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 지금 여기서 록의 신화는 가능한가(1)

록 비평 : 인상비평에서 문화평론으로?
 
1990년대 이전에 한국에서 록 비평의 지배적 형태는 음반사와 밀접하게 연관된 음반 해설이나 잡지(혹은 팬진 fanzine) 기사였다. 글의 내용은 뮤지션의 경력과 신변 잡기, 그리고 사운드에 대한 감식자의 평가로 채워졌다. 따라서 이런 비평들은 '조사와 분석' 보다는 '소개와 감상'의 형태를 취했으며 이론적인 담론과는 접속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진단이 기존의 비평을 평가절하하려는 의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록 비평은 어떠한 형태를 취하더라도 음반의 마케팅과 홍보 차원을 넘어서 대중의 음악적 취향을 적극적으로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가진다. 록 음악을 둘러싼 정치적·문화적 컨텍스트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상황에서 이들 비평은 이른바 '록 매니아'라는 특수한 청중군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록 비평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든 듯하다. 록 비평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음반사로부터 독립된 지면에 실리기 시작했고, 글쓰기의 형태도 주관적 인상비평을 넘어 이론적 담론의 형태를 취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런 시도가 나타난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논할 계제가 아닌 것 같다. 또한 그 성과 면에서 볼 때도 현재의 담론도 일관된 개념이나 방법을 갖추지 못한 채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기존의 록 비평과의 커다란 차별성도 없다.

그렇지만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선명한 '입장'의 확립이다. 즉, 새로운 점은 록에 접근하는 시각이 또렷해졌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진지한 접근은 부실한 반면, 입장은 선명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 요즈음은 "개념은 우둔한 반면, 판단은 명확한 시대"인 듯하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폭발적 저항의 미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록의 본질을 '저항의 예술'로 사유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록 음악의 탄생을 전후(戰後)의 새로운 사회적 현상인 청년문화와 결부지어 설명하고, 그 이후의 록 음악의 스타일을 청년문화의 '세대정신'의 반영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이 견해에 의하면 60년대는 청년의 저항문화가 개화한 '이상의 시대'이고, 70년대는 저항정신이 점차 쇠퇴하면서 절충적 정서가 도래한 '자극과 개인주의의 시대'이고, 80년대는 메인스트림 팝의 위세에 눌려 버린 '탐욕의 시대'라는 일련의 시기구분이 도출된다. 그리고 90년대는 얼터너티브 록의 대두를 통해 록 본연의 정신(rock spirit)과 저항적 청년문화가 부활한 시기이다. 따라서 90년대 국내 캠퍼스 일각에서 록이 '저항의 음악'이라는 담론이 유행하면서 '록 르네상스'의 무드가 조성되고 있는 현상도 이들의 열정적인 활동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최근의 '록 르네상스'에 대한 세간의 반응이 그렇게 우호적이지는 않은 듯하다. 반발은 대략 두 개의 경로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기존의 록 비평가들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하세민에 의하면, 현재의 록 르네상스는 일부 비평가들이 언론을 등에 업고 인위적으로 주도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반응은 비평에 담긴 내용을 평가한다기 보다는 비평이 수행되는 방식을 문제삼고 있다. 즉, 이들은 자신의 거부감의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반응은 보다 젊은 세대들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문]의 익명의 기고문은 최근의 새삼스러운 록 르네상스는 "더이상 새로운 저항의 양식을 찾아나서지 못한 이 시대의 무능력이 몰고온 보수적 취미"라고 평하고 있다. 노염화의 경우도 "오리지널리티를 상실한 '형식'에 거는 무모한 숭배"라는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독창적인 자기주장을 전개할 계획이 없으며, 따라서 어떤 견해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진리 게임은 피할 것이다. 단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록 음악이 '지금 여기'의 문화적 정세에서 논쟁의 초점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쟁점의 중심은 록이 '저항의 예술'이라는 주장을 둘러싼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역사적 맥락을 따져 보는 일이 다음 절의 작업이다.

록은 저항의 예술이다 :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신화

록 정신(rock spirit)이 '젊음의 폭발적 저항의 미학'이라는 정의는 한국의 상황에서는 다소 새삼스러울 지 몰라도 록의 본산지에서는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이 정의는 모순되어 보인다. 예술을 논할 때나 어울릴 '미학'이라는 용어가 '폭발적 저항'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원시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저항과 세련되고 고상한 예술의 공존.

이런 록 이데올로기가 60년대의 저항운동과 반(反)문화로부터 파생된 것임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이미 60년대부터 미국의 주도적 비평가로 활약한 존 랜도(Jon Landau), 데이브 마쉬(Dave Marsh),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g) 등에 의해 확립된 '록 이데올로기'이다. 실제로 이들 비평가들은 60년대의 뉴 레프트 운동과 직·간접적 연관을 맺고 있었던 인물들로서 그들의 주요 활동 공간인 <<롤링 스톤 Rolling Stone>>의 지면을 통해 일관된 견해를 표명해 왔다.

외견상 모순되어 보이는 위와 같은 정의가 일관성을 갖출 수 있는 것은 두 항을 가로지르는 '진정성(authenticity)' 개념 덕분이다. 이때 진정성이란 팝의 가식성(inautheticity)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어설프지만 정신분석의 개념을 사용하여 표현한다면, 진정성 개념은 팝 음악의 타자(the Other)이다. 마치 타자 속에서만 자신의 의미를 획득하는 라캉(J.Lacan)의 주체처럼, 팝 음악은 팝이 아닌 것을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따라서 미국 팝 음악의 역사는 타자들의 계기적 출몰의 역사이다. 때로는 블루스가, 때로는 포크가, 때로는 컨트리가, 때로는 소울이, 때로는 록이, 때로는 랩이, 그리고 다양한 '제 3세계 음악'(혹은 '월드 뮤직')이 팝 음악의 타자로 등장했다. 따라서 팝이라는 기표는 계속 미끄러진다. 메인스트림 팝은 단지 30년대의 '틴 팬 앨리'만을 지칭하는 것은아니고, 각 시기에 타자와의 관계 속에만 정의되는 유연하고도 포괄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진정성 개념은 록 음악을 정의하는 두 가지 요소인 청년의 저항과 예술적 표현을 모두 관통할 수 있다. 전자는 집단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반면 후자는 개인적이고 목적의식적이지만, 양자 모두 '진정한' 표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여기서 우리는 60년대 미국 청년의 세대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60년대 저항문화의 주체성은, '연대감(togetherness)'으로 상징되는 집단성과 개인의 자기표현이라는 개인성이라는 상반된 요소의 절묘한 융합이었다. 또한 전자가 '집단적 저항'이라는 반자본주의적 좌파의 전통적 신화라면, 후자는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아메리카의 전통적 신화다. 즉,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은 예술적 창조와 비판적 의식을 가져오고, 이는 다시 집단적 저항의 효소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히피 반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던 1967년을 전후한 시기에 개인의 창작물인 록 음악은 청년의 저항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었고, 록 뮤지션은 대중의 전위가 되었다. 그러면서 록의 신화는 완성되었다. 60년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록은 '저항의 예술'이 되었고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런데 70년대 초의 록 비평에서는 '집단적 저항문화로서의 록'이라는 측면은 점차 약화되면서 사라지면서 '개인적 예술로서의 록'이라는 측면이 점차 부각되는 양상을 보인다.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던 저항과 예술은 점차 파열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진정성 개념은 록의 자기발견, 즉 록 음악을 '예술'로 정의하려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견해는 록 음악은 상업적 팝 음악과는 달리 창작자의 '개인적 세계'를 표현한다는 사실에서 논거를 발견한다. 즉, 팝 음악은 상업적인 모방을 통한 복제물인 반면, 록 음악은 '개인의 의식적 창작물'이다. 그런데 이는 부르주아적인 합리적 예술관의 흔적은 아닐까. 대중문화와 예술 사이에 장벽을 쌓은 아도르노의 유령은 계속 출몰한다.

예술로서의 록

'예술로서의 록'이라는 담론이 공식화된 것은 1970년대라는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다. 록의 '공식적' 역사에 친숙한 사람이면 1969년에 벌어진 '우드스탁(Woodstock)'과 '알타몬트(Altamont)'라는 두 개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평화와 폭력... 저항문화의 두 개의 요소가 파열되기 시작하면서 저항문화의 내재적 모순이 드러났고, 록 청중 사이에도 분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도식적으로 구분하면 자연발생적 로큰롤러와 자기의식적 히피의 구분이고, 상징적으로는 싱글과 앨범,AM과 FM 의 구분이다. 싱글 중심으로 발매되고 AM에서 방송되면 팝이고, 앨범 중심으로 발매되고 FM에서 방송되면 록이라는 엉성한 이분법이 발생한 것도 이 즈음이다.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분류법이 너무도 많지만 그게 인간이 만든 세상이다.

록 비평가들은 진정한 록과 상업적 팝의 구분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비평가들 내부에서 일련의 논쟁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일부의 록은 예술이다(Some Rocks are Art)"라는 명제가 논쟁의 결론이었다. 문제는 잠정적으로 해결된 듯이 보였다. '진짜'는 록이고, 가짜'는 팝이고, 록을 빙자한 상업적 음악은 '사이비'다.

그렇지만 '예술로서의 록'이라는 견해의 헛점은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도, 록 음악의 창작과정은 전혀 개인적이지 않으며, 일종의 '팀 작업'이다. 또한 소비과정까지 고려한다면 록 음악은 감상이라는 측면 못지 않게 오락이라는 측면을 갖는다. 이분법은 편리하지만 도식적이어서 무용할 때가 많다. 비평가들의 기준인 '진정한 록'과 '상업적 록'의 이분법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모든 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진정성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에는 예술로 들리는 음악이 다른 이에게는 형편없는 상업주의 음악으로 들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진정성의 객관적 기준은 있는가. 개인마다의 주관적 기준이 있을 뿐이고 우리는 피곤한 게임에 들어가야 한다. 누구는 예술가고, 누구는 쓰레기다... 문제는 점점 꼬이기 시작한다.

꼬인 문제를 풀어보기 전에 더 꼬이게 해 보자. 진정성 개념은 록 음악에 대해 최초로 적용된 것이 아니고 더 먼 과거로 소급될 수 있다. 또한 이는 평론가들 뿐만 아니라 '진지한' 음악인들도 공유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미국의 포크 음악의 역사에서 잘 나타난다.

30년대의 전설적인 포크 뮤지션 우디 거쓰리(Woody Guthrie)는 미국 노동계급의 오락 도구였던 쥬크 박스를 반대했다. 그 이유는 포크가수가 라이브 연주를 할 기회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경제적 이유 외에도 "실제로 일어나는 이야기"를 노래하는 포크에 비해 쥬크 박스를 통해 나오는 팝(가요)은 그렇지 않다는 철학적 이유에서였다. 포크 음악인들의 사고의 심층에서는 라이브 연주를 통한 음악만이 진정한 '민중' 음악이었고, 어떤 형태로든 레코딩된 음악은 통속적인 대중문화였다. 리고 알란 로맥스 Alan Lomax 같은 포크 음악 연구자는 상세한 조사를 통해 스탠더드 팝이란 "진정성을 가진 포크를 허위적(inauthentic)으로 변형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현상은 30년대의 포크 음악은 악기 사용에도 제한을 두었다는 점이다. 피아노는 부르주아 가정의 악기라는 이유로 연주되지 않았다. 1965년에 밥 딜런(Bob Dylan)이 전기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랐을 때 청중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았던 유명한 일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포크 공동체의 성원들이 보기에, 당시에는 상업주의의 화신이었던 전기 기타를 사용한 것만으로도 밥 딜런은 진정성을 상실한 배신자였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록 밴드들이 전자 악기를 사용할 때마다 골수 록 팬들이 "쟤들은 맛이 갔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음악의 산업화

이런 사례들로부터 알 수 있듯이 진정성은 개념은 음악에 사전적으로 존재하는 의미가 청중에게 투명하게 전달될 수 있다는 발상이다. 그리고 이는 음악의 산업화(industrialization)가 아직 충분하게 진전되지 않은 우디 거쓰리의 시대에는 어느 정도 적실한 개념이었다. 또한 포크 뮤지션은 상업적 포획망의 외부에서 음악 활동을 전개했으며, 음악 활동으로 생계를 마련하는 일은 거의 없었거나 있었다고 해도 부차적이었다.

그렇지만 음악의 산업화가 자기 발로 서게 된 현대에 와서 진정성 개념은 점차 유효성을 상실한다. 산업화가 진전되어 대중음악이 상품의 형태를 취하게 되고, 음반사의 마케팅 전략 하에서 대량생산될수록 '진정한 음악'과 '상업적 음악'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이는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곧 감수해야만 하는 비가역적이고 불가피한 추세가 되어 버린다. 이럴 때 '진정성' 개념은 백만장자가 된 슈퍼스타가 자기 음악은 상업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알리바이가 되어 버린다. 소박한 포크 이데올로기로부터 뻔뻔스러운 록 이데올로기로의 전화.

한편 영국의 연구자들의 주장은 '국민성' 답게 미국의 비평가들에 비하면 냉철하고 객관적이다. 그들에 의하면 음악의 '진정한' 의미란 사전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복잡한 사회적 컨텍스트 하에서 사후적으로 생산될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록에 관한 연구를 미디어 연구라는 일반적인 장 위에 위치지우면서 다음과 같은 조사 영역들을 제시하고 있다 : 1) 경제적 토대, 2) 음악이 생산·소비되는 사회적 관계들, 3) 텍스트 분석, 4) 작가 이론, 5) 청중의 성격등...

따라서 프리쓰의 시각에서 진정성 개념에 사로잡힌 미국의 록 비평가들은 "신화주의자(mythologist)"일 뿐이다. 그와 로렌스 그로스버그의 경우도 "록이 청년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록 음악이) 진정성 이데올로기와 접합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이제는 그런 가능성이 점차 작아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록 음악은 한때 대중음악의 발전의 추세를 거역하는 운동으로 간주되었으나 이제는 그 발전 과정의 일부라는 차분한 성찰이 이어진다.

그렇지만 이들의 연구가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대중음악이 취하는 상품 형태와 산업에 의한 대량생산이 대중음악의 텍스트가 생산하는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결정이 무조건적이지는 않으며, "음악의 의미는 항상 매개되고,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지배적 의미는 전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80년대 이후의 상황을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 속에서 검토하는 일이 문제로 남는다. 신화는 가고 현실은 남아 있다.

록은 죽었다 : '포스트모던'의 신화

80년대 들어 '록은 죽었다'라는 주장이 비평가들의 화두로 등장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번드르르한 새로운 메인스트림 팝은 록을 비웃으면서 천하를 평정할 듯한 기세를 떨쳤다. 또한 그나마 생존하고 있던 록 음악도 '주류' 청년들로부터 멀어져 갔다. 80년대의 청년들은 록으로부터 멀어져 새로운 메인스트림 팝이나 랩·힙합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시작했다.이른바 '록에 반대하는 청년(youth against rock)'이라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좌파 평론가들의 일부에서는 저항문화의 청년혁명의 시기를 정점으로 하는 록의 과거는 이제는 단지 혼성모방으로만 나타나고 있을 뿐이라는 '성급한' 성찰도 대두했다. 뮤직 비디오, 상업 광고, 드라마의 배경음악 등은 '좋았던 시절'의 록의 이미지만을 차용하여 폐쇄된 기표의 순환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포스트모더즘'의 대두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문학이나 미술의 패러다임을 이용하여 대중음악의 역사를 분석한 제임슨의 경우,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는 대중음악의 '하이 모더니즘(high modernism)' 단계를 나타내고, 펑크와 뉴웨이브는 다소 약화된 형태로 그들을 계숭한다. 그리고는 80년대 이후에는 이들 진정성이 사라지고 상징과 기호만으로 구성되는 '포스트모던의 상황'이 도래했다. 다른 논자는 뉴 미디어와 뉴 테크놀로지의 등장으로 이런 설명을 보완한다.

모든 주장이 그렇듯 이런 견해는 타당한 일면을 가지고 있으며, 적어도 <<롤링 스톤>>처럼 60년대 록의 신화에 집착하고 있는 비평에 대해서는 해독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은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듯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에서 몇 개의 헛점을 제기할 수 있다. 먼저 대중음악의 역사는 문학이나 미술의 사조 구분으로는 적절하게 분석될 수 없다. 문학과 예술은 '문화의 상품화'가 아직 체계적으로 진전되지 않았거나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른 상태에서 '근대'를 시작하였다. 따라서 근대 문학의 경우 그 정점은 모더니즘 이전의 리얼리즘(premodernist realism)이다. 그리고 모더니즘은 '상품형태로의 예술'에 대한 부정이라는 중요한 측면을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테리 블룸필드 Terry Bloomfield라는 맑스주의 비평가가 포스트모더니즘에 근거한 대중음악의 사조 구분을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에 의하면 제임슨이 하이 모더니즘으로 간주하는 60년대의 '고전적 록'은 전혀 모더니즘이 아니라 오히려 모더니즘 이전의 리얼리즘이다. 60년대의저항문화가 기성의 체제에 대해 수행한 반역의 효과가 아무리 강력한 것이었다고 해도, 60년대의 록 음악은 '상품형태로서의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런 부정의 몸짓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상업주의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록 뮤지션들은 적지 않았으나, 그 고민이 실제적 도전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블룸필드에 의하면 모더니즘적 부정은 70년대 후반의 펑크 운동에 들어서야 비로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펑크의 공격은, 예술적 통제를 확보하는 것으로 상업성의 딱지를 떼어 버릴 수 있다는 환상에 젖어 있던 70년대의 록 뮤지션과 비평가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로큰롤은 청년 반항의 제 1 원리임과 동시에 청년 반항이 겨누어야 할 제 1의 타겟이었다. 결론적으로 펑크는 '상품으로서의 음악'을 거부하면서 그와 동시에 진정성이라는 60년대식의 환상까지도 파괴시켰다.

또하나의 논점은 보다 실제적인 것이다. '클래식 록(classic rock)'이라는 용어는 극히 상업적인 동기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다른 예술 장르에서의 사조 구분과의 관련성을 찾는 일이 우스울 정도이다. 6-70년대의 음악을 록의 '고전' 혹은 '원형질'로 간주한다는 것은 음반사의 마케팅 전략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즉, 클래식 록은 20대 후반부터 40대까지의 특정 음반수요층을 겨냥한다는 목적을 가진다. 라디오 FM에서 6-70년대의 록을 전문적으로 틀어 주는 전문 프로그램을 편성한 것도, 빌보드 차트에 '모던 록'과는 별도로 '앨범 록(album rock)'이라는 희귀한 차트가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록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는 것이다 : 얼트 운동

결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다른 예술 장르에서 개발된 이론적 패러다임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는 대중음악이 문화영역의 상품화가 어느 정도 진전된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패러다임의 도식적 적용은 상황을 더욱 교착되게 할 뿐이다. 대중음악은 영화와 더불어 진정성과 상업성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든 문화적 형태이고, 고유한 이론적 시각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록은 죽었다'는 외침은 '록은 진정한 예술이다'는 주장의 거울 이미지이고, 록에 대한 또하나의 신화이다. 장례식을 치른 것은 록이 아니라 록에 관한 특정한 역사적 개념이다.

또한 90년대 벽두에는 '록은 죽었다'는 신화를 온몸으로 부정하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이른바 얼터너티브라는 록 음악의 새로운 스타일은 신보수주의적 억압을 돌파하면서 청년문화를 문화를 재결집시키고 있다. 얼트 문화(alt culture)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90년대의 청년문화는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창조하여 저항의 운동을 창출했고, 그 전위는 니르바나와 펄 잼 등 록 밴드들이었다.

얼터너티브 운동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듯하다. 단지, 얼터너티브의 등장의 배경이 되었던 80년대의 하드코어 씬(hardcore scene)의 경제조직의 특징을 지적할 수는 있을 것이다. 펑크의 모더니즘적 부정이 소멸한 뒤 형성된 하드코어 씬은 음악생산의 대안적 양식을 창출했다. 음악은 메이저 음반산업을 거치지 않고 유통되었고, 때로는 소비자보다 생산자의 수가 많기도 했다. 인디 레이블을 통한 자가제작(Do It Yourself)은 음악의 산업화의 추세를 거역하고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창조하려는 시도였다.

그렇게 본다면 얼터너티브란 하드코어 펑크가 메이저 음반사에 의해 재차 포획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록은 다시 이 거대한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골치아픈 문제에 대한 답변은 미루도록 하자. 단지 한 가지 확인해 둘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록은 죽었다'라는 주장이 득세할 때도 록은 언더그라운드에서 생성의 운동을 계속해 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얼트문화가 60년대의 히피문화에 비해 강도와 영향력 면에서 미미하다고 지적한다. Who doesn't Know? 그렇지만 이를 강조하는 것은 60년대의 신화에 집착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지적이다. 저항의 새로운 양식과 방법을 찾아야 할 순간에 이상적인 모델과 비교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거나 악의적인 것이다.

나아가 얼터너티브의 등장을 '록의 저항정신의 부활'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일면적이다. 록 정신은 결코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존재하는 것은 상이한 전략이 교차하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획득되는 지배적 의미일 뿐이다. 대중음악의 의미는 현재적(顯在的)인 것이 아니라 잠재적(潛在的)인 것이다. 따라서 록의 정신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 입증된 기성의 것을 복고하는 아니라, 오직 경험과 투쟁 속에서만 획득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음악은 정치투쟁이 지속되는 복잡한 장이다.

록 : 탈주의 게릴라

필자는 이 글에서 소모적인 논쟁을 초래할 것 같은 명시적 주장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름대로 토론의 대상을 염두에 두면서 글을 썼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대상은 다름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따라서 이 글은 일종의 자기비판이기도 하다. 후일담 문학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으로서 또하나의 후일담을 늘어놓는 것은 '주접' 이상이 아닐 듯하다. 그런 이야기는 비교적 무의식의 작용이 활발해지는 공간인 술집에서나 어울리는 얘기일 듯하다.

그렇지만 필자는 지금 여기에서 그동안 신체에 새겨진 여러 갈래의 감각의 편린들을 드러내 보일 수는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비판적 시선을 보냈던 여러 갈래의 입장 모두는 필자가 특정한 시기에 가졌던 생각이고 감각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사운드에만 심취했던 때도 있었고, 가사를 음미하면서 진정한 의미를 추구한 적도 있었고, 60년대식의 저항문화의 환상을 간접 체험한 적도 있었고, 심지어 듣기조차 역겨운 허접쓰레기같은 소음이라고 느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단지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공연장에서, 클럽에서, 감상회에서, 레코드샵에서, 노래방에서대중음악을 매개로 한 집단적 소통은 부단히 전개되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각자는 독자적인 음악적 취향을 형성하고, 그 취향은 삶에 대한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취향의 형성은 다기한 투쟁의 결과물이고, 따라서 가변적이다. 80년대에 행진곡풍 민중가요를 주창하던 사람들이 90년대 들어와서 난데없이 록 음악을 들고 나오는가라는 뜨악한 시선에 대해서도 변명은 가능하다. 필자는 80년대와 90년대를 이분법적으로 비교하는 시도에도 찬성할 수 없지만 두 시대의 사회적 컨텍스트가 다르다는 점을 부인하는 시도에도 찬성할 수 없다. 우리는 계승과 단절의 모호한 경계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대중음악의 많은 스타일 중에서 록 음악을 굳이 특권화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현재까지 대중음악의 역사를 반추할 때 록 음악이 상대적으로 경험과 투쟁의 장을 가장 많이 개방했다는 판단에서 연유한다. 재즈, 소울, 컨트리의 경우 경험의 장은 이제는 협소하고 폐쇄적이고 '컬트'적이게 되어 버렸다. 반면 록은 특유의 운동을 통해 대중음악의 영토에 개입하여 다른 스타일과 유연하게 '퓨전'되어 새로운 생성의 운동을 전개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즉, 록은 그자체로 저항적인 것이 아니라 저항을 개방하는 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아주 드문 시기지만 록은 대중음악의 영토로부터 탈주('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하여 새로운 창조를 낳을 수 있다. 물론 록의 탈주의 운동은 정형화된 하위장르가 되어 대중음악의 영토 속에 안주('재영토화(reterritorialization)')할 수도 있고, 자멸적인 파괴와 소멸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 모든 위험(risk)을 감수하면서 창조적 돌파의 계기를 찾아나서는 것이 록의 게릴라들의 과제이다.

물론 앞으로도 록이 대중음악의 게릴라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새로이 등장할 게릴라도 록과 전혀 무관한 스타일은 아닐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ROCK ON!

<참고문헌>

김지영(1995), [이상의 시대, 반항의 음악], 문예마당.
노염화(1996), [록은 여전히 혁명적 소음인가], [오늘예감] 5호.
서동진(1993), [록, 젊음의 반란], 새길.
신현준(1993), [존 레논 : 이매진, 세상으로 만든 노래], 새길.
임진모(1993),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문예마당.
임진모(1996), [록, 그 폭발하는 젊음의 미학], 창공사
"묘지의 축제, 얼터너티브라는 이름의 값싼 물신", [연세대 대학원 신문], 1995.10. 11.
T.Bloomfield(1992), "It's Sooner Than You Think, or Where Are We in the History of Rock Music?", New Left Review no.190, 1991. nov/dec.
J. Carducci(1990), Rock and the Pop Narcotic, Chicago : Redoubt Press.
J.Eisen ed.(1969), The Age of Rock : Sounds of the American Cultural Revolution, New York, Random House.
S.Frith(1983), Sound Effect, Youth, Leisure and the Politics of Rock'n'Roll, London, Constable.
S.Frith(1988), Music For Pleasure : Essyas in the Sociology of Pop, London, Polity Press.
C.Gillet(1970), The Sound of the City : The Rise of Rock and Roll, Outerbridge & Dienstry, New York.
L.Grossberg(1992), 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 : Popular Conservatism And Postmodern Culture, New York, Routeledge.
D.Harker(1980), One For The Money : Politics and Popular Song, London, Hutchinson.
F.Jameson(1988), "Postmodernism and Consumer Society", in E.Ann Kaplan ed., Postmodernism and Its Discontent, London, 1988
D.Kellner(1995), Media Culture, London & New York, Routelege
T.Kirschner(1993), "The Lalapalooziation of American Youth", Popular Music And Society, Fall 1994.
J.Lull ed.(1992), Popular Music and Communication, London, Sage.
D.Marsh(1995),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ATN .
G.Marcus(1975), Mystery Train : Images of America in Rock'n' Roll Music, A Plume Book.
G.Marcus(1989), Lipstick Traces : A Secret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Massachusetts, Havard University Press.
R.Middleton(1990), Studying Popular Music, Milton Keynes, Philadelphia, Open Univ., 1990.
Rolling Stone Editors(1980), Rolling Stone Illustrated History of Rock'n' Roll 1950-1980(revised &  updated), Random House/Rolling Stone Press Book.
R.Shuker(1994), Understanding Popular Music, Routeledge, London.
D. Weinstein(1991a), Heavy Metal : A Cultural Sociology, New York, Lexington.
D. Weinstein(1991b), "A Sociology of Rock : Undisciplined Discipline", Theory, Culture & Society, 8.

 

 * 무크지 <이다>에 게재됨.

 

 

앞화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