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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예술 분야에서 2001년 상반기의 화제작이 영화 <친구>와 TV 드라마 <아줌마>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친구>는 한국영화의 흥행에 관한 각종 기록을 모두 갈아치우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중이고, <아줌마>는 시청률 신기록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장진구 신드롬'이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 글이 두 작품의 '인기의 비결'을 분석하는 글은 아니며, 영화평론이나 드라마 평론은 더더욱 아니지만 한 가지 주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그것은 두 작품에서 묘사된 한국 남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먼저 확인해둘 점은 두 작품이 어느 정도는 '지식인 영화(혹은 지식인 드라마)'에 속한다는 점이다. <친구>는 주로 '깡패'와 '건달'의 세계를 다루고 있고, <아줌마>는 '기층민'의 세계를 주로 다루고 있지만 그걸 바라보는 시선은 다분히 지식인의 것이다. <친구>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오므로 '당연히' 지식인에 속할 테고, <아줌마>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물은 '어쨌든' 교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므로 마찬가지다. 또 한가지 두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지식인이라는 존재에 특정한 세대의 흔적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한때 '386세대'라는 표현으로 불렀던 그 세대 말이다. 그 세대는 자연스럽게 한 시대의 산물이고, 그 시대란 다름 아니라 '1980년대'라는 시대다. 이제는 지식인이든, 386세대든, 1980년대든 빛이 바랜 형상으로 다가온다. 그건 그것들이 가볍게 청산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들 사이를 엮어주었던 끈이 느슨해져간다는 것에 가깝다. 끈이 꽉 조여졌을 때는 어땠냐고 묻는다면, 그 시대는 창백한 지식인이 강인한 투사가 되고자 했다고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지성과 용기를 고루 갖추어야 했고, 겉보기에는 유약해 보이면서도 강인한 내면을 가진 '청년학생'의 이미지는 아직도 우리 주위에 남아 있다. 당시 대학생이 모두 그랬다고 한다면 비약이겠지만, 당시의 대학생들은 '범생이'로 대학교에 입학하여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라는 책을 읽으면서 '강인하게 살아야 한다'는 지향을 가져야만 했다. 그게 다른 사람에 의해(혹은 '위로부터') 강요된 것인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런 특징이 그 세대를 이전 및 이후 세대와 가르는 특징인 것은 분명하다. 이 세대가 전후의 경제성장의 물질적 혜택과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따라서 '헝그리 정신'과는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대의 정체성이 '나약하다'는 단어와 거리가 있다면 이런 특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 세대(및 시대)의 문화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남성중심적'이었다. 요즘 여학생들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여학생들은 남학생 선배를 '형'이라고 불렀을 정도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일 뿐이다. 드라마 <아줌마>에서는 이런 강인함이 스멀스멀 사라져가고 있는 모습이 여실히 묘사된다. 묘사가 너무 사실적이라서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느낌이 있을 정도다. 주인공 장진구는 형편없이 망가졌으면서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존재고, 과거의 미망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존재다. 어쩌다가 '남자답게' 강인한 면모를 드러내려고 하면 허장성세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코미디가 연출될 뿐이다. 정말로 이런 유형의 사람이 그렇게 많은가라는 질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과거의 관점에서 진지했던 말들이 쉽게 희화화되어버리는 소통의 난맥상이다. 아니, 그건 이미 오래된 현상인지도 모른다. 자각이 느렸고 제대로 된 형상화가 없었을 뿐. 그 점에서 <친구>에서 화자의 대학교 생활이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징후적이다. 한번쯤 캠퍼스의 모습이 나옴직도 하지만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19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많은 이들이 "대학교에 들어와서 인생관이 180。도 바뀌었다"라고 말하는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이례적이다. 모르겠다, 영화에서 그런 주제를 다루는 일이 이제는 너무나 진부해져 버려서 고의로 피한 건지도.... 어쨌든 이 점은 대학생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실은 매우 편협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우회적 비판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386세대니, 1980년대니 하는 것들이 사실은 대학 문턱을 밟아본 사람에게만 해당될 텐데도 보편적 의미를 부여하는 현상에 대한 반발일지도 모른다(이 말은 감독의 의중에 그런 게 전혀 없는데도 지레짐작하는, 즉 '헛다리 짚는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모래시계>가 떠올랐고, <친구>가 <모래시계>보다 핵심에 가까이 접근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래시계>에서는 '여대생과 건달의 사랑'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모티브였다. 이런 류의 멜로드라마는 괜히 시선을 집중하게 되지만, 보고 나면 이것처럼 시시하고 황당한 이야기가 없다. <친구>는 이런 유혹을 벗어 던지고 있다. '대학생 그룹 사운드'가 연주하는 게 더 어울릴 법한 "연극이 끝난 뒤"를 여고생 그룹이 연주하는 것도 그렇고, 여고생이 곱상한 범생이가 아니라 칠공주파 두목같은 날라리라는 점도 그렇다.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는 공간은 대학교가 아니라 고등학교다. 이때 고등학교라는 제도는 매우 양면적인데, 그곳은 건달과 범생이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이자 둘이 친구로 지내는 것을 방해하는 강력한 기제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제 3자가 객관적으로 보기에 건달은 범생이를 타락시키는 존재에 지나지 않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자기에게 정을 주고 필요할 때는 '보호'해주는 존재라는 양면성도 존재한다. '진짜 남자'는 건달이고, 범생이는 그런 남자다움에 콤플렉스를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된 이후 예정된 결말을 향해 진행되는 사건들은 배우들의 연기가 아무리 빼어났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무언가 허전했다. 결론은 친구와의 우정이나 의리같은 아주 원초적인 덕목이었다. 이건 지식인으로서의 감독이 '기층민' 혹은 '밑바닥 인생'의 삶을 낭만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고, 만약 그게 맞다면 '범생이의 건달 콤플렉스의 연장'에 다름 아니다. 진지하게 해석한다면(그게 더 심각한 지식인병인지 모르지만) 감독은 1980년대 대학생들 사이에 존재했던 '어떤 공동체 의식'보다는 '불알 친구' 사이의 정서적 친밀감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 생각의 기저에는 '어떤 공동체 의식'이 와해되면서 개인이 정서적으로 기댈 곳이라고는 사적 관계밖에 없다는 무의식적 판단이 놓여 있다. 영화에서 준석이 동수를 살해하는 시점이 1990년대 초로 설정되어 있는 점은 의도적으로 보인다. 의리 빼면 시체라는 건달의 세계에서마저 1990년대는 실리를 위해 친구가 등을 돌리고, 등을 돌렸다는 이유로 목숨까지 빼앗아 버리는 시대다. 이렇게 잔인한 현실을 극복하는 길은 죽음을 각오하고 '의리'를 지키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영화의 결론이다. 그것 역시 '친구에게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아주 단순하고 원초적인 감정에 근거를 둔다. <아줌마>가 흥미로운 것은 이런 대목에서다. 거기서 또한명의 망가져가는 아저씨로 나오는 인물이 있다. 장진구의 둘도 없는 죽마고우이자 '대중문화 평론가'(실질적으로는 '백수')인 박재하다. 잘 나가는 다른 친구들에 둘러싸인 채 피차 내세울 것 없던 둘은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서로 기대고 살아가는 사이지만, 급기야는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연적이 되어 '그 나이에' 다시는 얼굴 안 볼 것처럼 뒹굴고 싸운다. 물론 둘은 금세 화해한다. <친구>에서처럼 의리로 비장하게 맺어진 우정이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어떻게 보면 더 끈끈하고 '징한' 친구 사이다. 하지만 이 관계 역시도 '어떤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이 사라진 뒤의 사적 관계 이상은 아니다. 그 점에서 '장진구병'이란 나이가 40줄에 이르러도 자립을 못한 채 부모에 한없이 의존하는 증상에 그치지 않고, 가족이나 친구같은 일차적 관계에만 의존하는 증상도 포함된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에서 표현된 사나이들 사이의 '의리'가 장진구병에 대한 대안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수많은 사회적 관계들을 맺으면서도 절실한 순간에는 가장 원초적이고 끈끈한 사이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짜여진 한국의 사회구조에 대한 성찰을 보다 깊게 전개했으면 어땠을까. 그래서 '어떤 공동체 의식'이 남아 있다면 그건 이제 '연줄'이라는 한국 사회의 징그러운 지배 메커니즘의 하나로 추하게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는 없었을까. 그런 걸 기대하는 건 주관적인 바램일까, 객관적으로 무리일까.... 혹시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의 '지역성'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이 필수적인데, 이것처럼 터부시되는 게 없어서일까... 사족 1: 사운드트랙 <친구>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은 제이 가일스 밴드(J Geils Band)의 "Come Back"이나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의 "Bad Case of Loving You"다. 쾌락적이고 '남근적'인 록 사운드 말이다. 신기한 것은 저 노래들이 '외국의 팝송'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제는 '시끄럽다'는 느낌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 사나이다움이 '멋진' 시대가 지나갔다는 사실의 반증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한국에서 록 음악의 수용은 여전히 스테레오타입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준다. 반면 <아줌마>의 마지막 회 방영분에서 존 레논(John Lennon)의 "Imagine"이 장진구와 박재하의 '새삶'의 지표가 되는 장면은 드라마에서 가장 코믹한 부분이자, 이 드라마 자체가 '웃기는 드라마'인 요인이 되었다. '존 레논이 한국에 와서 참 고생 많이 한다'는 생각은 드라마에 대한 나의 비판이 아니라 작가의 숨은 의도처럼 보인다. 메인스트림 취향의 까페에서 '무드 음악'으로 틀어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히피즘과 페미니즘을 운운하는 두 친구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사족 2: '아줌마 영화평론가' 최보은은 한 잡지에 기고한 <친구>에 대한 감상평에서 '수컷들' 사이의 의리와 끈끈한 연대가 "징그러운 한편으로 한없이 부러웠다"(<씨네 21>, 279호, 2001. 4)고 고백했다. 그녀에 의하면 여자들의 의리란 기껏해야 "신세타령을 들어주거나 꿔간 돈을 제때 값거나, 친구의 애인이 아무리 맘에 들어도 가로채는 짓 따위는 자제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여자가 되어 본 적이 없어서 판단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여자는 개인이고 남자는 집단이다"라는 섬뜩한 진리를 도출하고 있다. * 월간 <문화예술>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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