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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얼굴에 침뱉기'식의 이야기다. 이제 진부한 용어가 되어 버렸지만 '386세대'라는 말이 있었다.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을 지칭한다는 말도 누구나 알 것이다. 그 시대에는 '범생이'로 성장하여 대학 문턱에 들어간 사람이 '강인한 투사'가 되었던 이례적인 시기였다. 경제성장과 대중문화의 혜택을 받았으니 '헝그리 정신'과도 거리가 있다. 좌우지간 스무살을 조금 넘은 나이에 '세상의 변혁'에 대해 논하고 '조직'의 좌장이 되어 '하부'를 통솔하는 경험을 한 사람이 꽤 된다. 불과 3-4년 전만 하더라도 까까머리, 여드름 투성이의 얼굴, 새까만 교복을 한 채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의 정석>과 씨름하던 별 볼 일 없던 '고딩'이 말이다. 장진구도 바로 이 세대에 속한다. 그 세대가 모두 이렇게 쪼다처럼 살아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잘 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주로 정치권, 법조계, 언론계, 벤처기업계, 시민운동단체, 입시학원계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젊은'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맹활약 중이다. 이들은 경제적·정신적 자립을 달성하였고 사회의 비판 세력으로부터 주류세력(이른바 오피니언 리더 그룹)이 되어 있다. 물론 비판정신을 잊지는 않았다는 단서도 꼭 덧붙인다. 이런 게 '잘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평가할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잘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 상황에서도 '빌빌거리는' 사람이 꽤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은 장진구처럼 대학문을 나선 뒤에도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냉혹한 양자택일의 상황에 처한다. 까놓고 말해서 교수가 되면 찬란하고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며, 교수가 못되면 칠흑같이 어두운 삶을 살아야 한다.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속앓이를 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돈도 빽도 줄도 연도 없이 서른줄을 넘어서면 백수가 될 수밖에 없다. 박사학위 소지자들 중 교수가 못된 사람들, 그러니까 용 못된 이무기들의 평균 월수입이 평균 30만원이라는 조사가 있다고 한다. 조금 과장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근거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강사료와 원고료같은 게 있겠지만 쥐꼬리만한 수준이고 품위 유지는커녕 생계 유지도 힘든 수준인 건 분명하니 말이다. 막말로 자동차 한달 기름값도 안 나온다. 100만원 정도만 되면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그럴 여지가 없는 액수다. 설령 요행히 마흔살 가까운 나이에 교수가 된다고 해도 문제다. 인생의 '손익분기점'이 이미 지나가버린 상태니 말이다. 일찌감치 다른 길을 찾아 취직자리를 알아 본다면? 이건 전공에 따라 다르겠지만 '배운 도둑질'이 그것밖에 없는 경우 취직할 곳도 마땅치 않을 때가 많다. 결국 오도 가도 할 데 없는 신세가 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면 이제 결혼도 하고 애도 하나 딸린 나이다. 한국 남자가 결혼하지 않고 개길 수 있는 시간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리 길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냐고? 어딘가에 얹혀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실업수당도 사회보장도 시원치 않은 한국에서 비빌 언덕은 그리 많지 않다. 만만한 건 가족이다. 하긴 대학 졸업한 자식을 직업 전선에 내몰지 않고 대학원씩이나 보낸 집안이라면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은 아니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니면 운좋게 넉넉한 집안의 처자를 배필로 맞이했거나... 이렇게 해서 장진구병이 발생한다. 나이 서른이 넘고 마흔이 가까워도 도무지 '자립심'이라곤 없다. 자립에는 경제적 자립 뿐만 아니라 정신적 자립도 포함되는데, 늘상 누구에겐가 기대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 하다 못해 동회에 가서 주민등록 등본을 띠는 일도 낯설고, 통장 관리하는 일도 서투르기만 하다. 드라마 중에서 "아버지 제게 살 길을 알려 주십시오"라고 울부짖는 모습은 희화화가 지나치긴 하더라도 그리 틀린 모습은 아닌 듯하다. 경제적 의존을 보상해주는 정신적 허영 그런데 무엇이 이들을 지탱해주는가. 어쩌다가 이들에게 말이라도 한번 붙여보면 평소에 무거웠던 이들의 입에서는 온갖 거창한 이론과 사상이 나온다. 19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세대에 속하는 인물이라면 정도가 더할 것이다. 민중, 민주화, 통일 등에 대한 거대 담론이 나오고 한국 사회구조의 모순에 대해 일장 연설이 나온다. 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즘, 욕망, 권력, 담론 등과 같은 새로운 개념도 등장할지 모른다. 지구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최신의 경향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정신적 허영'이 이들을 지탱해 준다. 대한민국 졸부들이 물질적 허영으로 정신적 허기를 채운다면, 백수 지식인들은 정신적 허영으로 물질적 궁기를 채운다. 프랑스의 사상가 삐에르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자면(이런 문구도 '지식인 특유'의 것이다) 전자가 경제적 자본의 소유자라면 후자는 '문화적 자본'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니 빈약한 경제적 소득에도 불구하고 백수 지식인이 굶어죽었다는 뉴스는 들어본 적 없다. 머리가 부르면 배도 부르다? 꼭 그렇지야 않겠지만 머리도 배도 부르지 않은 사람보다는 나은 게 분명하다. 그러니 오직 배를 채우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저런 이야기는 '놀고 있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먹고 살기 바쁜 처지에 저런 거창한 이야기들이 나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 사람이 자기한테 기대어 먹고 사는 인간이라면 '집어 치워'라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맞다. 그런 건 '우리들(혹은 니네들)끼리나 할 이야기'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할 이야기는 아니다. 과거에 대한 미망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놀고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장진구병, 다음 세대에 계승되다 386세대에게는 비교적 예외적이었던 장진구병은 그 다음 세대로 내려오면 일반화된다. 앞에서 386세대가 '헝그리 정신과는 거리가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다음 세대에게는 거리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먼 옛날 이야기다. 미국이나 유럽같은 나라에서 20살만 넘으면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한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이 세대는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 저거 사 줘"를 입에 달고 살아온 존재라서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야 된다. 조금 미루는 것도 참을 수 없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I think, therfore I am"라고 말했다고? 소비사회의 아이들은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I shop, therfore I am"이라고 말한다. 이런 '손벌림'은 결혼할 때 전셋집 한칸 마련해줄 때까지 계속된다. 그렇다고 해서 장진구병의 병인을 소비주의로 못박을 수는 없다. 소비주의가 강력한 다른 나라라고 해서 모두 한국식 장진구병이 발병했다는 말은 못 들었다. 말하자면 장진구병은 한국형 사회구조의 산물이다. 어떤 사회구조인가. 세 가지만 들자. 무엇보다도 한국의 전통적 가족주의다. 한국의 부모들은 부모된 도리를 다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혀 스트레스를 스스로 떠안는다. 이유는? 한국에는 노인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가 없을뿐더러 전통적으로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믿을 곳이라곤 가족 밖에 없었다. 한국 정부가 하는 일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국민연금이란 것도 수상하다. 그러니 믿을 것이라곤 가족밖에 없다. 노후설계보험 가입하는 셈치고 자식한테 투자하는 셈이다. 물론 투자로부터의 수익은 갈수록 불확실해지니까 문제는 문제다. 둘째는 학벌중시 사회구조다. 이건 첫 번째 요인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학벌만 좋으면 실력이 없어도 되는, 아니 학벌만 좋으면 실력도 있는 것으로 자동 간주되는 세상이라서 대학교 입학은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대형 이벤트다. 이 이벤트를 위해 총력동원체제가 성립한다. 대학교로 안 되면 대학원이라도 보내고, 대학원도 안 되면 유학을 불사한다. 요즘은 아예 조기유학으로 방향을 선회한 듯하다. 이건 뭐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말해 봤자 우울해질 뿐이고... 셋째는 주택 소유 문제다. 전세계에서 '전세제도'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다른 나라는 거액이 소요되지 않는 월세제도가 지배적이거나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융자를 통해 주택문제를 해결한다. 반면 한국은 적어도 수천만원은 있어야 방 한 칸이라도 장만할 수 있다. 씀씀이 헤픈 요즘 젊은 사람들로서는 쉽게 마련하기 힘든 액수다. 그래도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만 올라오면 원룸이나 오피스텔 정도는 가볍게 해결해주는 부모들이 꽤 많아 보인다. 아까 말한 '투자' 개념이다. 그 대가가 때로 장진구병으로 돌아온다해도 후회하면 안된다. 그런데 이건 비단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병도 아니다. 결혼을 해도 친정 들락날락하며 김치며 반찬이며 가져가는 '요즘 엄마들'도 허다하다. 요즘 '신세대 엄마'들은 세살백이 때부터 영어를 '주입식으로' 가르쳐서 애들을 '돌아버리게' 만든다고 한다. 얘들이 크면 장진구병이 아니라 무슨 병에 걸릴까" 사족: 백수 문화평론가의 항변 그런데 서두에서 언급한 자립에 성공한 386세대들은 '잘' 하고 있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그들의 자립이란 것도 진정한 자립이 아니다. 정치권에 들어가면 보스에 기대야 하고, 벤처기업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재벌 대기업과 거래해야 한다. 나머지 부분도 정도와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젊었을 때 그토록 경멸했던 대상과 적절히 타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이들이 '변절했다'고 투덜거리는 게 아니다. 단지 이들의 삶이 '하면 된다' 식으로 아득바득, 빨리빨리 살아왔던 부모 세대와 별 다를 바 없는 삶이고, 그렇다면 특별히 '우리는 다르다'고 떠들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백수로 남는 게 1980년대의 '시대정신'에 충실한 것 아닐까. 그게 '반(半) 백수 지식인'인 나의 신조다. 문제는 백수로 살면서 '자의식'이 없을 때 장진구병이 생기는 것이지 자의식만 충분하다면 그닥 문제될 건 없다. 정신적 허영이 아니라 정신적 '풍요'를 바탕으로 물질적 빈곤을 감수하면 왜 안 되는가. 드라마 <아줌마>에서 장진구가 곧잘 말하는 '저들 민중'처럼 밤낮없이 일에 매달려 살아가는 건 과연 '좋은' 삶인가. 그건 어떻게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는 것'을 지고지선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아직도 '대안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이상하게 본다. 어쩌면 그게 장진구병보다 더 심각한 병이고 장진구병을 도지게 만드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 월간 <에스콰이어>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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