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 포르투갈어로 노래부르는 디바들(마지막)

I. 까부 베르드의 모르나

쎄자리아 에보라의 '국적'을 찾아서

최근 국내의 중소 음반사인 2clipse에서 '월드 사운드'라는 별도의 레이블을 설립하고 세 종의 음반을 발매했다. 쎄자리아 에보라(Cesaria Evora)의 [Live a l'Olymopia], 에르미나(Hermina)의 [Coracon Leve], 그리고 베빈다(Bevinda)의 [Terra e Ar]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들 포르투갈어(혹은 그 '사투리')로 노래부르는 디바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국적이나 활동무대가 포르투갈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이들의 음악은 어떤 것인지 더듬어 보기 위해 이들 중 가장 이름이 알려진 쎄자리아 에보라부터 시작해 보자.

쎄자리아 에보라라는 이름을 처음 인지한 것은 에미르 쿠스트리챠의 영화 [Underground]의 사운드트랙에서였다. 당연히 그녀가 유고슬라비아거나 아니면 동유럽의 어느 나라 출신인 줄로 알고 있었다. 사운드트랙을 담당한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c)가 1970년대 '유고슬라비아의 비틀스'라고 불리던 Bijelo Dugme(흰색 버튼)를 이끌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 나의 심증을 더욱 굳혔을 것이다(참고로 Bijelo Dugme의 음반은 홍대 앞의 한 중고 음반점에서 '골동품 가격'으로 매매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트 록'의 범주에 분류된다는 뜻일텐데, 실제로 이들의 음악은 아트 록과는 거리가 있다).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Ausencia"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도 영화의 분위기가 너무 강했던 탓인지 동유럽의 민속 음악 같았다. 현악기 중심의 반주와 풍성하고 영적인 목소리도 그랬다. 가사가 무슨 언어인지를 구별해낼 능력은 없었으므로.

두 번째로 그녀의 이름을 발견한 곳도 영화 사운드트랙이었다.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on)이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을 현대물로 각색한 [The Great Expectations]의 사운드트랙에 "Besame Mucho"를 부른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 베사메 무초? 모자를 쓰고 기타를 든 멕시코인이 선인장들이 서있는 사막 사이에서 부르는 노래 아닌가? 그렇다면 '라틴' 음악인인가? 하지만 이 노래야 멕시코 음악이라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곡이니 꼭 그쪽 출신이 노래를 부르라는 법은 없다. 하다 못해 노태우가 (당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1987년 여름 축하연장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영화의 내용도 그녀의 국적과는 무관한 내용이었다.

세 번째로 에보라의 이름을 발견한 것은 [Red Hot + Rio]라는 음반에서였다. 1996년에 라이센스로 발매된 음반이지만 불행히도 나의 눈에 띄지는 못했다. Red Hot 시리즈가 AIDS 퇴치 기금마련을 위한 자선음반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 것이고, Rio라는 이름은 '브라질'을 떠올리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에보라의 이름은 "E Preciso Perdoar"라는 곡의 크레딧에 나와 있었다. 그렇다면 브라질 출신? 하지만 이 음반에 참여한 뮤지션들은 그야말로 세계 각국에서 온 인물들이라서 음악 장르는 쌈바, 보싸노바, 뜨로삐깔리즈무 등 브라질의 음악일지언정 연주자의 국적을 확인하기는 곤란했다. 이 곡마저도 '브라질의 밥 딜런'이자 뜨로삐깔리즈무 운동의 대부인 까에따누 벨로주(Caetano Veloso)와 함께 '영어'로 노래했고, 편곡은 일본 출신의 국제적 음악인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가 담당했으니까.

 

'녹색의 곶(Cabo Verde)'을 향하여

그녀의 음반 중 한 종이 수입될 무렵 궁금증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고 까부 베르드(Cabo Verde)와 모르나(Morna)라는 키워드를 건졌다. 전자는 지명이고, 후자는 음악 장르명이다. 고등학교 때 보던 먼지 풀풀 나는 지리부도를 뒤져서 찾아본 까부 베르드(영어로는 Cape Verde)는 서아프리카 대륙에서 500km 떨어져 대서양 한 가운데 있는 아홉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제도(諸島)였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니'라는 느낌을 줄 만한 곳이다. 대륙을 다섯 개로 구분한다면 '아프리카'에 속하는 곳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아프리카 대륙과는 차이가 많다. 여기에는 아프리카에 속한 지역으로서는 아메리카 대륙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지리적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프리카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이 섬의 최초의 주인은 흑인이 아니라 포르투갈인들이었다. 한때 영국인들이 섬을 노리기도 했지만 1975년까지 포르투갈인의 지배 하에 있었다. 1456년 포르투갈인들이 이 섬을 처음 발견했을 때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windy, hilly and dry"라는 소개 문구를 보면 바람이 많이 불고, 구릉이 많고, 건조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녹색의 곶'이라는 뜻의 이름(Cape Verde)을 붙인 것은 이 섬에 인간이 처음 상륙했을 때의 아름다움을 말해줌과 동시에 머지않아 이곳이 목초지로 개간될 것임을 말해준다. 이곳에 이주한 포르투갈인들은 여느 백인 식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서아프리카로부터 흑인 노예를 수입해 왔고, 나아가 (서)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특히 브라질) 사이에 노예를 실어 나르는 배들의 정박지로 '번영'을 구가했다. 그렇지만 1747년 커다란 가뭄이 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이후 계속된 가뭄으로 인해 18-19세기 동안에만 수만 명이 아사했다. 그 이유는 삼림의 개발과 가축의 방목으로 인해 섬에 습기를 공급해주던 초목들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9세기 중반 이후 노예무역이 쇠퇴하면서 까부 베르드는 황량한 섬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까부 베르드의 역사는 이민과 독립이라는 상반된 사건으로 점철되었다. 황폐화된 섬을 두고 주민들은 아메리카와 유럽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이는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현상이다. '외국에 친척을 두지 않은 까부 베르드의 가정은 없다'는 말처럼 '이산의 이산(diaspora of diaspora)'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고, 그 결과 현재의 인구는 40만명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독립국이 되는 길도 험난했다. 오래전에 국력이 쇠퇴한 포르투갈의 독재자 쌀라자르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도자들처럼 아프리카의 식민지의 독립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까부 베르드는 같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포르투갈령 기니아(정식 명칭 Guinnea-Bissau)와 더불어 1975년까지 기나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지속해야 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영국(및 프랑스)이 지배했던 식민지와 포르투갈(및 스페인)이 지배했던 식민지가 다른 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서로 다른 인종 사이의 결혼을 허용한 것, 이른바 잡혼(雜婚)이다. 앵글로-색슨 백인들이 보통 부인을 동반하여 식민지로 이주했던 반면, 이베리아 반도의 백인들은 남자 혼자 단신으로 식민지로 이주한 경우가 지배적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백인 남자들은 흑인과 인디오 등 '유색' 인종의 여자를 새로운 짝으로 맞이했고 이는 까부 베르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까부 베르드 주민 대부분은 흑인보다는 연한 피부색을 가진 크레올(creole)이다. 사용하는 언어도 포르투갈어와 더불어 '아프리카화된 포르투갈어'인 끄리울루(Crioulo)가 있다. 그래서 까부 베르드의 문화는 아프리카보다는 브라질과 가깝다. 이는 음악 문화에서도 드러난다.

 

모르나(Morna): 까부 베르드의 블루스?

재즈 애호가라면 "Song for My Father"로 유명한 재즈 피아니스트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를 알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조가 까부 베르드 출신이라는 사실은 잘 모를 것이다. 또한 호레이스 실버의 음악이 까부 베르드의 음악과 큰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까부 베르드의 문화는 아프리카보다는 포르투갈의 영향이 더 강하고 음악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역별로 다소의 차이는 있는데 수도 쁘라이아(Praia)가 위치한 가장 큰 섬 싸웅 띠아구(Sao Tiago)에는 아프리카의 영향이 다른 지역보다 강하다. 어쨌든 까부 베르드의 여러 섬에는 아프리카 리듬의 영향이 강한 댄스 음악들이 많고, 그 중에서 푸나나(funana)와 꼴라데이라(coladeira)가 가장 유명하다. 그렇지만 이들은 '노래 형식'이라기보다는 '댄스 리듬'이므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현재 까부 베르드를 대표하는 음악 형식은 모르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모르나는 포르투갈(및 브라질)의 멜로디와 화성이 아프리카의 퍼커션, 리듬과 결합된 스타일이다. 모르나의 기원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까부 베르드에 들락거리던 영국 선원들의 뱃노래(이른바 'sea-chantey')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설이 있고, 1800년대 브라질에서 형성된 모디냐(modinha)가 선원들에 의해 수입되어 변형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어떻다고 하더라도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남)유럽, (서)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사이의 음악 문화가 빚어진 것은 분명하다. 어떤 경우라도 파두, 모르나, 모디냐 모두 문화적 상호교류의 산물이라는 점만을 확인해 두자. 모르나는 '노래'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고, 노랫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라는 점에서 '까부 베르드의 블루스'라고 할 만하다.

모르나의 기본 악기편성은 기타, 피들(바이올린), 콘트라베이스이고, 피아노와 아코디언도 많이 사용된다. 기타는 최소한 한 대 이상이 사용되며, 기따라(guitarra)라고 부르는 12현(때로는 10현)의 악기나 비올라(viola)라고 부르는 - 혼동스럽지만 스패니시 기타와 거의 같다 - 악기도 자주 사용한다. 기타 형식의 악기로는 까바끼뉴(cabaquinho)도 있다. 작은 크기에 4현으로 이루어진 까바끼뉴는 북아메리카에서 자주 사용하는 우쿨렐레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트럼펫, 색소폰, 클라리넷과 같은 관악기들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여기에는 1960-70년대 쿠바와 미국의 대중음악이 직·간접적 영향을 미친 사실이 작용한다.

대서양의 망망대해 위에 있는 외딴 섬의 광경은 여느 휴양지와 다름 없다. 번듯한 산업은 없고 활양한 빈민촌과 번듯한 호텔이 공존하고 주민들 대부분은 관광과 연관된 일로 생계를 잇는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태어났을까'하는 느낌의 고립감, 수없이 사람들이 찾아오고 떠나면서 만들어지는 그리움이 섬 주민들의 보편적 정서일 것이다. 모르나의 가사의 테마는 사랑과 이별 등 '통속적'인 것들이다. 그렇지만 통속적 감정에서 나오는 슬픔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빌리 할러데이(Billie Halliday),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alia Rodrigues)....그리고 '라이벌 없는 모르나'의 디바인 쎄자리아 에보라도 여기에 속한다.

 

쎄자리아 에보라: 맨발의 디바 혹은 까부 베르드의 빌리 할러데이

쎄자리아 에보라를 포함한 모르나 아티스트들 중에는 싸웅 비쎈뜨(Sao Vicente) 섬, 특히 그곳의 도시인 민델루(Mindelo) 출신이 많다. 항구 도시인 민델루는 바와 카페, 그리고 음악이 많은 곳이었고, 에보라는 1941년 여기서 태어나 일곱 명의 남매와 함께 자랐다. 그의 아버지 프란시스꾸 샤비에르 다 끄루스(Francisco Xavier Da Cruz)는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그곳의 유명한 작곡가인 레자(B. Leza)와 사촌관계였다. 10살 때 레자가, 2년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형제들은 하나 둘 이민을 떠나기 시작했고, 에보라는 12살의 나이에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 그녀는 결국 형제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까부 베르드를 떠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에보라는 레자가 작곡한 곡에 민델루의 전설적인 음유 시인 에우제니우 따바레스(Eugenio Tavares)의 시를 가사로 만들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7살 때부터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그녀는 1960년대 후반에는 까부 베르드 전체에 이름이 알려졌다. 이 무렵 라디오 방송을 녹음한 테이프 두 종이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에서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1970년대 중반 그녀는 더 이상의 활동을 포기했는데, 무엇보다도 '노래 한 곡 당 25 에스꾸두(약 800원)를 받는' 민델루의 상황에서는 노래부르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개인적 불행도 겹쳤는데 12살 때의 첫 번째 결혼을 포함하여 모두 세 번의 결혼을 했지만 "일생을 사는 동안 한 지붕 안에 남자를 들이지 않겠다"는 쓰라린 결론만을 낳았다. 시련과 고통의 나날은 폭음과 폭연의 나날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나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여러 여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들에게 명령하는 것은 남편들이지요. 그게 내가 지금 '악'의 근원을 잘라 버리려는 이유입니다".

'악의 근원'을 잘라버린 에보라가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은 1985년 45세의 나이에 포르투갈로 건너가면서부터다. 그렇지만 이 녹음은 까부 베르드 출신 여가수들의 앤솔로지 형식의 앨범을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대중적인 레코딩은 아니었다. 그녀를 현재의 지위로 등극시킨 것은 동향 출신으로 파리로 이민하여 살고 있던 쥬제 다 씰바(Jose Da Silva)였다. 다 씰바와 더불어 에보라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네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그 과정을 잠시 요약해 보자.

1988년 첫 앨범 [La Diva aux Pieds Nus(맨발의 디바)]가 Lusafrica 레이블에서 발매됨. 1988년 10월 1일 파리의 뉴 모닝에서 첫 콘서트를 연다.

1990년 두 번째 앨범 [Distino di Belita]을 발매.

1991년 세 번째 앨범이자 어쿠스틱한 분위기의 [Mar Azul(푸른 바다)] 발매. 앙굴르므(Angouleme) 페스티발에서 연주하고, 지에 그녀에 관한 최초의 기사가 실린다.

1992년 [Miss Perfumada(향기로운 처녀)] 발매. 프랑스에서만 20만장이 판매되면서 저널에서는 에보라를 빌리 할러데이와 비교하기 시작한다.

1993년 5월 리스본의 싸웅 루이스 극장(Teatro Sao Luis)에서 공연을 가지고, 한달 뒤 파리의 올랭피아 극장에서 역사적인 공연을 가짐. 공연 도중 두 명의 프랑스 관객이 무대 위로 뛰어드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공연은 열광적인 환호를 받음.

1994년 브라질의 싸웅 빠울루에서 콘서트를 가짐. 까에따누 벨로주(Caetano Veloso)가 우정 출연.

1994년 다국적 레이블 BMG에서 명곡들을 모은 편집 앨범을 배급(제작은 루즈아프리카 레이블).

1995년 앨범 [Cesaria]가 그래미상 월드 뮤직 부문을 수상.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브라질, 캐나다, 미국 등에서 공연을 가짐.

1996년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홀에서 공연을 가짐.

1997년 [Cabo Verde] 발매하고 본격적인 전미 순회공연을 가짐.

1999년 [Cafe Atlantico]를 발매. 모르나와 더불어 쿠바 음악의 영향이 강한 스타일의 곡을 선보임.

2000년 쿠바 혁명광장의 국립극장에서 공연하고, 쿠바 출신 재즈 피아니스트 추코 발데스(Chucho Valdes)와 함께 레코딩 작업.

 

쎄자리아 에보라, 맨발을 드러내지 않은 디바

첫 앨범의 제목처럼 에보라는 '맨발의 디바'라고 불린다. 그녀가 민델루의 거리를 맨발로 산책하기를 즐겼고 공연장에서도 종종 맨발로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보인 데서 연유한 별명이다. '월드 뮤직'이라는 범주를 마케팅하기 위해서는 '자연주의적'이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이미지가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에보라의 경우 이런 마케팅이 가식적이거나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맨발은 남자한테 버림받은 여자가 시련을 거친 끝에 비로소 터득한 자립의 의지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까부 베르드 여자들의 유달리 고단한 삶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건 마치 그녀의 목소리와 동일하다. 줄담배와 와인으로 쩔은 목소리는 아름다운 음색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폭발적 창법으로 분출하지도 않는다. 그저 세계에서 가장 예외적인 곳에서 자란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보편적인 공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음악이 주는 공감은 가장 예외적 경험을 한 사람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가장 길고 넓었다는 역설도 얼마든지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20001013

 

II. 포르투갈의 파두

파두의 고향, 알파마

이 시리즈에서 소개하는 음악들이 '포르투갈'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새삼 지적하는 것은 지면 낭비다. 단지 이 점이 비단 가사의 언어가 포르투갈어라는 사실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지난 번에 모르나의 악기들로 열거했던 카바퀴노, 비올라 등의 악기는 포르투갈의 악기기도 하다. 포르투갈? 유럽의 서쪽 끝에 위치한 길쭉한 나라다. 유럽인들은 포르투갈을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유럽의 최빈국으로 전락했지만, 한때는 스페인과 더불어 세계를 주름잡았던 나라고 따라서 포르투갈의 문화는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다. 그러면 정작 포르투갈 본토의 음악은 어떤 게 있을까.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의 음악에 대해 물어보면 '파두'라는 단어가 나올 것이다. 파두의 역사에 대해서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몇 가지만 지적해 두자. 첫째로 파두 는 '순수한' 포르투갈 문화의 산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파두의 고향인 리스본의 알파마(Alfama) 지역은 지지리 못사는 곳이다. 이곳에는 19세기 초 이래 브라질, 아프리카 등지에서 역이민해온 흑인과 혼혈인(krioulo)의 거주 지역이었다. 룬두(lundu) 혹은 룬둘룸(lundulum), 포파(Fofa) 등의 용어와 더불어 파두라는 말도 '기타 연주를 수반한 아프리카적 요소가 강한 댄스 음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물론 뒤에는 사정이 바뀌었다. 아프리카로부터 영향받은 리듬 위에 포르투갈의 시적 전통이 내용을, 브라질에서 역수입된 발라드 형식인 모딩야(modhina)가 형식을 공급하여 1920-30년 경에 오늘날의 파두의 원형이 정착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이보다 훨씬 전인 19세기부터 파두의 존재가 확인된다. 특히 유명한 일화가 있다. 1836년 경 한 귀족(물론 남자)이 바를 찾아가 마리아 세베라(Maria Severa)라는 파디스타(fadista)가 노래하는 것을 들은 뒤 그녀와 "격렬한 치정 사건"에 빠졌다는 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다. 불행히도 사건의 기록만 남아 있고 음악의 기록은 없다. 검은 숄을 어깨에 걸치고, 술 취한 듯한 무대 매너로 노래부른 세베라는 많은 남자들을 사로잡았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져 온다. 오늘날까지도 여성 파디스타들이 검은 모자와 의상으로 무대에 오르고, 때로는 와인이나 꼬냑을 담은 유리잔을 손에 들고 노래부르는 것의 유래를 추측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 사건은 마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탱고가 일으켰던 스캔들과 유사한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역설적으로 파두가 포르투갈 전역으로 대중화되게 만들어주었다.

 

꼬임브라...그리고 사우다드(saudade)

알파마 파두와는 다른 파두의 또하나의 갈래가 있다. 꼬잉브라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꼬잉브라 파두(coimbra  Fado)'다. 꼬잉브라 파두는 "고도로 숙달되고 양식화된(highly rehearsed and stylized)" 형식이라고 표현된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 그것도 의과대학 중심으로 목적의식적으로 보존하고 재해석한 음악이므로, 형식이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사도 지성적이다.  꼬임브라 파두는 1920-30년 경 안토니오 메나노 박사(Dr. Antonio Menano)를 중심으로 '파디스타'와 '기타리스타'를 낳았고 레코딩도 남겼다. 이들 그룹은 파두의 한 갈래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농촌 지역 - 자료를 뒤져보니 베이라 바익사(Beirra Baixa)와 알란테호(Alantejo)같은 지역 - 의 전승 민요를 발굴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말하자면 꼬잉브라 파두는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파두가 현대적 대중음악으로 진행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을 취하면서 '민중 예술'의 양식으로 다듬은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어떤 갈래든 파두는 고된 삶을 노래하면서도 자신의 운명에 대처해 나가기 보다는 운명을 인정하는 음악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은 단조의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그 정서는 사우다드(saudade)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진정한 갈망'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가수나 연주자 뿐만 아니라 청중의 태도까지도 결정하는 파두 특유의 정서다. 사우다드가 "한국인의 '한(限)'의 정서와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은 듯한데, 해석이야 각자의 자유지만 결론은 다음 인용문을 읽어본 뒤에 내려도 늦지 않을 듯하다. 한 미국인이 리스본의 파두 클럽의 공연을 본 감상기 중의 일부다.

"라이브 공연에서 청중의 행동은 매우 중요하고 청중에 대한 규칙은 가수에 대한 규칙만큼 엄격하다. 전형적인 리스본의 상황에서 시원찮은 연주를 끝까지 고통스럽게 참아내는 청중은 없고, 훌륭한 연주를 중단시키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시끄러운 후원자(patron)가 쫓겨나는 것을 목격한 바 있고, 시원찮은 가수는 노래하는 중간에 그만두어야 하는 장면도 보았다 ...(중략)... 노래가 끝나면 박수갈채를 치거나, 발을 구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테이블을 두드리거나, 맥주를 쏟거나 모든 것이 허용된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포르투갈의 목소리"

지금으로부터 1년 여 전인 1999년 10월 6일 아말리아 로드리게스가 79살의 나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포르투갈의 수상 앙토니오 구테레스(Antonio Guterres)는 3일간의 국장(國葬)을 선포했다. 한 나라의 통치자가 한 가수에 대해 '포르투갈의 목소리'라고 칭한 것은 단지 고인에 대한 예의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세상 어떤 나라에서도 '여가수'가 세상을 하직했을 때 '나라의 목소리'라는 칭호를 내린 경우는 없었으니까.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입지전적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1920년 알파마의 빈민촌에서 10남매 중의 하나로 태어났고, 1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를 대신하여 할머니 밑에서 자라났고, 10대 시절에는 행상과 재봉사와 탱고 댄서를 전전하던 이야기 말이다. 19살 때 '밤무대'에 직업 가수로 데뷔하여 1년이 지나지 않아 스타가 되어 그녀가 나오는 날이면 매진을 기록한 일도 전해져 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녀가 데뷔한 클럽의 이름이 레티로 다 세베라(Retiro da Severa)였는데, 세베라라는 이름이 '언젠가 한번 들어본 것'이라면 흥미롭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는 유럽이 2차 대전의 참화에 휩싸였던 1944년에는 브라질로 가서 파두를 국제적으로 전파시켰다. 코파카바나 카지노(Copacabana Casino)를 비롯한 남아메리카 각지의 바와 클럽에서 선풍을 불러일으킨 뒤 리우 데자이네이로에서는 최초의 스튜디오 레코딩을 했다. 그녀는 정작 포르투갈에서는 1951년까지 레코딩을 하지 않앗는데, 그 이유는 매니저를 맡은 인물인 조제 드 멜로(Jose de Melo)가 '음반을 판매하면 청중들이 공연에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관점으로는 참 황당한 발상이지만 '라이브 공연'을 미덕으로 하는 '민중음악으로서의 파두' 특유의 이데올로기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쨌든 1955년 "Coimbra"는 국제적 히트곡이 되었고, 그 무렵 파리의 올렝피아 극장에서 가진 공연실황 음반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음반이다. 한국인에게 친숙할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Lagrima"와 "Barco Negro"도 이 무렵에 레코딩된 버전이다. 그녀가 성공한 비결은 도회적 분위기의 알파마 파두와 농촌 분위기의 꼬잉브라 파두를 결합하면서, 단지 실패한 사랑에 대한 비가를 넘어서 아메리칸 소울처럼 영혼으로부터의 절규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 비틀스와 로큰롤 선풍이 불어닥치면서 파두 역시 유럽의 다른 나라의 '국민적-민중적 대중음악'(예를 들어 샹송, 칸초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파두는 청년들의 새로운 범세계적 취향과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가면서 인기도 시들어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만은 비교적 건재했다. 무려 170종의 앨범을 레코딩했고, 영화에도 출연했고, 세계 각지를 돌며 순회공연을 계속 가졌다. 1990년대에 은퇴하여 조용한 삶을 살아간 파두의 여왕은 1998년 리스본 엑스포에서 잠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부터 1년 뒤 '포르투갈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파두의 현재와 미래  

포르투갈 사람이 아니라면 파두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월드 뮤직 평론가인 폴 버논(Paul Vernon)은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이 포르투갈의 여자였다면 아말리아 로드리게스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로버트 존슨이 누구인지 모르는 21세기의 음악 팬들에게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는 그저 '오래된' 음악일 뿐일지도 모른다. 물론 '로버트 존슨을 모르고 에릭 클랩튼을 좋아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하긴 블루스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정말 많을까?).

'월드 뮤직'으로 국제 시장에 등장하는 파두는 '리듬감이 없고 기타가 낑낑거리고 바이브레이션 강한 목소리로 부르는 청승맞은 노래'라는 인상을 준다. (1980년대 한국 문단의 용어를 사용하면) '핍진성'은 느낄 수 있지만, 악기편성과 편곡방법이 '고루하다'는 느낌을 준다. (앞에 본) 세자리아 에보라나 (뒤에 볼) 베빈다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그들의 음반이 파두의 고전적 편곡을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역설적 설명도 가능하다. '국지적 민중 음악(local folk music)'으로서 파두의 가치는 계속 중요하더라도 현대적 대중음악으로서 파두의 가치는 많이 절하되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현재 대중음악으로서의 파두는 팝 파두(pop fado) 혹은 투어리스트 파두(tourist fado)로 변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전자의 용어는 영미 팝의 형식이나 편곡과 결합되어 현대화된 스타일이라는 점을 지칭하고, 후자는 '관광객용' 음악으로 외국인이 들르는 고급 호텔이나 바에서 연주되고 있다는 점을 각각 지칭하고 있다. 미시아(Misia)나 둘체 폰테스(Dulce Pontes)같이 국제적 명성을 가진 파디스타들의 음악은 이렇게 상업화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파두가 하나의 '역사'가 되었고 앞으로 포르투갈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들은 이런 역사 위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점이다. 결론은? 이번 호 앨범 리뷰에 소개하는 [The Rough Guide to the Music of Portugal]의 라이너 노트를 인용하면서 마무리하자. 파두와 포르투갈 음악은 "유럽의 음악 문화의 가장 거대한 기쁨"이지만 "종종 간과된" 음악이었다.

 

III. 디바 브라질레이라

Intro

"나는 브라질에서 태어났으면 해요. 적어도 그곳에서는 예술로 먹고 살 수 있거든요. 내겐 사정이 좀 다르지요. 사람들은 내 목소리를 좋아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난 금전지향적 인간은 아니지만 돈이 도움이 될 때가 있지요"(쎄자리아 에보라)

'브라질에서 태어났으면 한다'고 말할 사람은 세계 인구 중 얼마나 될까. GDP가 세계 10위권에 속하지만 인구의 5%가 부(富)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에 태어나는 일은 확률상 '모험'이다.   하지만 쎄자리아 에보라처럼 포르투갈어 문화권에서 고통스러운 인생을 보낸 음악인이 '브라질에서 태어났으면 한다'는 소망을 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브라질이 (아마도) 미국 못지 않게 대중음악이 풍성하게 발전한 나라인 사실은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래서 당분간 쉬었던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은 브라질의 디바들이다.

'브라질 음악의 전모'에 대해 파헤치는 일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그건 브라질이라는 대륙을 탐험하는 것처럼 흥미로운 일이지만 섣불리 시도했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다. 삼바(samba), 보사 노바(bossa nova), 코루(choro), 포루(forro), 뜨로삐깔리즈무(tropicalismo), 람바다(lambada), 살바도르 사운드(salvador sound)을 들어보았다고 해도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아마존의 울창한 삼림을 여행하듯 '천천히' 알아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잘못 발을 들여놨다가는 늪에 빠져버릴지도 모르니까. 단지 삼바와 보사 노바가 브라질 음악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만 확인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MPB(Musica Populaire Brasileira)라는 단어가 '브라질 대중음악'이라는 보통명사일 뿐만 아니라 브라질 고유의 음악 어법을 가진 '브라질다운' 대중음악을 지칭한다는 사실 정도를 확인하면 더욱 좋겠다. '브라질 고유의 음악 어법'이 포르투갈계 백인, 아프리카계 흑인, 토착 인디오들 사이의 문화적 혼성교배의 산물이라는 당연한 너무나도 당연한 지적은 넘어가도록 하자.

주제를 좁혀서 '브라질의 디바'라고 해도 막연하기는 마찬가지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확립한'이라는 단서를 붙여도 1940-50년대 헐리우드 스타로 활약하면서 브라질 디바의 스테레오타입을 확립시킨 카르멘 미란다(Carmen Miranda), 주앙 질베르뚜와 함께 보사 노바를 세계에 알린  아스뜨루드 질베르뚜(Astrud Gilberto), 뜨로삐깔리즈무 운동의 선구자였던 갈 꼬스따(Gal Costa), 1970년대 MPB의 최고 스타로 군림했던 엘리스 레지나(Elis Regina), 최고의 여성 삼비스타 끌라라 누네스(Clara Nunes) 등의 이름이 우선 떠오르지만 그러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 일단 '1990년대 이후'로 시야를 좁히기로 하자.

첫 번째 텍스트는 아무래도 앞에서 언급한 [Red Hot + Rio] 음반이 적절할 것 같다. 열세번째 트랙으로 수록된 "Waters of March"라는 곡의 멜로디가 무언가 익숙하다면 원 제목이 "Aguas de Marco"이라는 사실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이 앨범에 수록된 다른 많은 곡들처럼 안또니우 까를루스 조빔(Antonio Caelos Jobim)의 고전적 작품이다. 혼성 듀엣인 노래에서 남자 목소리는 '브라질 가수와의 듀엣 전문(?)'인 데이비드 바이언(David Byrne)이다. 뉴 웨이브이자 '월드 퓨전'인 토킹 헤즈(Talking Heads) 출신이자 지금은 워너 브라더스 산하의 월드 뮤직 레이블 루아카 밥(Luaka Bop)의 '사장님'이기도 한 그 인물 말이다. 여자 목소리는 보사 노바 디바들 특유의 목소리, 뭐랄까 목에 희뿌연 안개가 낀 듯한 목소리로 전혀 힘들이지 않고 부르는 목소리다.

마지막 트랙 "Preciso Dizer Que Te Amo"을 들으면 이런 목소리는 더욱 '원조'에 가까워진다.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질베르뚜(Gilberto)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주앙 질베르뚜의 딸' 베벨 질베르뚜다. 함께 노래부르는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는 까주자(Cazuza)라는 이름을 하고 있다. 혹시나 '브라질 록'에까지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바라오 베르멜로(Barao Vermelho)라는 '브라질 최초의 록 밴드' 출신이라는 정보도 들었을 것이다. 이 두 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의 절반을 메워 보자.  

 

베벨 질베르뚜: 태생적인 국제적 디바         

브라질 국민이 아니라면 그리고 '월드 뮤직의 호사가'가 아니라면  보사 노바 이후의 브라질 음악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게 자연스럽다. 브라질 민중들이 '영화 <흑인 올훼>에 나온 것처럼' 산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뒤지고 들어가면 1960년대 이후의 브라질 음악은 흥미진진하다. 특히 1960년대 후반의 뜨로삐깔리즈무와 그 뒤의 MPB는 영미의 팝과 록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브라질다운' 무언가를 남기고 있다. 그쪽 음악인들이 줄기차게 커버하는 곡 중의 하나인 "Aqarelo do Brasil"의 가사처럼 "나의 브라질다운 브라질(meu Brasil brasileiro)"의 느낌 말이다. 이건 아무리 '빠다 냄새'나게('모던'하게?) 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꼬임브라 파두'처럼 학술적 목적으로 보존된 것도 아니다. .

보사 노바에서 대해 길게 언급하기에는 적절한 자리가 아니고 또 '적임자'도 아니다. 그렇지만 워낙 유명한 음악이다 보니 최근에 활동하는 음악인의 레코딩에서 보사 노바의 향기를 맡으면 일단 익숙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아는 한도 내에서' 하는 말이지만, 보사 노바가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계승하는 인물들은 주로 여성 음악인들이다. 1960-70년대 뜨로삐깔리즈무의 시대에도 까에따누 벨로주나 질베르뚜 질, 톰 제 등 남자 뮤지션들이 보사 노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면서도 (영미) 록 음악의 시끄러운 기타 사운드와 스튜디오 프로듀싱에 전념한 반면, 갈 꼬쓰따나 리따 리(Rita Lee)같은 여가수들은 상대적으로 보사 노바의 원류에 가까운 나긋나긋하고 '재지'한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였다. 1990년대 이후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브라질 역시 사내아이들은 (백인의 경우) 록이나 (흑인의 경우) 힙합같은 국제적 조류에 민감한 반면 여가수들은 노래 형식에 충실한 '팝'에 가까운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보사 노바/MPB와 국제적 팝을 결합시키면서도 신선하고 독창적인 음악을 선보인 음반으로는 지난해 발표된 베벨 질베르뚜의 [Tanto Tempo]가 가장 귀를 끈다. 이름만 봐도 느낌이 오듯 그녀는 주앙 질베르뚜의 딸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주앙 질베르뚜가 맞지만 어머니는 아스뜨루드 질베르뚜가 아니다. 주앙이 아스뜨루드와 이혼한 뒤 재혼한 뮤차(Miucha)가 그녀의 어머니인데, 그녀 역시도 가수이자 작곡가이자 소설가인 치꼬 부아르꿰(Chico Buarque)의 여동생이다.

베벨 질베르뚜는 9살 때부터 무대에 섰다. 그것도 동네의 교회가 아니라 카네기 홀에서 아버지 주앙 그리고 스탠 게츠(Stan Getz)와 함께. 많은 이들에게 베벨은 "이파네마로부터 온 소녀" 그 자체로 다가왔다. 이런 상황은 아무래도 아티스트로서의 경력을 쌓기에는 부담으로 다가온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25살 되던 해인 1991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이유는 스스로의 표현에 의하면 "나를 주앙 질베르뚜의 딸이 아니라 또 한 명의 브라질 가수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뉴욕이었고 이 곳은 그녀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파리와 런던에 잠시 체류했던 것을 제외하고 뉴욕에서 살고 있는 그녀는 그동안 다른 아티스트의 레코딩에 목소리를 빌려주는 활동을 했다. 까에따누 벨로주, 아르뚜 린지(Arto Lindsay)같은 브라질 혹은 브라질계 미국인의 레코딩 뿐만 아니라 또와 떼이(Towa Tei),  씨버리 코퍼레이션(Thievery Corporation), 스모크 씨티(Smoke City) 등 테크노 음악인들의 레코딩도 포함된다(각각 일본, 미국, 영국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국제적 인물들이다).

그녀는 여기저기서 레코딩 제의를 받아왔지만 정작 자신의 앨범을 제작하지는 않았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98년 브라질에서 활동하는 프로듀서 수바(Suba)가 카네기 홀에서 주앙과 베벨이 노래부르는 것을 본 다음이다. 수바는 브라질에서 테크노와 댄스음악의 프로듀서로 활동한 인물인데 베벨을 설득하여 사웅 파울루의 스튜디오에서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불행히도 수바는 앨범이 발표된 직후 스튜디오의 화재 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제목처럼 "너무 오랫동안(tanto tempo)" 기다려온 작품이자 최악의 액땜까지도 거친 앨범인 셈이다. 그렇지만 기다려온 보람이 있다. 절반 정도는 삼바와 보사 노바의 고전의 리메이크를, 절반 정도는 신곡으로 채운 음반은 프로듀서인 수바의 전체적 프로듀싱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씨버리 코퍼레이션, 스모크 씨티 등의 부분적 참여를 통해 '보사 노바를 재탄생시킨' 작품이 되었다. 앨범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상세히 평하겠지만 댄스 클럽의 무드와 텍스처를 거쳐 재탄생된 보사 노바는 본래의 보사 노바와는 다르다. 그렇지만 정열을 강하게 품고 있으면서도 그걸 드러내는 방식은 매우 '쿨'했던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마리자 몽치: 국내의 슈퍼스타 그리고 국제적 컬트

베벨 질베르뚜처럼 음악 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국제적인 경우와는 다르지만 보사 노바의 또 한 명의 딸은 마리자 몽찌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먼저 브라질 여가수가 국내의 인기와 국제적 '컬트'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가를 보여준 인물이다. 마리자 몽찌는 보사 노바와 뜨로삐깔리즈무의 고향인  바이아가 아니라 리우 데자이네루 태생이다. 그렇지만 국제적 팝과 록에 영향받으면서도 그것에  휘말리기 보다는 그를 통해 브라질의 풍부한 음악적 자산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사 노바/뜨로삐깔리즈무의 후예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세대가 다 그렇듯 1970-80년대의 마리자 몽찌는 엘리스 레지나의 노래를 듣고 자라면서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 소녀였다. 그렇지만 마리자의 목소리는 브라질의 재니스 조플린이라고 부를 만한 레지나의 성량 풍부하고 성마른 느낌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오히려 몽치의 목소리는 갈 꼬스따(혹은 마리아 베타니아)에 가깝게 들린다. 콧소리가 나면서도 느끼한 맛보다는 감칠맛나는 목소리 말이다. 1980년대 후반 로마에서 클래식 성악을 공부하고 돌아온 몽찌는 이때 얻은 지식을 결합하여 본격적으로 직업적 음악인의 길에 들어서고 선다. 그녀의 두 번째 앨범이자 출세작인 [Mais(더욱)]를 발매했다. 1992년 브라질에서 초판이 발매된 이 앨범은 1994년 EMI에서 의해 세계적으로 배급되면서(한국에서는 1997년 수입된 적이 있다) 플래티넘 레코드가 되었다.

그렇지만 몽찌는 (베벨과 비교한다면) '자국에서의 인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형이었다. 한 웹사이트의 표현에 의하면 몽치는 "마돈나같은 길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꾸준히 발표된 [Rose and Charcoal](1994), [Barulhinho Bom](1996), 라이브 앨범인 [A Great Noise](1997) 그리고 최근작인 [Memories, Chronicles and Declarations of Love](2000)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음악은 절충적이면서도 나열적이지 않은 묘한 매력을 지속적으로 발산하고 있다. 1995년 이후 몽치는 전미 투어를 하는 보기 드문 스타가 됨과 동시에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서도 연주하는 등 국제적 슈퍼스타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지만 '현명한 절충'을 택하고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 몇 가지 의식적 전략이 구사되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자국(및 라틴 문화권)에  발매하는 음반에는 포르투갈어 제목을, 영미권 등 다른 문화권에 발매하는 음반에는 영어 제목을 달아서 배급하는 것은 사소한 것 같아도 중요한 전략이다. 이는 커버곡과 신곡을 적절히 안배하는 면에서도 반영된다. [Mais]에서는 까에따누 벨로주의 "De Noite Na Cama"를,  [Memories, Chronicles and Declarations of Love](2000)에서는 MPB의 또한명의 대가인 조르헤 벤(Jorge Ben)의 "Cinco Munutos"를, [Barulhinho Bom](1996)에는 질베르뚜 질의 "Cerebro eletronico"을 각각 수록했다(이 점은 자국의 선배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요인이다). 이와는 반대로 국제적 팝과 록의 고전들이 원곡 그대로 혹은 '번안곡'으로 수록되기도 한다. [Rose & Charcoal]에 삽입된 루 리드/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그리고 [Barulinho Bom]과 라이브 앨범 [A Great Noise](1997)에 수록된 조지 해리슨의 "Give Me Love(Give Peace on Earth)"같은 곡들에서 확인된다(불만스러운 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점은 '제 3세계'에서 제작된 음반의 국제적 '신뢰도'를 주는 요인 중의 하나다).   

마리자 몽찌는 주류 음악계에서의 성공적 경력을 이어나가면서도 자국의 음악적 자산을 존중하는 존재, 또한 국제적 명성을 얻으면서도 자국에서의 인기를 소중히 생각하는 존재라는 평을 받는다. 즉, 그녀의 음악은 월드 뮤직이라는 '게토'에 처박히지 않는 '팝 음악'이지만, 그러면서도 영미 팝으로부터 파생된(derivative)것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는다. 한 예로 그녀는 월드 뮤직의 스타들이 벌떼처럼 모여드는(국제적 인정을 위해서?) 뉴욕의 써머 스테이지같은 무대에 서지 않고 독자적으로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몇 백 명의 '외국인' 청중 앞에서 (그들에게는 외국어인) 포르투갈어로 노래부르는 공연이 지속적으로 성사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브라질 국내에서 몽찌같은 존재는 흔치 않다. 아드리아나 깔까뇨뚜(Adriana Calcanhoto)같은 후발자(혹은 동반자)가 있기는 하지만, 국제적으로 존중받는 성공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미진해 보인다. 그렇다면 정작 브라질 국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음악은? 한 인터뷰에서 베벨 질베르뚜는 "브라질에서 팔리는 음악은 상업적이고 온순하게 길들여진 삼바, 그리고 북동부에서 나오는 음악이다. 후자는 마치 컨트리 음악처럼 저급한 취향의 음악이다"라고 말했다. 조금 이상하다. 북동부라면 바이아 지방이 아닌가. 이곳은 주앙 질베르뚜, 까에따누 벨로주, 질베르뚜 질이 태어난 곳이고 그렇다면 보사 노바와 뜨로삐깔리즈무의 탄생지 아닌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다니엘라 메르꾸리: 국내의 슈퍼스타

1990년대 이후 브라질의 대중음악을 직접 들어보려면 http://www.sombrasil.com에 들어가면 된다. 지금은 개편되었지만 이전에는 브라질 음악의 장르를 'Bossa Nova / MPB / Brasil Rock / Brasil Axe'의 네 가지로 분류했었다.  보사 노바는 이제 '나이든' 이들을 위한 음악이고, MPB는 브라질 국민이라면 '남녀노소 지위고하 가리지 않고 누구나 좋아하는' 음악이고, 록은 1970년대 이래 사웅 파울루를 중심으로 형성된 '로컬' 록 음악이다. 마지막 하나 아셰란 무엇일까?

거칠게 말하면 아셰란 '댄스 음악'이다. 영국과 유럽의 테크노/일렉트로니카보다는 동아시아의  '땐쓰 가요'에 가깝다. 드럼 머신과 신시사이저가 시종일관 몰아붙이면서 신나는 리듬을 만들어낸다. '브라질'이기 때문에 '쿵-쿵-쿵-쿵'거리는 정박의 패턴은 아니지만 삼바나 보사노바의 씽커페이션 걸린 미묘한 리듬과도 조금 다르다. 물론 가수의 노래가 있고, 그 중에는 여가수, 특히 백인 여가수(이른바 Baiana)가 많다. 최근에 가장 인기를 누린 아셰는 여성 가수 한 명을 포함한 5인조 그룹 반다 에바(Banda Eva)였다. 그렇지만 반다 에바 이전에 아셰를 '정의'한 사람은 '아셰의 여왕'인 다니엘라 메르꾸리다.

바이아의 살바도르 태생(1965년 생)출신의 시골 처녀였던 다니엘라 메르꾸리는 1994년에는 "브라질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소니 레코드의 연례 음악 파티에 초대된 인물"이 되었다. 자메이카의 킹스턴이나 영국의 브리스톨과 유사한 사운드 시스템인 뜨리우스 엘렉뜨리꾸스(Trios Electricos)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1980년대 후반 록 밴드의 멤버로 두 장의 음반을 발표한 그녀는 1991년 셀프 타이틀의 솔로 데뷔 앨범에서 "Swing da Cor"를 전국적으로 히트시키면서 일약 새로운 디바로 등극했다. 1993년에는 뉴욕의 리츠(the Ritz)에서 공연을 같는 등 국제적 스타로 부상한 그녀는 소니 산하의 CBS 레이블로 옮겨 발표한 [O Canto da Cidade(도시의 노래)]를 플래티넘 레코드를 기록하면서 브라질 아셰의 여왕이라는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런데 아셰란 도대체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Swing da Cor"를 들으면 실마리가 풀린다. 이 곡의 리듬은 '쿵 짝 쿵 짝'거리며 절름거리는 레게 리듬과 '쿵쿵 짝 쿠쿠쿠쿵 짝짝'거리는 삼바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살바로드 사운드' 혹은 '삼바-레게'라고 불리는 이 리듬은 1980년대 바이아 지방의 아프리카계 브라질인들에 의해 만들어져 로컬 음악으로 정착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삼바와 레게 뿐만 아니라 나이지리아의 주주 등 아프리카의 '현대적' 리듬도 과도 결합하여 형성되었다. 폴 사이먼의 [Rhythm of the Saints](1990)에 수록된 "The Obvious Child"같은 곡에서 선보인 그 리듬이고, 마리자 몽찌의 경우도 몇몇 곡에서 이 리듬을 선보였다(정보: 얼마 전까지 대형매장의 '월드 뮤직' 코너에 EMI의 산하 레이블인 헤미스피어(Hemisphere)에서 발매된 [Yele Brazil]이라는 컴필레이션 음반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리자 몽찌의 한 곡을 포함하여 반다 레플룩시스(Banda Reflux's), 아라 께뚜(Ara Ketu) 등이 연주하는 '본래의' 살바도르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

과정은 복잡하겠지만 아셰는 살바도르 사운드 혹은 삼바-레게가 상업적으로 변형된 산물로 보인다. 퀴카(cuica)를 포함하여 퍼커션들이 만들어내는 '억제할 수 없는(irresistible)' 리듬과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는 신시사이저와 드럼 머신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잊고 신나게 춤추기 좋은 사운드'로 바뀌었다. 삼바 레게의 열대의 느낌을 담은 무거운 리듬은 계속 남아있지만 음색이나 프로듀싱은 매우 미끈하고 '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라 메르꾸리를 다른 '보통의' 아셰 뮤지션과 같은 급으로 취급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녀가 대부분의 곡을 직접 쓰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분위기있는 발라드에도 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메시지' 있는 가사와 카리스마 가득한 이미지가 있다. 반바지와 '나시'를 입고 화려한 춤을 추면서 열창하는 그녀의 공연은 '미와 카리스마의 심볼'이라는 평가에 무색하지 않다.

그렇다고는 해도 다니엘라 메르꾸리 이후 등장한 아셰 음악은 '월드 뮤직'의 청중에게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아셰 그룹은 "백인 바이아나를 앞세우고 무거운 타악기를 선보이는 또하나의 신디사이저 밴드"라는 식의 반응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작년 [Sol da Liberdade]를 발표한 다니엘라 메르꾸리의 인기도 자국에서는 여전히 강력하지만 국제적 관심은 다소 감퇴한 느낌을 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셰 음악이 '후지다'는 일방적 평가가 아니라 자국의 취향과 국제적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월드 뮤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비르지니아 로드리게스: 쎄자리아 에보라를 능가하는(?) 월드 디바

1998년 반다 에바의 드럼 소리가 브라질 전역에서 울려퍼질 무렵 이런 세속적인 사운드와는 한참 다른 신성한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신성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비르지니아 로드리게스(Virginia Rodrigues)였다. 쎄자리이 에보라를 '능가한다'는 표현은 현재의 에보라의 지위를 고려할 때 경거망동에 해당하지만 적어도 체중과 부피 면에서 이 처녀가 에보라를 능가하는 듯하다. 목소리와 노래는? 이걸 가지고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지만 로드리게스의 목소리는 에보라와도 또 다르다. 에보라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아 저런 목소리도 있었구나"라는 느낌이 다시 한번 밀려드는 목소리다. 앨범의 제목은 [Sol Negro(흑인의 영혼)]이었다. <The New York Times>는 "브라질 음악의 새로운 목소리"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월드 뮤직 전문 레이블들은 라이센스 계약을 맺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현재 30대 중반인 비르지니아는 바이아의 가난한 흑인 노동계급 출신으로 가정부와 미장원 직원으로 일하면서 교회에서 노래부르는 것이 음악 경력의 전부인 처녀였다. 1994년 올로둠 극단(Olodum Theater Group)의 일원으로 공연 중에 노래를 부른 것을 들은 까에따누 벨로주에 의해 전격적으로 발탁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렇게 계속 살았을지도 모른다. 벨로주는 로드리게스를 위하여 질베르뚜 질, 밀뚠 나씨멘뚜, 자반 등 MPB의 슈퍼스타들을 초대하여 음반을 레코딩하였고, 1997년 말에 음반이 발표되었다.

음반의 편곡은 '대중음악'이라기에는 매우 소박하다. 콘트라베이스와 하프와 기타를 중심으로 이끌어나가는 악기음은 매우 성긴 텍스처를 만들어내고, 베림바우, 땀부라, 보틀, 차임 등 '다채로운' 타악기 소리가 등장하지만 부드럽고 섬세하다. 어떤 곡에서는 반주 없이 아 카펠라로 노래부르는 경우마저 있다. 아주 오래된 듯한 그렇지만 영원할 듯한 곡조가 세상의 때가 하나도 묻지 않은 듯한 목소리를 통해 울려퍼지면 풍성한 공명이 된다. 실내악 스타일의 현악기가 등장하는 "Noite de Temporal"는 마치 오페라의 아리아를 듣는 듯한 기분까지 든다. 본인은 "내 음악을 다른 음악 위에 두려는 시도를 우려합니다"라고 말하지만.

가사의 메시지는 음반의 제목처럼 아프리카인의 긍지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언어 장벽으로 인해 그걸 알아내기는 힘들지만 어떤 메시지를 말하는가와는 무관하게 '어떻게' 전달하고자 하는지는 명확하다. 깐돔블레(candomble)라는 아프리카계 브라질인들의 종교적 의식에 대해 금시초문이라도 마찬가지다. 로드리게스의 음악은 삼바 레게보다도 더욱 오래된 아프리카의 뿌리를 찾아가는 성스러운 여행처럼 들린다. "나는 흑인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들 스스로를 사랑하게 만들고 싶다"는 로드리게스 본인의 말 때문만은 아니다. "브욕(Bjork)의 달콤한 아마존 드림"이라는 한 웹진의 평이 무슨 말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함부로 쓰면 촌스럽지만 '영혼의 목소리'라는 표현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쓸까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까에따누 벨로주가 제작에 보다 깊숙이 관여한 [Nos](2000)에서도 영혼의 울림은 떨어지지 않는다. 앨범 리뷰는 다른 난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단지 이 음반에서 '최악의' 트랙이 까에따누 벨로주와 함께 듀엣으로 노래한 트랙이라는 농담으로 나의 불경스러운 평은 마치고자 한다(물론 이 트랙도 다른 컨텍스트에 위치하면 더없이 훌륭한 곡이지만).

 

나가며

또하나의 수박 겉핥기식의 소개를 마치면서 드는 의문들이 있다. 브라질 음악은 왜 저렇게 쉽게 '국제화'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영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같은 영어사용권도 아니고, 멕시코나 푸에르토 리코처럼 미국의 코앞에 위치한 나라와도 또다른데 말이다.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별로 멀지 않은 나라'라는 이유만으로는 불충분해 보인다.

하나의 실마리는 본문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을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보사 노바 이후에도 뜨로비깔리즈무/MPB의 주역들과 뉴욕의 브라질광들인 데이비드 바이언 사이에서 아르뚜 린지라는 인물이 중개자 역할을 해왔다. 브라질계 미국인인 린지는 자신의 음악활동을 전개하면서도 브라질의 베테랑 음악인들과 국제적 공동작업을 수행해 왔고 아울러 미국 시장(나아가 세계시장)을 겨냥한 신인급의 아티스트들의 프로듀스를 도맡다시피 해왔다. 브라질 음악이 국제화되는 시스템은 자연발생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의 의식적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가까워 보인다. 따라서 브라질의 젊은 음악인들은 자국에서의 인기와 국제적 평판 사이의 여러 가지 조합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듯하다. 음악인들에게는 행복한 환경이고 이 글의 독자 중에 한국 음악의 국제화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대목이다.

또하나의 의문이 있다. 브라질은커녕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과도 아무런 '상호교류'의 시스템이 없는 한국인이 '후진국'의 음악까지 찾아듣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한국인도 이제 '선진국형 음악 취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일까. 언젠가 월드 뮤직 붐에 대한 '불만'을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건 월드 뮤직을 '산업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사운드'로 오해하는 취향을 말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그곳 음악산업의 시스템의 전형적 산물인 음악을 저렇게 오해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지만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월드 뮤직이 '영미 팝'의 대체물로 존재하는 것은 '현실'이다.

그렇다면 월드 뮤직이라는 범주를 송두리째 부정하기 보다는 월드 뮤직에 대한 대안적 시각을 갖추는 것이 나아 보인다. 즉, 어떤 나라의 음악이든 영미 팝의 '글로벌'한 매개 속에서 '로컬'하게 형성되며, 따라서 그곳의 음악 역시도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똑같은 '변방국'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쌈빡한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영미 팝보다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질 수 있다. 즉, 영미 팝보다 더욱 멀리 있는 초월적 음악을 찾아나서는 호사가로서가 아니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풍부해질 수 있는 동시대인의 태도가 보다 건설적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비르지니아 로드리게스의 '오래된' 느낌의 음악도 다니엘라 메르꾸리의 세련된 음악 만큼이나 브라질의 '현대인'의 삶의 하나의 단면으로 들린다. '로컬 음악'이란 '글로벌화되지 않은 음악'가 아니라 글로벌화의 복잡한 산물의 하나라는 '어려운' 말로 글을 마친다. 브라질은 꼭 '그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 웹진 <weiv>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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