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Afro-beat Never Stands Still

 

1. 나이지리아의 대중음악

2. 펠라 쿠티와 아프로비트

3.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시 아프리카로


1. 나이지리아의 대중음악 

Intro: 페미 쿠티, 아프로비트의 새로운 제왕?

  오랜만에 [CMJ]를 다시 구입하게 된 것은 페미 쿠티(Femi Kuti)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weiv]의 'US 통신원' 한 명 덕분에 알게 된 그의 이름에는 '나이지리아'라는 기호가 따라다닌다. 나이지리아? '축구 잘하는 아프리카의 나라'라는 정도 외에는 별로 아는 바 없다. 관련된 이름이 몇 개 더 있다. "Smooth Operator"를 부른 '해프 나이지리언(half nigerian)' 샤데이(Sade), 그리고 한때 NBA를 주름잡은 '흑표범' 하킴 올라주원(Hakeem Olajuwon)이 나이지리아와 아주 조금 관련있는 대중 스타다. 하지만 이 글의 이야기와는 큰 상관 없다. 박찬호와 박수영만 알고 한국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으니 말이다.

  페미 쿠티는 누구인가? 'US 통신원'에게 내가 먼저 이름을 알려준 펠라 쿠티(Fela Kuti)의 아들이다. 길게 부르면 펠라 안티쿨라포 쿠티(Fela Antikulapo Kuti)고, 짧게 부르면 그냥 펠라(Fela)다. 그를 부르는 별명은 무수히 많다. "아프로비트의 제왕(The King of Afrobeat)", "나이지리아의 밥 말리", "가난한 노동자의 목소리", "흑인의 대통령(black president)"... 1997년 펠라가 AIDS로 사망했을 때 나이지리아의 수도 라고스(Lagos)의 거리는 수백만명의 인파로 가득찼다. 반정부 재야 정치단체인 나이지리아 통일민주전선(United Democratic Front of Nigeria)의 공식 발언도 있었다. "당신을 잘 알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당신은 결코 평생을 바쳐 싸워왔던 악과 타협하지 않았다고. 시간과 운명 때문에 가끔 약해지기도 했지만 당신의 의지는 언제나 강했으며,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 아프리카라는 당신의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최상의 찬사다.   

  펠라는 자신의 죽음을 "조상들에 가담했다"고 표현했다. 그가 조상에 가담하면서 비로소 그의 이름도 내 귀에 들어왔다. 아직 영미권의 '얼터너티브' 음악에 중독되었던 무렵 구입한 [Alternative Album Guide]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얼터너티브 음악'의 명반을 소개한 책에 웬 나이지리아의 '베테랑' 뮤지션이 들어있는가? 하지만 여기 소개된 그의 삶은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하지만 펠라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 '패밀리 비즈니스'를 계승한 페미 쿠티의 음악을 먼저 들어보자.   

  페미의 [Shoki Shoki]는 미국 시장에서 정식 발매되는 첫 앨범이다. 1999년 12월 펠라의 수많은 편집 앨범 중 최신판인 [The Black President: The Best of Best of Fela]를 배급한 유니버설이 페미의 음반도 배급을 맡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끼워팔기'인가. 아무튼 음반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아마존(http://www.amazon.com)'이나 'CD 나우(http://www.cdnow.com)'에 가면 리얼 오디오로 사운드 샘플을 들어 볼 수 있다. 리얼 오디오의 음질이 도저히 성에 안차는 사람이라면 [CMJ] 2000년 2월호의 샘플 CD에서 "Beng, Beng, Beng"이라는 제목을 찾아봐라.

  퍼커션의 리듬이 면전을 강타하고 에너지 넘친다. 이런 스타일의 음악에 귀가 솔깃하다면 한때 슬라이 스톤(Sly Stone),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조지 클린튼(George Cliton)의 이름에 매혹되었던 사람이리라. 레코딩된 트랙이라고 하더라도 '라이블리'하다. 무겁고 강력한 베이스 라인이 넘실대는 사운드 위에서 페미는 웃옷을 벗은 채 마이크와 색소폰을 번갈아 잡고 노래부른다. 라이브 공연에서는 16명으로 이루어진 페미의 밴드 포지티브 포시스(Positive Force)가 곡예같은 쇼를 보여준다. 왁자한 파티의 분위기다. 아무래도 직접 본 사람의 문장을 인용하는 편이 낫겠다. 아래 문장을 읽으면 공연 장면이 대략 떠오를 것이다.

  "각각의 곡들은 다양한 섹션을 통해 이동해 간다. 페미 쿠티의 보컬에 대해 여자가 응수하고 드럼이 강조점을 찍어준다. 불규칙하게 변동하는 비트 위에서 색소폰 라인은 마치 주문을 외는 듯하면서 소용돌이친다"(Jon Pareles, "Femi Kuti and Positive Force: Putting Smile on Father's Music", New York Times, September 20, 1999)  이 곡은 "She says, Love Me now / She says, squeeze me now"라는 가사나 "It's all about sex"라는 페미 본인의 말처럼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곡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곡은 그의 고국인 나이지리아에서는 금지곡이 되었다. 그러면 아프로비트가 아무 생각없이 놀고 즐기는 음악이냐고? 맞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빌보드]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 엉덩이를 움직이게 하는 음악(hip-shaking music with a message)"라는 기지어린 표현을 쓰고 있다. 이 문장에서 보듯 아프로비트는 아프리카인의 정치적 자각을 담고 있다. 1999년 페미는 MASS(Movement Against Second Slavery)라고 이름의 단체를 조직하하여 나이지리아의 청년들에게 '아프리카적 상황(African Condition)'을 자각시키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CMJ]는 페미 쿠티를 굵은 글씨로 "아프로비트의 새로운 제왕(The New King of Afrobeat)"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옛 제왕은 펠라 쿠티다. 이때 아프로비트를 '리듬의 비트가 강한 아프리카산(産) 음악'이라는 보통명사라고 말하면 '월드 뮤직 매니아'들에게 망신당하니 조심해야 한다. 또 나이지리아를 대표하는 대중음악의 장르가 아프로비트라고 말해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페미(그리고 펠라)의 음악은 스타일 면에서는 '아프로 아메리칸'의 대중음악인 재즈, 소울. 훵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프로비트는 나이지리아에서 탄생한 음악 스타일들 중에서 '미국 흑인음악으로부터 강하게 영향받은 스타일'로 평가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위 인용문이 실린 신문기사의 타이틀을 보자. '아버지의 음악에 미소를 입히기'? 아버지의 음악에는 왜 미소가 없었는가. 페미의 앨범의 나머지 트랙들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우선 그의 고국 나이지리아의 문화적 상황부터 검토해 보자. 미소 없던 나라, 미소 없던 시대로.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는 1억이 넘는 인구와 924,000km2에 달하는 국토를 가진 대국이다. 고등학교 지리 수업 시간 같은 분위기를 조장함을 용서하라. 어쨌거나 인구가 1억이 넘으니 통계적으로는 이른바 '블랙 아프리카(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의 주민들 중 네 명 중 한 명 꼴로 나이지리아 국적을 보유한 셈이다. 국토의 면적은 미국의 1/10 정도로 더 큰 나라도 많지만 서아프리카 해안과 평야를 차지하고 있어서, 사막과 정글이 대부분인 나라와는 '질'이 다르다. 게다가 노른자위 땅에 석유도 매장되어 있는 이 나라는 현재 세계 10위의 산유국이다.

  이런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아니 좋은 조건 때문에 이 나라의 운명은 험난하기만 하다. 한마디로 나이지리아는 유혈 쿠데타의 천국, 아니 지옥이다.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약 40년의 기간 중에서 30년을 군부 독재정권 치하에서 보내야 했고 작년 말 가까스로 자유 선거에 의해 민정으로 이양된 상태다. 신임 대통령 올루세군 오바산조(Olusegun Obasanjo)도 1976년부터 1979년까지 군부의 임시정부 수반으로 재직했던 경력이 있다. 한때 중진 개발도상국에 속했지만(독립했을 무렵 나이지리아의 1인당 GNP는 남한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금은 세계 최빈국 20국에 속하는 신세가 되어 있다. 정치적 소요가 심각했던 것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복잡한 세력관계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민족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나이지리아 연방은 현재 21개의 주(state)로 구성되어 있는데, 민족은 자그만치 252개에 이른다. 3대 민족은 하우사-풀라니(Hausa-Fulani), 이보(Ibo), 요루바(Yoruba)이다. 참고로 하우사와 풀라니는 다른 민족이지만 같은 언어권이므로 하나의 민족처럼 취급되고 있다. 이런 민족의 분할은 지역, 종교, 계층의 구분과 대략 일치한다. 북부에는 하우사-풀라니가 거주하고 있고, 남부는 동부에 거주하는 이보와 서부에 거주하는 요루바로 구분된다. 하우스-풀라니는 이슬람 교도이며, 이보는 로마 카톨릭 교도이고 요루바는 기독교도이다. 하우스-풀라니는 군인과 정치인을 많이 배출하고, 이보와 요루바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또 16세기 이후 노예 사냥의 주 대상은 이보족과 요루바족이었다.   

  이런 민족 갈등 = 지역 갈등 = 종교 갈등 = 계급 갈등 = 직업 갈등은 독립 후 채 6년이 지나지 않아 표면화되어, 급기야 30개월 간의 비극적 내전을 낳았다. 발단은 1966년 1월 동부 출신 군인에 의한 쿠데타였고 이는 각지에서의 정치적 테러를 거쳐 같은 해 5월 북부 출신 군인의 쿠데타를 거쳐 낳았다. 그 직후 동부의 군부가 비아프라(Biafra)라는 이름의 독립국가를 선포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비아프라 내전(공식 명칭은 '국민 통일 전쟁(National Unity War)')'이다. 내전은 1970년에 이르러야 가까스로 정상화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200만명의 사망자를 남겼다(공식 통계로는 10만 명이지만). 계속된 '민정 이양'이라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1979년부터 1983년 사이의 예외적 기간을 제외하곤 최근까지 군부 지배 하에 신음했다.

  이런 비극적 운명 속에서도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의 맹주일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세계적 강국이다. 나이지리아 뿐만 아니라 기니만(灣)을 따라 도열한 서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좀 경직되긴 했지만 넬슨 조지(Nelson George) 같은 미국의 흑인 음악 연구자들은 블루스, 재즈, 고스펠, 소울 등의 먼 기원을 서아프리카에서 찾고 있으며, 딕 헤브디지(Dick Hebdige)같은 레게 연구자들도 카리브해 지역의 흑인 음악의 기원을 이 지역에서 찾고 있다. 또한 현대의 음악 중에도 세네갈의 마코사(makossa), 코트디브와르의 즈글리비티(zglibithy), 가나의 하이라이프(highlife), 나이지리아의 주주(juju) 등은 '월드 뮤직'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이름들이리라. 이제까지의  설명이 너무 장황하고 번잡스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일단 시기와 지역을 좁혀서 가나의 하이라이프부터 시작하자.     

하이라이프

  서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지역의 주도적 음악 장르는 하이라이프(highlife)다. 하이라이프의 원산지는 가나(Ghana)지만 나이지리아를 비롯한 나라들에서도 인기가 높다. 하이라이프의 음악 스타일은 20세기 초에 형성되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음악 스타일에 대한 정의는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 문헌에는 "서아프리카의 전통 댄스 리듬과 멜로디에 유럽의 군악, 폴카, 발라드 등이 혼합된 스타일"([Music At The Margin])이라고 표현되어 있고, 다른 문헌에는 "유럽의 폭스트로트(foxtrot)와 카리브해의 카이소(kaiso)가 토착 리듬들과 융합된 것"(http://www.africaonline.com)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다른 문헌에는 "아프리칸, 캐러비언, 하와이언 음악의 잡종"(http://www.allmusic.com)이라고 되어 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하이라이프가 서아프리카를 거쳐간 다양한 사람들의 음악 문화가 뒤섞인 잡종이라는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즉, 서아프리카 '원주민' 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자, 항해사, 선교사 등 유럽의 백인, 그리고 아프리카로 돌아온 흑인 노예들 모두가 하이라이프의 형성에 기여했다.

  하이라이프는 음악 스타일을 지칭했을 뿐만 아니라 '좋은 드레스를 입고 모자를 쓰고 클럽의 비싼 입장료를 내는 계층의 생활'을 지칭했다. 또한 1920년 경에는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dance band highlife)'와 '기타 밴드 하이라이프(guitar band highlife)'라는 두 개의 잡종을 탄생시켰다. 식민지 시기 '고급생활자'를 위한 음악은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였다.
ET 멘사(Emmanuel Tettey Mensah)와 그의 밴드 템포스(The Tempos)는 1940년대 후반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의 전성기를 만든 인물이었다.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는 색소폰과 브래스기가 지배적인 스타일로 음악 스타일 면에서나 문화적 기능 면에서나 빅 밴드(및 콤보 밴드) 시기의 미국 재즈와 비견될 수 있다. ET 멘사는 하이라이프를 여타의 서아프리카 제국에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1956년 루이 암스트롱과 협연하면서 다른 지역에도 하이라이프를 알렸다. 또한 가나가 사하라 사막 이남에서는 처음으로 독립을 쟁취했을 때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범아프리카주의의 창시자' 엔크루마(Kwame Nkrumah)는 하이라이프를 가나의 문화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간주하였고 멘사는 "가나의 음악적 대사"라는 비공식적 칭호를 얻었다.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는 ET 멘사 외에도 램블러스 인터내셔널(Rambler's International)과 우후루 댄스 밴드(Uhuru Dance Band) 등에 의해 가나의 대도시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한편 농촌 지역에서 성장한 기타 밴드 하이라이프는 업비트에 관악기가 들어가는 점은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와 유사했지만 팜 와인 기타(Palm Wine Guitar)라고 불리는 독특한 기타 주법과 사운드를 발전시켰다. 술 이름을 본떠 만든 팜 와인 기타의 독특한 기타 피킹은 서아프리카 지역 전체로 파급되었다. 1950년대 EK 니아메(EK Nyame)와 그의 밴드 아칸 트리오(Akan Trio)(참고: 아칸이란 가나의 주요 민족 중의 하나다)가 음악과 희극을 결합시킨 '콘서트 파티(concert party)'라는 장르를 발전시키면서 전기를 맞았다. 또 1960년대 후반에는 테디 오세이(Teddy Osei)와 그의 밴드 오시비사(Osibisa)가 '아프로 록'이라고 불릴 만한 스타일을 창조하여 런던 등에서 국제적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참고: 오시비사라는 이름은 오시비사바라는 가나의 전통 리듬 가운데 하나에서 따온 것이다). 오보 아디(Obo Addy)처럼 가나에서의 경력을 기초로 미국으로 건너가(1977년 시애틀로 이주) 아프리카 음악과 아메리카 음악, 전통적 음악과 현대적 음악을 퓨전하는 뮤지션도 하이라이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독일에는 부르거-하이라이프(Burger-highlife)라는 이름으로 독일과 가나 음악이 혼성된 음악 씬도 존재한다.  

  가나는 그렇다치고 나이지리아에서는? 나이지리아에서 하이라이프가 붐을 일으킨 것은 1951년 ET 멘사가 라이브 공연을 다녀가면서부터라는 것이 또하나의 통설이다. ET 멘사와 비슷한 시기에 나이지리아의 하이라이프 스타가 된 바비 벤슨(Bobby Benson)은 나이지리아 음악인 연맹의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하이라이프의 인기는 유지되었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주주(juju)의 위세에 밀리게 된다. 그 이유는 1960년대 후반 나이지리아를 휩쓴 내전과 무관치 않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하이라이프는 주로 이보(Ibo)족이 즐기는 음악이었고, 주주는 요루바족이 즐기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전은 북부의 하우사-풀라니와 이보 사이에서 발생했지만 '반란군'인 이보족이 패퇴하면서 생긴 하이라이프의 공백을 주주가 메웠던 것이다.

주주(juju)

  다른 아프리카의 민속 음악과 마찬가지로 요루바족의 음악 전통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듬이다. 각종 북이 만들어내는 요루바족의 댄스 리듬은 복잡한 폴리리듬으로 정평이 나 있다. 물론 요루바의 전통 음악 스타일이 하나였던 것은 아니다. 주주는 아기그디보(agigdibo), 웨레(were), 아팔라(apala), 사카라(sakara), 와카(waka) 등의 리듬을 통합한 것이다. 지역의 음악이 전국의 음악으로 통합되는 '근대화'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주주 역시 하이라이프와 비슷한 시기인 19세기 말 - 20세기 초 무렵 형성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전통 댄스 리듬에 기타, 밴조, 아코디언, 우쿨렐레 등과 결합된 스타일을  1920년대 바바툰데 킹(Babatunde King)이 주주라는 용어로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1930년대 팜 와인 기타가 도입되고 1940년대 토킹 드럼이 추가되면서 주주의 고유한 사운드를 확립했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주주가 하이라이프보다 상대적으로 토착적이고 따라서 '언더그라운드적'인 음악이었다. 즉, 주주는 '가난한 요루바족(이전에는 주로 농민, 이후에는 주로 노동계급)'의 정서를 반영한 음악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주주는 1950년대 이후 현대화되는 단계를 맞이하여 1970년 내전이 끝날 무렵에는 농촌 주민 뿐만 아니라 도시의 노동계급과 빈민을 주요 청중으로 확보하면서 나이지리아를 대표하는 장르로 떠올랐다. 그 주역은 '모던 주주의 아버지' I. K. 다이로(Isaiah Kehinde Dairo: 1930년 생)였다. 젊은 시절 도시의 노동자로 전전하던 다이로는 1957년 모닝 스타 오케스트라(The Morning Star Orchestra)를 결성하였고, 뒤에는 블루 스파츠(Blue Spots)로 개칭했다. 블루 스파츠는 1960년 이바단(Ibadan)에서 나이지리아 독립을 기념하는 한 행사에서 연주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1961년에는 이바단의 TV 방송국에서 개최한 주주 컨테스트에서 다른 밴드를 압도하면서 나이지리아의 주주를 대표하는 밴드로 부상했다. 대표곡 "Omo Lanke"에서 들을 수 있듯 기타와 아코디언으로 시작하여 한 두 절을 노래부른 다음 퍼커션과 주고 받기식의 보컬이 이어지는 형식은 이후 '모던 주주의 원형'이 되었다. 또한 요루바족의 속어와 속담을 사용하고 다양한 방언으로 구술하는 다이로의 보컬은 주주가 도시와 농촌 지역 모두에서 대중화되는 주요한 요소였다. 말하자면 다이로는 주주의 "토착화(indigenization)와 현대화(modernization)를 동시에 이룬 인물"(Christopher Waterman(1990), [Juju, A Social History And Ethnography of an African Popular Music], University Of Chicago Press)이었다. 주주가 국제적으로 전파되면서 다이로는 1963년 영국 정부에 의해 '영국 왕실 멤버(Members of British Empire)'가 되었다.  

  1970년 내전이 끝나면서 주주는 킹 서니 아데(King Sunny Ade), 에벤에제르 오베이(Ebenezer Obey), 애드미럴 델레 아비오둔(Admiral Dele Abiodun), 세군 아데왈레(Segun Adewale)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토킹 드럼, 기타 라인, 주고 받기식의 보컬은 여전히 주주의 기본 요소였지만 기타는 전기 기타로 바뀌었고 페달 스틸 기타와 퍼커션도 도입되었다. 특히 킹 서니 아데와 에벤에제르 오베이는 숙명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면서 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가수이자 기타리스트이자 밴드 리더인 두 주주 음악인은 더많은 기타, 더많은 페달 스틸 기타, 더많은 보컬 코러스, 더많은 연주 시간을 도입하면서 필사적 경쟁을 벌였다.   

  킹 서니 아데의 음악은 '록 스타일의 주주'라는 평을 받는다. 이는 일차적으로 보통 6개를 사용하는 기타 라인 때문이고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드럼 패턴 때문이다. 물론 밴드 멤버가 보통 10명을 넘어서는 일은 록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나아가 그는 다이로의 아코디언을 신시사이저로 '업데이트'하고 첨단 전자음향도 도입하여 세련된 음색을 만들어 냈다. 킹 서니 아데는 1977년 나이지리아 정부가 유치한 제 2회 아프리카 예술축제(FESTAC)를 통해 범(凡) 아프리카적 스타가 되었고, 여세를 몰아 1982년에는 아일랜드 레이블과 계약을 맺어 국제적 스타로 발돋움하였다. 아일랜드 레이블은 킹 서니 아데를 "나이지리아의 밥 말리"라고 홍보하면서 영미권의 시장을 노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데는 말리만큼은 되지 못했다. 오베이도 '버진(Virgin)'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몇 장의 앨범을 발표했지만 성과는 서니 아데보다조금 못 미쳤다. 198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몽트로 재즈 페스티벌(Montreaux Jazz Festival)에서 수상을 했고 1985년 음반 [Juju Jubilee](1985)가 평단의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서니 아데는 1995년 [E-Dide - Get Up]을 통해 영미의 음반시장에서 재기를 시도했고, 오베이도 1998년 편집음반 [Juju Jubilation]으로 시장의 관심을 지속시키고 있다. '나이지리언 인베이전'은 열성적인 일군의 음반감상자들을 만들기는 했지만 '자메이칸 인베이전'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1970년대 이후 나이지리아의 국민들에게 사랑받은 장르가 주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주만큼 국제화되지는 못했지만 후지(fuji)와 아팔라(apala)라는 장르도 광범한 인기를 누렸다. 푸지나 아팔라는 기타의 역할이 약하고 퍼커션의 역할이 보다 강한데, 이를 위해 아팔라(apala: 아팔라는 본래 리듬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사카라(sakara), 와카(waka) 등의 전통 리듬을 융합시켰다. 푸지 역시 요루바족의 음악인데 주주와는 달리 기독교가 아니라 모슬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닥터 알하지 시키루 아인데 배리스터(Dr. Alhadji Sikiru Ayinde Barrister)는 1970년대 이래 푸지의 수퍼스타로 군림하고 있는데, '푸지(Fuji)'라는 일본식 이름을 떠올린 것도 배리스터다. 이런 작명은 엉뚱하게도 저팬(Japan)의 "Mountain Of Love"를 들은 직후였다고 한다. 그곳은 자국의 음악을 '국악', '가요'같은 보편적 이름으로 부르는 문화는 없는 모양이다.  

  하이라이프든, 주주든, 푸지든 여기서 나이지리아의 음악인들이 활동하는 환경을 고려하면서 개관을 마쳐보자. 나이지리아의 음반 시장 규모는 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다음으로 크다. 개발도상국답게 공식 통계는 없지만 한 해 약 2-3천여 종의 음반이 발매되고 있다는 추정 통계가 있다. 또한 유럽에 지배받았던 역사로 인해 음반산업 역시 유럽에 본사를 둔 폴리그램과 EMI 두 메이저 음반사가 시장을 양분해 왔고, 매출액의 60%는 '외국'에서 제작된 레코드이다. 음악 취향의 '국제화' 혹은 '대외의존'도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다는 뜻이다. 자연스럽게도 미국의 흑인 대중음악이 가장 인기가 높다.  

  크고 다양한 음반 시장을 가진 반면 음악인의 환경은 거의 최악의 수준이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혼미하기 그지없는 정치 상황 때문이다. 어떤 음악인이 한 정권의 사랑을 받다가 불시에 정권이 바뀌면 '부역'에 대한 대가로 음악인으로서의 운명이 끝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독재정권답게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린 음악인에 대해 상이나 훈장을 수여하는 일도 많았는데, 음악인들은 여기에 협력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역으로 말하면 이는 독재정권조차도 중요성을 인정할 정도로 나이지리아 국민에게 대중음악이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전통적 공동체가 많이 남아 있다는 점도 중요한 작용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간접 지배' 동안 정당, 언론, 노동조합, 각종 협회 등 근대적 제도가 발달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전통적 공동체와 근대적 제도들 모두에서 대중음악은 중요한 요소였고 군사정부의 살벌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말살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전통적 공동체와 근대적 제도의 외양을 갖춘 '칼라쿠타 공화국(Kalakuta Republic)'이라는 이상한 곳을 찾아가 보자. 이곳은 레코딩 스튜디오와 리허설 공간을 겸한 곳이고 슈린(Shrine)이라는 라이브 클럽도 있다. 이곳의 주인은 대마초를 공공연히 물고 다니고, 팬츠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27명의 여인과 합동 결혼식을 올린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는 어떠한 군사정부와도 타협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왕국을 가꿔 왔다. 그가 바로 펠라다.

2. 펠라 쿠티와 아프로비트

아프로비트 혹은 나이지리안 다이애스포라(Nigerian Diaspora)   

  재미삼아 앞서 본 나이지리아 음악인들의 예명을 훑어보자. '서(Sir)' I.K.다이로, '킹' 서니 아데, '치프 코맨더(Chief Commander)' 에벤에제르 오베이, '어드미럴' 델레 아비오둔, '프린스 크라운(Prince Crown)' 세군 아데왈레. 경(卿), 왕(王), 총사령관, 제독, 왕자 등 하나같이 높은 사람의 이름을 앞에 달고 있다. 나이지리아 명사들의 허장성세와 과대망상을 보여주는 예다.

  이 점에서는 펠라도 뒤지지 않는다. 펠라의 본명은 펠라 랜섬 쿠티였지만 그는 이 이름이 '식민주의적'이라고 거부하면서 펠라 안티쿨라포 쿠티로 개명했다. 이는 '부적으로 죽음을 통제하는 사냥꾼'이라는 뜻이다. 또 뒤에는 '흑인 대통령(Black President)'라는 별칭도 사용했다. 다른 이들처럼 만만치는 않지만 무언가 좀 느낌이 다르다. 맞다. 하이라이프든, 주주든, 푸지든 음악의 전반적 분위기는 밝고, 명랑하고, 낙천적이고, 따뜻하다. 대부분의 음악인들은  음악적으로는 혁신주의자였지만 종교적으로는 전통주의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펠라의 음악은 '날 것 그대로'다. 하이라이프와 주주를 고스펠이나 리듬 &블루스에 비유할 수 있다면, 펠라의 아프로비트는 소울이나 훵크에 비유할 수 있을까. 스타일이 아니라 분위기가.

  펠라는 1938년 라고스 북쪽의 아베오쿠타(Abeokuta)에서 목사이자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와 '신여성'이자 정치운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흰소리지만 신중현과 동갑인 셈이다. 흰소리한 김에 히나 더하면 불우하게 성장한 신중현과 달리 펠라는 정치와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고 경제적으로도 여유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 덕에 펠라는 1958년 런던으로 의학을 공부하러 떠날 수 있었다. 잠깐 귀국했던 일을 제외한다면 1970년 나이지리아에 정착할 때까지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다이애스포러(diaspora)를 겪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앞에 언급했듯 나이지리아가 '식민지로부터의 독립 → 유혈 쿠데타 → 비아프라 내전'이라는 격변을 맞았던 시기였다.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펠라는 트리니티 대학의 음대에 등록했지만 유럽 고전음악을 공부하는 일에 취미를 못 느끼고는 낀 채 학교를 때려치우고 쿨라 로비토스(Koola Lobitos)라는 밴드를 조직했다. 펠라와 쿨라 로비토스는 런던의 재즈(및 하이라이프) 씬에서 연주했는데, 그는 자신의 음악을 아프로비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프로비트라는 이름은 '아프리카의 비트'라는 과대망상적 생각을 담고 있는데, 이에 더하여 미국의 팝 음악의 트렌드에 경사되고 있던 아프리카 연주인들에 대한 못마땅한 감정도 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펠라의 음악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등의 훵키한 소울의 영향이 지배적이었고, 그 결과 이름이 풍기는 느낌이나 펠라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아프로비트는 '아프리카의 음악 장르 중 아메리칸 소울의 영향이 강한 스타일'이라는 평을 받는다. 아프로비트가 '훵크의 나이지리아적 변종' 이상이 되기 위해선 다소의 시간이 필요했다.  

  1960년대 말 펠라의 이후의 사고와 행동에 깊고도 넓은 영향을 미친 두 가지 만남이 있었다. 하나는 진저 베이커(Ginger Baker)와의 교류다. 크림(Cream)과 블라인드 페이스(Faith Faith)라는 전설적 록 밴드의 드러머인 베이커는 1970년 나이지리아를 직접 찾아오는 등 펠라와 인간적, 음악적으로 교류했다. 이들의 협주는 ['69 London Scene](1970)의 한 트랙("Egbe Mio")과 라이브 앨범 [Fela Ransome Kuti & Afrika '70 Live With Ginger Baker](1971)에서 들을 수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은 1969년 밴드를 이끌고 로스앤젤리스를 찾았을 때 만난 샌드러 이시도어(Sandra Isidore)다. 흑인 급진단체 블랙 팬더당과 관련을 가지고 있던 이시도어는 펠라에게 맬컴 X와 엘드리지 클리버(Eldrige Cleaver) 등의 저작을 소개하는 등 흑인 내셔널리즘과 아프리카중심주의를 소개했다. 밴드의 이름을 나이지리아 70(Nigeria 70)으로 개명하고 자신의 성(姓)을 안티쿨라포로 개명한 것도 이시도어와 만난 뒤의 일이었다.  

  펠라가 나이지리아로 귀국한 것은 별달리 고상한 동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근로 허가증'이 없다는 이유로 로스앤젤리스 이민국으로부터 출국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막간을 이용하여 뒤에 ['69 Los Angeles Session]으로 발표되는 레코딩을 했다. 평자마다 견해가 갈리지만 이 음반은 아프로비트가 소울이나 훵크의 지역적 변종을 넘어서기 시작한 최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쿨라 로비티스의 악기편성은 재즈 밴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보다 거칠고 추진력이 강하면서도 그루브가 강했다. 또 이 시기의 음반에서는 드러머 토니 알렌(Tony Allen)의 탁월한 솜씨를 들을 수 있다.    

'칼라쿠타 공화국'의 '흑인 대통령'  

  1970년 나이지리아에 정착한 펠라는 앞서 언급한 '칼라쿠타 공화국(Kalakuta Republic)'을 차렸고 그와 동시에 밴드의 이름을 다시 아프리카 70(Afrika-70)으로 개명했다. 이런 활동은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 즉, 펠라는 소울과 훵크에 요루바 음악의 동태적 리듬을 결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나이지리아에서 펠라가 발표한 음악은 드럼과 베이스가 만들어내는 (미국적인?) 백비트 강한 훵키한 리듬을 기초로 하고 관악기 세션이 두드러지지만, 전기 기타, 콩가 등의 퍼커션, 여성 보컬 등으로 폴리리듬을 만들어내었다. 그 위에서 펠라는 색소폰과 전기 오르간의 솔로와 노래를 번갈아 가면서 연주했다. 펠라는 주로 영어로 노래부르지만 억양이 독특하고 요루바어가 섞여 있어서 '미국 흑인 음악'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는 뚜렷한 멜로디를 노래한다기보다는 주술을 외우듯 툭툭 내뱉는다. 여성 코러스와 주고받기(call-and-response)를 반복할 때는 부족의 전통 의식을 주재하는 부족장같아 보였다.  

  정력적인 레코딩과 라이브 활동을 통해 펠라는 1972년 경에는 이미 대스타가 되었다. 또한 그는 단지 대중 스타에 머물지 않고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와 더불어 군사 정부의 탄압도 시작되었다. 1973년부터 정부의 감시를 받던 펠라는 1974년 대마초 소지 용의로 50명의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는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1977년 1,000명의 군인들이 펠라의 집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여성 멤버들을 성폭행하고, 급기야 77세의 펠라의 노모를 2층에서 떨어뜨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이지리아의 초기 페미니스트라고 불릴 수 있는 펠라의 모친은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고, 펠라 본인도 뼈가 부러지는 상처를입었다.  

  그러면 왜 이런 탄압이 발생했는가. 무엇보다도 펠라의 가사에 담긴 메시지 때문이었다. 1974년의 "Expensive Shit"이란 노래부터 시작해 보자. 1974년 마리화나 소지죄로 경찰의 급습을 받은 펠라는 마리화나를 입에 삼켜버렸고 경찰은 배설물을 증거로 삼기로 하고 펠라를 구류에 처했다. 구류 중에 펠라는 간수가 잠든 사이 다른 사람의 변기에 대변을 봤고 이를 "값비싼 똥"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는 펠라는 정부 당국의 눈엣가시였다. 게다가 1년 뒤에 발표한 [Roforo's Fight]에 수록된 "Go Slow"(1975)에서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토지를 수용하려는 정부를 비아냥거리면서 민중들에게 "천천히 다녀라"라고 설파했다. 1977년 앨범 [Zombie]는 군인과 정치인들을 영혼없는 무의지한 인간인 "좀비"라고 칭하면서 "Upside Down"과 "Everything Scatter"에서 정부의 난폭함과 관료의 무능을 꼬집었다. 이 앨범은 곧 금지처분을 받았고, 뒤이어 칼라쿠타 공화국으로 군인들이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Sorrow, Tears and Blood"는 이때의 비극을 그린 것이다.

  펠라는 사건 직후 잠시 가나로 망명했지만 다시 돌아와서 펠라는 MOP(Movement of People)라는 비공식 정당을 만들었다. 나아가 1980년부터 민간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음악 활동에도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 시기에  밴드는 이집트 80으로 개명하였는데 이때 발표된 [Black President](1981)와 [Original Sufferhead](1984)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시장에도 소개되었고 나아가 펠라의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들에서 펠라의 음악은 '아프리카 음악도, 아메리카 음악도 아닌'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Colonial Mentality"나 "ITT"처럼 메시지도 보다 강렬해졌다. 1983년 재차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1년 뒤인 1984년에는 라고스 공항에서 '외화 도피'라는 미심쩍은 명목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국제사면위원회의 노력으로 18개월만에 가까스로 석방되었다.   

"Music Is The Weapon Of The Future"

  석방 뒤의 펠라는 음악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이 시기의 음악은 그의 전성기인 1970년부터 1984년까지의 시기의 음악에 비하면 '절제'가 없고 그래서 듣는 사람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Odoo(Overtake Don Overtake Overtake)](1990)나 [Underground System](1992)에 실린 트랙들은 연주 시간이 더 늘어나 20분, 30분을 넘어서는 경우가 일반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라의 입장은 강경했다. 저명한 아방가르드 뮤지션이자 프로듀서인 빌 래스월(Bill Laswell)이 [Army Arrangement]를 리믹스한 것에 대해서조차 '식민주의적 취향(colonial taste)'이라고 분노할 정도였으니까.  

  그동안 나이지리아의 운명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1993년 최초의 다당제 선거가 치러졌지만 최종 결과 발표를 질질 끌다가 다시금 쿠데타와 저항이 일어났고 권력은 아바차(Abacha)에게로 최종 인계되었다. 당선이 유력시되던 모스후드 아비올라(Moshood Abiola)가 선거 1주년을 기념하여 자신이 대통령이라고 선포하자 반역죄로 구속되었다. 아바차는 나지리아의 역대 군부 통수권자 가운데서도 가장 악랄한 존재였고, 노조, 언론, 정당 등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1994년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월르 소잉카(Wole Soyinka)가 탄압을 피해 망명했고, 이듬해에는 인기 작가인 캔 사로-위와(Ken Saro_Wiwa) 등 9명의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한 뒤 처형되었다. 같은 해인 1995년 겨울에는 군부 내에서 역적모의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비밀리에 전해졌는데 여기에는 현 대통령이자 퇴역 장성인 올레세군 오바산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펠라 쿠티의 가문도 군부의 탄압으로부터 예외가 아니었다. 펠라 뿐만 아니라 그의 형인 랜섬 쿠티(Ransom Kuti)는 한때 보건부 장관을 지내기도 한 유명한 반체제 인사다. 이로 인해 쿠티 가문은 1993년 선거 때부터 다시금 감시와 시찰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펠라는 정치적 탄압과 더불어 AIDS로 인한 병마와도 싸워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펠라는 "결코, 결코 멈추지 말고 싸워라(never, never stop fighting)"라는 감옥에서의 선언, 그리고 "음악은 미래의 무기(Music is the Weapon Of The Future)"라는 평소의 신조를 실천해 나갔다. 펠라는 1997년 군부에 의해 마리화나 소지 및 복용으로 연행되어 다시금 일주일 정도 구속된 뒤 석방되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정리해 보자. 펠라 안티쿨라포 쿠티의 음악과 행동은 영웅적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모순적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나이지리아의 대중음악 가운데 가장 '미국적'인 것이었으면서도 '식민주의'에 가장 치열하게 싸웠다. 이는 어느 정도는 설명될 수 있다. 킹 서니 아데나 에벤에제르 오베이 등의 주주가  보다 '나이지리아적'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사운드는 대체로 현대적이고 매끄러운 것이었고, 이는 특히 1980년대 발표하여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은 작품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음악 스타일은 달라도 사운드의 음색이나 텍스처 면에서 이들의 음악은 당대의 주류 팝 음악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반면 펠라의 사운드는 날 것 그대로이고 무자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 1970-80년대의 '나이지리아의 상황'을 보다 잘 표현했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망설이게 된다. 질문 자체가 바보같은 것이거나.  

  또한 다른 주주 음악인들이 음악적 씬을 형성하면서 서로 경쟁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았다면, 펠라는 독보적이었고 독불장군이었다. 아프로비트라는 장르에 속하는 유일한 음악인은 오직 펠라 한 명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선구자이자 완성자이고 자식들을 제외하고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프로재즈라고 폭을 넓혀도 카메룬의 색소폰주자 마누 디방고(Manu Dibango)가 펠라에 필적할 정도일 뿐이다.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비트'라는 인상을 주는 이름을 스스로 짓고 혼자 모든 업적을 만들고 누린 인물이 바로 펠라였고, 그 점에서 레게를 '이끌었던' 밥 말리와도 대비된다.

  펠라 쿠티의 행동은 더욱 모순적이다. 그는 공적 생활에서는 존중받는 급진적 음악인이자 정치인이었지만, 사생활에서는 가부장주의적이고, 성차별주의적인 카리스마적 가장이었다. 28명의 부인과 합동결혼식을 올리고 나중에는 그들 모두와 이혼하는 기행이 대표적이다. 펠라의 모친이 나이지리아의 페미니스트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아이러니다. 가부장주의는 펠라가 투옥되었을 때 밴드가 '장자 상속'된 사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장자인 페미 쿠티는 아버지가 투옥되면 빈자리를 메웠고 석방되면 밴드에 함께 있었다. 아들이 뒤에 밝힌 바로는 "모든 아프리카의 아버지들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훌륭해야 한다고 기도한다. 아버지는 언제나 기준을 세우고, 아들은 더 높이 떠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펠라가 '높이 뜨라고 기도한' 페미 쿠티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3.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시 아프리카로(deafricanization and reafricanization)

   다시 페미 쿠티로...

다시 페미 쿠티로 돌아오자. 통속적인 질문도 다시 던져 보자. 페미 쿠티는 아프로비트의 새로운 형식의 창조자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시장을 노리는 존재인가.
앞서 말했듯 페미는 19살 되던 무렵 펠라가 영어의 몸이 되자 밴드를 물려받았고 펠라가 석방된 뒤에도 앨토 색서폰 주자로 활동했다. 1989년 아버지로부터 독립한 뒤 그의 밴드의 연주를 지켜본 아버지는 "넌센스"라고 일축했지만, 2년 뒤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한다. 그렇다면 페미는 줄리안 레넌보다는 지기 말리에 가깝다. 이유는 아들의 음악이 아버지의 음악보다 대중적이며, '현대적 영향'에 민감하다는 뜻이다(참고: 지기 말리의 음악은 초기에 '레게의 가장 팝적 형태'라는 평을 받았다).

  페미의 세 번째 정규 앨범인 [Shoki Shoki]은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 아메리칸 훵크를 연상시키는 스타일이다. 특히 베이스 라인과 기타 리프와 관악기가 그렇다. 그렇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훵키한 리듬은 때로 정글의 브레이크비트처럼 무자비하게 몰아치고, 하우스 음악으로부터 영향받은 듯한 피아노도 종종 나오고, 콩고의 수쿠스(soukous)로부터 영향받은 기타 주법도 종종 등장한다. [빌보드]의 표현을 따르면 "빅 밴드 작업의 아프로비트의 토대를 레어 그루브와 DJ의 브레이크비트 등 현대의 영미 클럽 음악과 솔기없이 접속한" 음악이다. 비영미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온(그러면서 '월드 뮤직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데이비드 바이언(David Byrne)도 페미 쿠티의 공연을 보고 "부분적으로 존 콜트레인이고, 부분적으로는 제임스 브라운이고,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아프리카적인 훌륭한 공연"이라는 평을 했다. 페미 쿠티의 음악은 선진적 댄스 음악을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다시 아프리카화(reafricanization)'하고 있다.

  페미 쿠티의 음악이 '나이지리아 음악'에 그치지 않고 미국과 유럽의 댄스 클럽에도 파장을 미치고 있는 사실은 이런 특징과 무관치 않다. 1999년 페미는 그의 밴드 포지티브 포스를 이끌고 미국과 유럽의 클럽가에서 선풍을 몰고 온 바 있고 3월에는 뉴욕에서 대대적인 공연을 가졌다. 이런 활동은 미국판 앨범에 세 개의 리믹스 트랙이 보너스로 수록되어 있는 점에도 반영된다. "Beng Beng Beng"은 샤토 플라이트(Chateau Flight)의 손에, "Truth Don Die"는 케리 챈들러(Kerri Chandler)의 손에, "Blackman Know Yourself"는 루츠(The Roots)의 손에 각각 맡겨졌다. 편의상 용어를 사용하면 순서대로 뉴욕 하우스, 런던 디스코, 필라델피아 힙합 풍의 리믹스다. "Beng, Beng, Beng"은 매스터스 앳 워크(Masters At Work)같은 프로덕션 팀의 사운드를, "Truth Don Die"는 블랙 사이언스 오케스트라(Black Science Orchestra)같은 프로덕션 팀의 사운드를 각각 연상시킨다.

  평자에 따라서는 멜로딕한 창법이나 4-5분대의 짧은 곡 구조 때문에 페미의 음악을 펠라의 하수로 보는 경우도 있다. 홍보 문구에 "펠라 쿠티의 아들"이라고 쓰여있는 점도 너무 많으면 눈에 거슬릴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덕보는 게 단지 장삿속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이는 음악 뿐만 아니라 음악 밖의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이번 앨범의 수록곡인 "Truth Don Die"나 "Blackman Know Yourself"에서의 정치적 메시지는 아버지만큼이나 강렬하다. 또한 [뉴스위크]와 가진 인터뷰에서 신임 민선 대통령 오바산조와 현재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다소 만족하고 있다는 것과 과거 정부의 도둑질과 부패를 참고 견디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과거 정부에는 오바산조의 정부[1976-1979년]도 포함된다", "올해 말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면, 시간 낭비 없이 정부를 반대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밝히고 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페미는 작년에 비공식 정당 MASS(Movement against Second Slavery)도 결성하여 본격적인 정치적 행동을 개시한 바 있다. 이 운동은 정치권력 장악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변혁을 의도한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의 교육은 미국인이 되는 법만을 가르치고, 우리의 TV는 유럽인이 되는 법만을 보여준다. 모든 것은 서양에 관한 것이다. 아프리카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진단했다. 그의 표현을 빌면 "미국과 유럽에 세뇌당해 있는" 아프리카의 청년들이 이런 '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지는 미지수다. 그렇지만 '제 2차 노예화'가 진행된다면, 아프로비트의 무자비한 리듬도 계속 진행될 것이다.


* 페미 쿠티의 아프리카중심주의(Afrocentrism)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라고 말한다....우리는 그것을 수용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서양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이다. 아프리카인들은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는 아프리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매년 선거하러 가지만 선거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민들은 무언가의 일부라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믿지 않고 시스템을 믿지 않고 나라를 믿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필요로 하며, 단순히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하는 것이라고 해서 아무 거나 수용하지는 않는다".

월드 뮤직/월드 비트

  그런데 페미가 말한 "아프리카의 특정 지역의 리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리듬에 대한 아프리카적 접근이 중요하다"는 말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월드 비트'라는 용어를 접하게 된다. '월드 뮤직'이라는 용어가 '영미권의 대중음악이 아닌 모든 음악'을 지칭한다면, '월드 비트'는 그 중에서도 아프리카로부터 파생된 음악들을 지칭한다. 정확히 말하면 서양에 기원을 두지 않은 모든 리듬을 말하지만 대부분은 아프리카적 기원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이 글에서 소개한 가나의 하이라이프와 나이지리아의 주주 외에도 말리의 그리어트(griot), 세네갈의 므발라(mbalax), 콩고/자이레의 수쿠스(soukous), 짐바브웨의 치무렝가(chimurenga),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므바쾅가(mbaquanga) 등이 여기 포함된다. 나아가 아프리카 음악 외에도 소(小) 앤틸리스(Antilles)의 주크(zouk), 트리니다드의 소카(soca), 아이티의 콤파스(compas), 온두라스/벨리즈의 푼타(punta) 등 아메리카 대륙의 음악도 포함된다. 쿠바의 맘보/룸바/차차차, 자메이카의 레게/스카/록스테디, 브라질의 삼바/람바다 등은 이들과 함께 분류되기에는 너무 국제화되고 현대화되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월드 비트에 포함될 수 있다. 말하자면 월드 비트는 아프리카인들이 세계 각지에 산포되어 만들어진 음악인 셈이고, 페미가 말한 '리듬에 대한 아프리카적 접근'을 가진 경우다. 따라서 월드 비트라는 개념은 아프리카인들의 "상상된 다이애스포라 커뮤니티(imagined diasporic community)"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만 월드 뮤직/월드 비트라는 용어가 어떻게 마케팅되는가를 살펴 보면 수상쩍은 면이 많다.  무엇보다도 월드 뮤직/월드 비트의 청중들은 '이국적 감정'을 추구하는 부유한 백인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월드 뮤직들이 전달하는 감정은 '편안하고 친숙한' 이국적 감정일  뿐이다. 제 3세계의 정취는 사막이나 정글 속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고급 호텔이나 차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음악'이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월드 뮤직/월드 비트의 프로듀싱은 서양 팝 음악의 '사탕발림의 영향(sugaring influence)' 하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저명한 월드 뮤직의 프로듀서나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팝 음악계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월드 뮤직/월드 비트에 대해 "비서양 음악에 대한 모욕적 용어", "음악적 사파리", "세계의 나머지(The Rest)의 음악의 게토화" 등 강하게 비판하는 경우도 많다. 앞서 데이비드 바이언이 월드 뮤직을 '싫어한다'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비판의 대상은 폴 사이먼(Paul Simon)이나 피터 게이브리얼(Peter Gabriel)같이 아프리카 음악을 '소개'한 베테랑 팝 스타들 뿐만 아니라 유스 엥두르(Youssou N'dour: 세네갈), 안젤리크 키조(Angelique Kidjo: 브냉), 이스마엘 로(Ismael Lo: 세네갈) 같이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른바 '월드 로커(world rocker)'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들 못지 않게 유명한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뮤지션들인 카세 마디(Kasse Mady), 살리프 케이타(Salif Keita: 말리), 라이 레마(Ray Lema: 자이레), 파파 웸바(Papa Wemba: 자이레)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 아프리카 출신 팝 스타들의 음반은 매끄럽고 번드르르한 1980년대 주류 팝 음악의 프로듀싱을 택하고 있다.
  여기서 아프리카산(産) 월드 뮤직의 비즈니스의 시스템을 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프리카산(産) 월드 뮤직의 센터가 뉴욕이나 런던이 아니라 파리다. 영미권에서 대중화되는 월드 뮤직은 직수입되는 것보다 파리의 '테스트 시장'을 거쳐 간접 수입되는 경우가 많다. 유수 엥두르처럼 영어권 아프리카 뮤지션의 경우도 앨범의 몇 곡은 프랑스어 버전으로 부를 정도다. 여기서 프로듀서 이브라이마 실라(Ibrahima Sylla)의 역할이 특히 중요한데, 그는 아프리카 가수들의 음반들을 제작해 왔고, 그런 의미에서 '전지구적 음악 상인(global music merchant)'으로 불린다. 방금 살펴본 아프리카 팝 스타들 중에는 아예 파리로 활동무대를 옮겨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마치 '제 3세계는 원료를 생산하고, 선진국은 이를 가공하는 산업에 특화했던' 20세기의 국제 분업 패턴을 연상시킨다.  

  문화연구에서는 이를 탈영토화(deterritoroalization)과 재영토화(reterritorializa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네스토르 가르시아 칸클리니(Nestor Garcia Canclini)에 의하면 탈영토화란 "문화와 지리적 영토 사이의 자연적 관계를 상실하는 과정"이다. 앞서 본 파파 웸바는 자신의 팝 지향적 음악에 대해 변호하면서 자신을 '탈자연화된(denaturalized)' 음악인이라고 소개한 바 있는데 이 말도 탈영토화와 비슷한 뜻이다. 반면 재영토화된 "오래되고 새로운 상징적 생산들을 재(再)국지화(relocalization)하는 과정"이다. '재국지화'라는 번역어가 난해하다면 (아프리카의 경우) '다시 아프리카적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예를 들어 설명해야 할 듯하다. 주주를 예로 들면 '본래의' 주주는 나이지리아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요루바족의 전통적 커뮤니티의 사운드였고, '모던 주주의 아버지'인 I.K.다이로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자연적' 음악으로 들린다. 그렇지만 킹 서니 아데나 에벤에제르 오베이 등을 통해 세계 시장으로 수출되면서 사운드는 영미의 록 음악의 보편적 사운드에 근접했다(탈영토화). 이와 동시에 이들의 주주는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에 대한 새로운 상징과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고 '월드 뮤직'이 된다(재영토화). '아, 나이지리아도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 어느 정도 현대화되었구나'라는 생각을 심어주면 이 과정은 완료된다. 달리 말하면 탈영토화/재영토화 과정을 완수하지 못한 월드 뮤직은 성공하기 힘들다. 또한 탈영토화 쪽으로 기울면 팝 음악의 한 변종이 되어 '이국적' 감정을 공급하지 못하며, 탈영토화에 실패하여 쉽게 재영토화되면 너무 '토속적'으로 들려서 월드 뮤직 팬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 [파워 오브 원 Power of One]이나 [라이언 킹 Lion King]의 사운드트랙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후자의 경우는 '실패한' 월드 뮤직의 사례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아프로비트는? 몇 차례 언급했지만 아프로비트는 처음부터 '탈영토화된' 음악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펠라의 의식적 노력에 의해 1970년대 이후 '재영토화(혹은 재아프리카화)'되었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음악에 강하게 영향받은 음악을 선보인 펠라가 '식민주의적 취향'에 그토록 반대했던 것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페미의 음악 역시 펠라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펠라가 수용했던 재즈와 훵크가 이제는 좀 낡아 보이는 시점에서 페미가 하우스와 드럼&베이스와 힙합을 '재영토화'하는 양상은 흥미롭다. 또한 영미권으로부터의 영향에 민감하면서도 '인터내셔널 스타'가 되어 외국으로 진출하는 것과는 거리를 두고 나이지리아의 음악적 커뮤니티에 충실한 자세도 향후 그의 앞길을 주목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월드 뮤직/월드 비트가 '순수한 토착의 음악'이라는 환상은 버릴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월드 뮤직은 영미 팝 음악의 영향 하에 토착의 전통과 수입된 영향 그리고 다양한 국제적 영향 등이 혼성교배되어 탄생한 음악이다.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 부단한 과정의 잠정적 결과물일 뿐이고, 따라서 순종이 아니라 잡종(hybrid)이다. 가르시아의 개념을 다시 빌어오면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부단한 과정 속에서 무수한 잡종들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다양한 잡종들을 잘 '가려내는' 것이다.

  우리가 '아프리카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들에도 아프리카적 요소, 유럽적 요소, 라틴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을뿐더러, 아프리카 음악들 사이의 상호작용도 존재하고, 아프리카 '본토'와 아프리칸 다이애스포라 사이의 교류도 발생한다. 한 예로 '가장 범(凡)아프리카적인 음악'이라는 평을 듣는 콩고/자이레의 수쿠스(Soukous)마저도 "쿠바의 룸바를 복제하려다가 '실패'하여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한 것"(데이비드 바이언)이라는 게 '정설'이다. 나이지리아의 주주 역시도 삼바의 영향이 강한데, 이는 브라질에서 노예로 살던 흑인들이 노예 해방 이후 나이지리아로 귀환해 온 역사적 사실에 적잖이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글로벌화된 시대는 문화적 상호작용을 더욱 쉽게 만든다.

  마무리하려고 보니 나이지리아 등 서아프리카 못지 않게 중요한 남아프리카의 음악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었다. 어쨌든 이 경우도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Ladysmith Black Mambazo)의 아 카펠라 합창음악 - 폴 사이먼의 [Graceland](1986)에 등장하는 이른바 므부베(mbube) 음악 - 보다는 짐바브웨의 분두 보이스(The Bhundu Boys)의 댄스지향적 기타 밴드 음악 - 이른바 지트(jit) 음악 - 이 더 흥미롭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자. 그런 기회가 오려나? 아무튼 많은 이들에게 뜬금없었을 아프리카 음악 기행이여, 다시 올 때까지 안녕!

관련 사이트

페미 쿠티 [뉴스위크] 인터뷰
http://www.newsweek.com/nw-srv/printed/int/dept/vu/ov5002_1.htm

http://www.newsweek.com/nw-srv/printed/int/dept/vu/ov5002_2.htm

데이비드 바이언의 월드 뮤직 비판
http://www.nytimes.com/yr/mo/day/artleisure/music-world.html

아프리카 음악 백과사전: 아티스트 바이오그래피, 디스코그래피, 음악용어 해설 및 기타
http://www.africanmusic.org/glossary.html


* 웹진 [weiv](http://www.weiv.co.kr)에 연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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