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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여기서 록의 신화는 가능한가(2)

80년대 이전에 대중음악은 "음악도 아닌 것(less than music)"으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대중음악은 "음악 이상의 것(more than music)"으로 취급되고 있다. 대중음악이 고상한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대중음악의 사회적 영향력이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유행가'나 '가요'같은 자조적인 표현이 서서히 소멸하고 있는 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듯 대중음악에도 '평론'이란 것이 발생했다. 물론 이전 시기에도 '가요평론'이나 '팝 칼럼'이 있었다. 그렇다면 달라진 점은 무엇일까? 달라진 점은 글쓰기의 '수준'이라기 보다는 글이 전제하고 있는 '입장'이다. 대중음악에 관한 글쓰기는 음악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저자의 입장을 드러내는 전투가 되었고, 평론가들은 마치 글쓰기의 영역에서 음악인들의 대리전을 치르는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대중음악은 문화의 영역에서 정치 투쟁이 지속되는 전장(戰場)이 되었다.

대중음악 평론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는 장르는 단연 록 음악이다. 몇 년이 지나간 지금 일군의 평론가들은 록 음악에 '젊음의 폭발적 저항'이라는 속성을 부여하면서, 마치 록 음악이 대중음악의 유일한 진보적 대안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아마도 이것이 현재의 지배적인 록 담론일 것이다.

록의 신화 : 60년대 아메리카

아직은 이런 담론이 왜 그리고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냉정하게 분석할 때가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80년대가 막을 내리는 시점에 엄습한 정신적 공동화(空洞化) 상태를 '록 = 청년 = 저항'이라는 항등식이 항등식이 메웠다고 어림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항등식은 '저항 = 진보'라는 또 하나의 '80년대적' 항등식에 의해 보완되었다. '노동의 정치학'이 의심받기 시작하던 순간 록 담론은 '여가의 정치학'이라는 대안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한국의 록 담론은 어설프고 급조된 것이었다. 풍부한 직접적 음악적 경험도, 체계적인 연구나 조사도 미비한 상태에서 출발한 록 담론이 다양한 반작용에 직면하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작용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현재의 록 담론이 30대 지식인의 무기력한 노스탤지어라는 반응이고, 둘째는 음악적 텍스트와 글쓰기가 괴리되어 정작 음악에 대한 논의는 부재한 채 사회문화적 컨텍스트만을 논한다는 반응이고, 셋째는 록 음악의 실체가 부재한 상태에서 말만 무성하다는 반응이다.

이런 반응들은 부당한 면도 없지 않지만 쉽게 무시할 수도 없는 지적들이다. 한마디로 말해 현재의 지배적 록 담론은 신화학(mythology)에 빠져 있다. 그것은 과거 어디선가 이루어졌던 현상을 이상으로 설정하여 그것을  지금 여기에 투사한다. 그런데 신화학은 '나쁜' 것일까? 좋고 나쁨을 가리기 앞서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60년대 미국'의 상황에서 많은 록 뮤지션들은 자연발생적 저항을 분출하고, 예술적 자기표현을 달성하고, 거대한 부와 명성을 획득했다. 저항과 예술과 장사의 황홀한 3위일체는 너무도 매력적이고, 그저 좋았던 옛 시절로 방치하기에는 아깝다. 60년대를 '이상(유토피아)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런 의미에서이다. 유토피아란 원래 본래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곳(nowhere)이란 뜻이라고 한다. 말장난을 하자면 60년대 미국에서 no where는 다른 한편으로는 now here이기도 했다. 지금 여기에서의 저항은 아무 곳에서 존재하지 않을 듯한 아름다운 예술적 성취감과 물질적 풍요를 안겨 주었다.

록은 죽었다!

그렇지만 '60년대 미국'이라는 상황을 벗어나면 유토피아는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다. 위의 항등식은 부등식이 되어 버린다. 록은 그 추악한 이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먼저 시간을 벗어나 보자. 70년대 이후 예술과 저항은 분리되기 시작했고, 각각은 상업주의와 불편하지 않게 결합되어 상업적 대중음악의 주류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아주 거칠게 말한다면 요약한다면, 하드 록/헤비 메탈은 저항을 상업화했고, 프로그레시브 록/아트 록은 예술을 상업화했다. 저항과 예술이 분리되고 상업주의가 양자를 관통하였다.

이때의 록 음악은 저녁 무렵 AFKN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 쉽게 접할 수 있다. 틀으면 쉽게 들을 수 있다. 60년대 중반 - 70년대 중반의 록 음악은 클래식 록(classic rock) 혹은 앨범 록(album-orieted rock)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고, 그들 가운데 몇 개의 명곡들은 일주일에도 서너번씩 들을 수 있다. 한 때 그토록 거칠고 공격적이고 충격적이었던 음악은 이제는 아주 세련되고 정겹고 향수어리게 들려온다.

'고전'은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와 다르다. 올디스는 무척 촌스럽지만 어쩌다가 들으면 좋은 음악이지만, 클래식은 세월이 흘러도 불멸의 가치를 갖는 음악이다. 이상의 시대는 불멸의 클래식으로 영원히 남게 되고, 한때 그토록 가변적 운동을 전개했던 록은 이렇게 화석화되어 버렸다. 록의 시대는 갔고, 록은 죽었다.

회고적인 평가지만, 만약 '록의 정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저항과 순응의 변증법, 그리고 주류와 대안의 변증법이다. 록의 신화가 추한 측면을 어물쩡 덮어두고 한 측면만을 미화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상의 시대인 60년대는 두 측면이 모순 없이 원만하게 결합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상 유례없는 풍요의 시대의 산물이었고, 영원히 이상적 모델로 삼을 수는 없다. 죽은 자에 대한 미련은 산 자가 할 짓은 아니다.

신화 벗기기와 록 살리기

그런데 록은 정말 죽은 것일까? 분명히 80년대의 청년들은 록 보다는 메인스트림 팝과 랩.힙합에 가까워졌고 록은 더 이상 '저항의 음악'을 대표하지 못했다. 더구나 록 = 청년 = 저항이라는 항등식이 파괴된 현상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밑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미디(MIDI), 샘플러 등으로 물질화된 뉴 테크놀로지, MTV 등으로 물질화된 뉴 미디어는 음악과 음악인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뒤흔들었다. 한 예를 들어 '샘플링' 기법은 진정한 음악, 창조적 음악이라는 개념마저 흔드는 것이다.

여기서 록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기타 중심적 음악(guitar-based music)인 록은 일렉트릭 시대의 총아였다. 그러나 일렉트로닉 시대의 단절은 록을 구닥다리 음악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청년 세대들은 록커들을 블루스멘이나 재즈 뮤지션처럼 취급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기술결정론'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대안적 사고도 가능할 것이다. 낡은 신화에 집착하여 '록의 부활'을 꿈꾸지도 않고, 신화를 버리면서 록을 형해화시키지도 않을 수는 없을까? 달리 말해, 부단히 새롭게 생성하고 재구축하는 운동이 전개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까?

그 운동이 존재한다면 그것에 잠정적으로 '얼트(얼터너티브)'라는 이름을 붙여 보자. 단 조건이 필요하다. 더 이상 록의 고정된 실체를 찾아 헤매지는 않는다는 조건. 그런 의미에서 록 명목론자(nominalist)라는 옵션을 걸어 보자.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라고 고민하면서 신의 실체를 확인하려 했던 신학자들의 노력이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듯, 그리고 화폐라는 베일에 싸인 실물의 세계를 탐구하려 했던 경제학자들의 노력이 대체로 무용하듯, 록의 고정된 실체와 불변의 속성을 찾아 헤매는 시도는 어리석은 일이다. 입으로는 '불변의 록 스피릿'을 외치면서 전혀 엉뚱한 음악을 만드는 경우는 주위에 너무도 많다. 이와는 반대로 록을 고집하지 않으면서도 가변적 생성이라는 록의 감성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죽었다'고 말한 것은 록 그자체라기 보다는 록에 관한 특정한 개념, 이제는 불변의 고정관념이 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보았듯 록의 역사는 아름다운 만큼이나 추악하지만, 적어도 저항을 개방하는 미덕을 가졌다. 그러나 개방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록의 감성, 록의 정치가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면, 저항과 투항, 주류와 주변 사이의 원만한 변증법을 거부하면서 창조와 돌파를 단행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록의 역사는 적어도 당분간 더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항등식은 부단히 재정의되고 변형되는 방정식이 된다.

한국에서 록 죽이기
 
그런데 공간을 벗어나면 록의 신화는 더욱 산산이 파괴된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록 음악은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곳에서는 대중음악의 지배적 조류가 아니었다. 특히나 한국에서 록은 한 번도 화려하게 개화해 보지 못했다. 그 이유를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별다른 논거 없이 한국인은 멜로디를 유달리 좋아한다는 등의 국민성을 내세운다.

그런 보편적 주장에 반대할 '보편적' 논거는 없다. 그렇지만 더욱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이유가 있다. 70년대 중반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되면서 관계기관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한 인사들 중에는 반체제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결과 실험적 뮤지션들은 전멸했고, 록이든 뭐든 대안적인 음악은 모두 싹을 잘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록 음악이 청년 하위문화의 불가분한 요인으로 자리잡을 기회도 사라졌다. 한국에서 록은 미국이나 영국은 물론이고 같은 제 3세계 나라들인 라틴 아메리카나 동남아시아에 비해서도 척박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록의 신화는 완성된 이상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미완의 이상에 대한 회한으로 존재한다. 순전히 가설적인 이야기지만 정치적 탄압이 없었고 록 음악이 청년문화의 중심적 요소로 자리잡았다면 신화는 조금 작아졌을 지 모른다. 만약 그랬었다면 한국에서도 록의 정치가 존재했을 것이고, 아름다운 신화 뿐만 아니라 추한 현실도 모두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따라서 한국에 생존했던 유일한 록 문화는 호사한 '매니아 문화'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록은 거리나 클럽이 아니라 침실로부터 울려나왔다. 록은 깊은 밤 침실에서 이어폰을 끼고 듣는 비밀스러운 음악이 되었다. '이런 훌륭한 음악을 우리는 왜 쉽게 구해 들을 수 없을까'가 록 감상자들의 절박한 바램이었다. 중산층청년의 침실은 록의 '게토'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반면 록의 전통적 개념을 허물어 뜨리는 과정은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았다. 한국은 보이즈 투 멘의 음반 판매량이 세계 2위를 기록하는 현상에서 보듯, 메인스트림 팝이 예외적 강세를 보이는 나라이다. 또한 뉴 테크놀로지와 뉴 미디어는 파죽지세로 도입되어 이미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다. '록 죽이기'는 부드러운 외양을 취하면서 착착 진행되어 왔다.

록 살리기 : 신화 파괴와 생성의 운동
 
20년에 걸친 록 죽이기의 결과 '댄스음악 = 청년 = 순응'이라는 견고한 항등식이 지배하는 주류 대중음악의 획일적 구도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제 너무도 뒤늦게 주류에 대한 대안으로 록에 대한 '실체 없는 담론'이 출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20여년 동안 한국에서 록은 패잔병이었다. 따라서 스스로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싸움을 전개할 장도 마련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에 처해 버렸다. 대중음악의 장르와 공간이 다양화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는 아마도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 꼭 심각하게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도 작지만 소중한 자산이 이미 존재한다. 한편으로 서태지, 삐삐밴드, 패닉 처럼 록의 감성을 가지고 주류의 장에 진입하여 '불가능한 작전'을 수행하는 시도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시나위나 크래쉬처럼 정공법으로 록의 대중적 장을 확장하려는 보다 중요한 시도가 있다. 또한 안치환이나 강산에처럼 포크의 전통을 록의 어법과 융합하려는 시도도 있다. 가시적인 것 외에도 더많은 대안들이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이 모든 시도들은 '더많은 대안(more alternatives)'를 위해 상호증식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국지적 규모에서 전개되는 다차원적 저항, 그리고 차이의 승수화(multiplication)를 통한 연대이다. 이 잠재적인 연대가 현실화될 때, 록 = 청년 = 저항이라는 낡은 신화는 파괴되고 새로운 창조의 분출이 전개될 수 있다.

이는 또 하나의 신화일까?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낡은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불변의 모든 신화를 항상 거부하고 파괴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신화는 오직 돌파하기 위한 제약으로 인식될 때만  존재의 근거를 가진다.

 

* 월간 <Imazine>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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