도 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게 팔자인가 보다.
그래도 내가 남들과 '많이' 다르다고 느낄 때는 어쩌다 만나는 학교 동창이나 친구들 모임에서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 대부분은 넥타이 매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오지만 나는 이 나이 먹도록 특별한 자리를 빼고는 그런 차림을 한 일이 거의 없다. 외양만 그런 게 아니라 대화할 때도 나는 거의 '왕따'다. 정치 이야기, 경제 이야기, 재테크 이야기 등등이 이어지지만 나와 관련있는 주제가 없기 때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 노래방이나 단란주점으로 2차를 가도 아직 마흔도 안되는 인간들이 '트로트' 말고는 제대로 부를 줄 아는 게 없다.
중년이 되면서 '망가지는' 모습은 내 눈에도 좀 안스러워 보인다. 망가지는 거야 다들 마찬가지라고 해도 망가지는 방식이 '똑같다'는 점은 문제다. 그러다 보면 직장이나 가정에 매이고 월급이라는 '마약'에 취해 사는 주류 한국인의 삶이 참 별 볼 일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가라고 해봤자 밖에서는 술집에서 술 마시면서 시시한 얘기 나누는 것 아니면 지에서는 리모콘 만지작거리면서 TV나 죽치고 보고 있는 것 둘 중 하나지 별달리 신통하고 쌈빡한 것 없다.
이런 생각은 외국의 친구들과 만나 보면 더 강하게 드는 생각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나같은 컴맹마저 전용선 깔린 컴퓨터로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니 외국인과 사이버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선진국과 후진국을 막론하고 한국처럼 '열심히 일하는' 나라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선진국은 조금 일해도 돈 잘버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으니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는 듯했고, 후진국은 일할 기회도 적은 데다가 일을 열심히 안 아니까 돈도 못버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오로지 한국만 '뼈빠지게 일하고 웬만큼 돈버는' 사회였다. 예전에는 한국 못지 않게 열심히 일하던 일본도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 같지 않다. 하긴 OECD 가입국들 중 '주 5일 근무제'를 실시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니 더 할 말이 없다.
이렇다 보니 요즘 들어 부쩍 '한국인'이라는 존재가 참 신기하고 놀랍다는 상상이 많이 든다. 놀랍도록 '동질적'이라는 뜻이다. 동질적인 게 꼭 획일적일 필요는 없는데, 한국에서는 동질적이면 획일적이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건 뭐 논리도 뭐도 아니고 그냥 감으로 하는 얘기지만 말이다. 차이가 있으면 신경 안쓰고 말아버리면 그만인데, 기어이 간섭해서 차이를 비스무레하게 만들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거리와 카페에서 똑같은 화장에, 똑같은 헤어스타일에, 똑같은 악세서리에, 똑같은 코디를 하고 다니는 '예쁜 언니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굳어진다.
그래서 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나도 '나의 생각을 보다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거 없다. 그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고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소극적 바램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가끔씩 오는 e 메일에는 '항의'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내용인즉슨 '지식인'이란 한국인의 보편적 문제를 고민하는 존재여야 하는데, 나의 글은 지나치게 사적(私的)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은근히 심술이 나서 현실의 공동체(민족이든, 직장이든, 학교든 뭐든)가 아닌 다른 공동체를 상상하게 된다. '상상된 공동체(imagimed community)'라는 단어를 줏어들은 일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런 꿈이라도 없다면 이런 획일적인 문화에서 버티기란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 어떤 사보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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