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 대중음악과 '역사의 종언'

1. 음악과 시간

음악과 역사라는 테마는 낯설어 보입니다. 물론 음악의 역사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가 있지만, 음악이라는 예술 형태는 다른 예술 형태들에 비해 '초역사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의 생산과 소비를 당시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기초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설명을 '속물적'인 것이라고 경멸합니다. 그런 점에서 음악 미학은 비사회학적이고, 음악 사회학은 비미학적입니다.  

여기가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질 자리는 아닌 듯합니다. 단지 이는 현대의 대중 음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고전음악에 비해서 현대의 대중 음악은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한 '결정'이 더욱 확연합니다. 즉, 대중 음악이란 대량생산되고 대량생산되는 '공산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들을 때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대중 음악의 경우에도 여전한 사실입니다.

대중 음악의 사회 이론의 선구자이자 권위자인 영국의 학자 사이먼 프리스(Simon Frith)는 이를 대중 음악의 기능 중의 하나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대중 음악은 "대중적 기억을 형성하고 우리의 시간에 대한 지식을 조직한다(Frith, p.142)"는 중요한 기능을 가집니다. 조금 더 부연 설명하면 '좋은' 음악의 척도는 "그것의 '현전(presence)', 시간을 '정지시키는' 능력"(Frith, p.142)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정지시키는 능력이란 "과거에 무엇이 왔고 미래에 무엇이 올 것인가에 대한 기억이나 근심을 없애고 우리가 하나의 순간에 살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능력"(Frith, p.142)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록 음악이나 댄스 음악을 들을 때 음악의 연주시간(running time)이 얼마인가라기 보다는 분당 비트(b.p.m.) 수가 얼마인가를 더욱 중요시하게 됩니다. 이런 시간관은 분명 '실시간(real time)'과는 다른 것입니다.

물론 음악을 듣는 일을 끝내고 실생활로 돌아오게 되면 우리는 다시 정상화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상이한 시공간에 있다는 환상이 발생하게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환상에서 음악은 서구의 경험에서 '역사를 종언시켰던' 몇 번의 경험이 있습니다. 이는 서구인의 뿌리깊은 상징체계인 천년왕국(millennium)이나 묵시록(apocalypse)의 비전과 관련되어 전개되었습니다. 단지 시간이 정지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 끝났다는 전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 글은 그 중에서 비교적 가장 가까운 예들 몇 개를 들어서 설명하는 초보적인 시론입니다. 저는 주로 세 가지 예를 들고자 하는데, 하나는 1960년대 히피(hippie)의 싸이키델리아(psychedelia)이고, 둘째는 1970년대 펑크(punk)의 아나키(anarchy)이고, 셋째는 1980년대 말 - 1990년대 초 레이브(rave)의 의 테크노페이거니즘(technopaganism)입니다. 이런 현상을 어떤 각도에서 조망해야 하는가, 나아가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검토가 끝난 마지막에서 검토하고자 합니다.

2. 히피와 싸이키델리아

싸이키델리아의 3가지 원천들

오늘날 우리는 히피 반문화에 대해 어떤 초상을 가지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우파'의 견해는 히피 반문화를 미국의 퇴폐 문화라고 간단히 규정짓습니다. 즉, 약물 및 섹스와 연관된 나태하고 방종한 문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어느 정도 '좌파'와도 공유하는 부분입니다. 1980년대 민중운동의 총체적 반미성향은 1960년대 초반의 흑인 민권운동과 반전운동 등 뉴레프트 정치운동의 제한적 가치만을 인정했고, 그 뒤의 과정은 이러한 건강한 민중운동이 타락한 것, 혹은 정치운동이 탈정치화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기성의 감정과는 거리를 두고 재조명할 때가 된 듯합니다. 그를 위해 그때의 경험에 조금 가까이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히피 반문화에 대한 연구는 많이 있지만 대중 음악(및 대중문화)와 관련하여 정리한 영국의 문화연구가 이언 챔버스(Iain Chambers)의 {도시의 리듬들 : 팝 음악과 대중문화 Urban Rhythms : Pop Music And Popular Culture}를 안내자로 삼아 30년전의 아메리카를 찾아가 봅시다.

1967년 미국의 서해안인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 애시베리에서는 벌거벗다시피한 히피들이 머리에 꽃을 꽂고 '사랑의 여름'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섹스, 드럭, 록 음악'의 3위일체 하에서 사랑과 평화를 외쳤습니다. 여기서 섹스는 실제의 이성애적 성교이고, 드럭은 마리화나와 LSD 등 정신작용을 이완시키는 약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록 음악이란 엄밀히 말하면 싸이키델릭 록 스타일을 의미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현대사의 분수령이라고 할 만한 이 시대의 '혁명'의 형태와 성격을 검토하기 앞서서 록 음악에 대해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록 음악은 1950년대의 리듬 앤 블루스, 그러니까 흑인 대중 음악으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본래는 흑인의 대중 음악이었던 리듬 앤 블루스가 백인 청년들에 의해 영유되면서 로큰롤 rock'n'roll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50년대의 로큰롤이 록 음악의 원형인 셈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로큰롤은 댄스 광란(dance craze)과 연관된 청년들의 세속적 쾌락주의의 산물이자 반영물이었습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언론의 반응은 "어젯 잠 리듬에 미친 10대들이 도시에 테러를 가했습니다"는 것이었죠. 즉, 로큰롤과 연관된 청년문화는 선후의 '소비자본주의'의 여가문화의 일종이었습니다는 점입니다. 이는 미국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보다 결정화(結晶化)된 청년 하위문화(youth subculture)로 나타났는데 형태와 지향은 다르지만 로커(rockers)라든가 테디(teddies)같은 것이 그 좋은 예들입니다. 여기서 이들을 상론할 수는 없고 또 하위문화라는 개념이 현재도 얼마나 타당한 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소개는 다음 절에서 뒤에 펑크에 대해 살펴보면서 간략히 언급하는 정도로 정도로 그치겠습니다.

단지 펑크 이전의 청년문화인 이들의 하위문화는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 아침까지의 제한된 시간 동안의 '해방'이었습니다는 점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노동과 여가의 구분, 그에 따는 요일별 리듬(weekly rhythm)과 긴밀하게 연관된 것이었고, 이 구분을 해체한다든가 넘나드는 지향은 아직 이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1960년대에 히피들이 즐겨듣던 싸이키델릭 록은 1950년대의 로큰롤과는 약간 다른 두 개의 기원을 가집니다. 그 중의 하나는 포크송 운동이었습니다. 냉전 시대 이후 미국은 전통적 좌파 운동의 불모지가 되어 버렸지만, 1930-40년대의 대불황 시기에는 급진적 좌파 운동이 꽤 활발했습니다. 이 급진주의자들은 경제적 빈곤, 그리고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구전 민중문화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한동안의 잠복기를 거쳐 1950년대의 '포크송 리바이벌' 운동을 나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런 구전 민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분히 산업사회에 대한 반발을 내포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산업적인 아메리카에 대항하여 공동체적이고 유기적인 아메리카를 희구했고, 도시 문명보다는 농촌에 대한 향수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의 주제로 말씀드린다면 산업사회의 반자연적 리듬(anti-natural rhythm)과 시간성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습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다른 하나는 1950년대 뉴욕의 지식인 써클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비트(beat) 문화입니다. 이들 역시 '아메리칸 드림'과는 거리를 두면서 '사회의 인위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단지 포크 운동과는 달리 이들 비트닉(beatnik)들은 개인적이고 예술가적이고 보헤미안적이었습니다. 비트닉들은 이른바 '비트 시인'들인 알렌 깅즈버그 Allen Ginsburg, 윌리엄 버로우스 William Burroughs, 잭 케루악 Jack Kerouac, 그레고리 코르소 Gregory Corso 등을 중심으로 전위적인 시 낭송회를 갖는 등 개별적이고 제한된 틀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후대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쿨 재즈와 마리화나, 그리고 선불교 등 동양 신비주의를 자신들의 사상과 혼합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집단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았고 고립된 예술가 써클에 머물렀습니다.

1960년대, 그리고 히피 반문화는 이런 세 가지 상이한 흐름들이 조우하면서 형성되었습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포크송 운동은 1960년대 초 미국 남부에서 꿈틀대던 흑인민권운동과 각지의 캠퍼스에서 전개된 베트남전 반대운동의 송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기성의 아메리카, 허위(false)의 아메리카와는 '다른(other)' 아메리카, '진정한(authentic)' 아메리카를 추구하는 모든 흐름들이 밀접하게 합류했습니다. 흑인 음악인 블루스의 진실(truth), 시골 음악인 컨트리의 뿌리(roots), 공동체 음악인 포크의 순수(purity) 등이 록 음악에 새로운 영감을 제공한 것이지요. 알렝 겡즈부르와 잭 케루악은 밥 딜런과 그레이트풀 데드로 대체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개념은 1960년대 이후 미국의 문화와 예술을 아우르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싸이키델리아 : 대안적 생활양식의 체험

문화적 아이콘의 이동은 공동체적 진정성으로부터 개인적 진정성으로의 이동을 나타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회적 관심이 개인적 관심으로 이동한 것이지요. 이런 자의식의 도입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컬트' 사상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티모시 리어리  Timothy Leary입니다. 1920년 생인 리어리는 당시 하바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멕시코를 여행하는 도중 우연히 LSD를 접하게 되어 그것이 '정신의 해방'에 미치는 가능성을 확인하고는 미국에 돌아와 자신의 강의에서 교보재로 LSD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LSD는 의학 용어로 Lysergic Acid Diethylamid의 축약어로서 1943년에 알베르트 호프만 Albert Hoffman 이라는 의사가 며칠 전 우연히 삼켜버렸다가 다소 이상한 체험을 한 뒤 스위스 바젤의 도로를 따라 상상의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면서 개발되었습니다고 합니다. 그 후 한 세기가 지나자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이 약은 문화혁명의 원료가 되었습니다. 혹자에 따르면 LSD는 가장 강력한 환각제로서 부드러운 감각적 왜곡으로부터 종교적 경험의 극치에까지 이르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배열의 효과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경계를 해체하고 경험을 향상시키는 물질이라는 것이 LSD 옹호자들의 주장입니다.

리어리는 LSD 옹호자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특히 그가 1964년에 발간한 <<싸이키델릭의 경험 : 티벳 자자의 서에 기초한 매뉴얼 The Psychedelic Experience : A Manual Based On The Tibetan Book Of The Dead>>이라는 책은 문자 그대로 '매뉴얼'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 대학 당국으로부터 쫓겨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지만, 여기서 주장한 "Turn On, Tune In, Drop Out"이라는 슬로건은 1960년대 말의 반문화 운동의 정언명령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약물 여행(trip)이 싸이키델리아의 중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싸이키델릭한 체험이 가장 융성했던 샌프란시스코였습니다. 뉴욕의 비트 시인들 중 긴즈버그와 코르소도 샌프란시스코로 이사왔고, 거기서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비트 시인들인 케네스 렉스로스  Kenneth Rexroth, 로렌스 펠링게티 Lawrence Ferlinghetti, 게리 스나이더 Gary Sneider 등과 합류하였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66-7년 경부터 음악과 쇼와 댄스를 혼합한 콘서트가 종종 열렸는데, 이것이 바로 '싸이키델릭 록 혹은 애시드 록'의 시초를 이루는 셈입니다(참고로 애시드란 LSD의 속어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매체들을 혼합하면서 이들은 주류 아메리카의 이성적인 생활양식보다 더욱 '진정한', 더욱 '깊은' 이성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반문화는 직접적인 정치적 저항으로부터 '대안적 생활양식(alternative lifestyle)'의 추구로 이동하였습니다. 음악의 효과는 신체적 쾌락으로부터 '머리(head)' 속으로, 즉 정신 지각으로 집중되었습니다. 리듬은 유동(flux)로, 비트는 바이브(vibe)로 대치되었습니다. 즉, 당시의 관념은 '좋은' 음악의 척도는 싸이키델릭한 정신적 효과를 낳는것이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 글의 핵심 논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1950년대 로큰롤처럼 록 음악이 댄스음악이었던 시절에는 댄스 비트가 안겨주는 신체적 쾌락이 정언명령이었습니다. 즉, 노동 시간에는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시간 분할에 기초하여 생활합니다가, 여가 시간에는 로큰롤의 흥겨운 리듬에 맞추어 시간이 정지한 듯한 쾌락을 맛보는 것이 전후 소비자본주의의 생활양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포크와 비트의 이데올로기가 개입하면서 히피들의 '여행'은 단지 포크처럼 순수한 상태로의 회귀도 아니고, 비트닉의 비트닉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여행도 아니게 되었습니다(혹은 둘 다였습니다). 이들의 '여행'은 공개적인 '프릭 아웃(freak out)', 한 논자의 표현을 빌자면 "길에서 일탈하여 보다 넓고 보다 이상한 무언가를 향한 참여의 여행"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싸이키델릭 록은 여전히 일렉트릭 기타를 중심으로 한 사운드였지만, 이는 블루스처럼 궁극적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싸이키델릭 록 사운드는 긴장보다는 이완되는 것은 특징으로 했습니다. 템포는 전반적으로 느렸고 연주는 즉흥적으로 연주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팝 음악과는 이질적인 음악 언어들, 예를 들어 클래식, 재즈, 아방가르드, 동양 음악 등을 급속히 쇄도했고, 그 결과 록 음악은 이제 배경 음악이나 댄스 음악이 아니라 반문화의 중심적 '경험(experience)'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많은 음악들은 밀접한 주의를 기울이며 들어야 했고, 책이나 약물같은 문화적 '텍스트들'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싸이키델릭 록과 LSD 뿐만 아니라 신비주의, SF적 외계, 요술(sorcery) 등이 참고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정신적/정치적 '혁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체험되어야(lived)' 했고, "최초의 혁명은 너의 머리 속에 있습니다"는 것이 당시의 정언명령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신체적 감각은 새로운 지적 질서에 따라 측정되었고, 이 경험들의 '진정성'은 상이한 기준들을 사용하여 발견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 기준 의 하나가 이른바 '어머니 대자연(Mother Nature)'입니다. 어머니같은 대자연의 리듬에 맞는 삶을 체험하는 것이 혁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도시문명, 산업사회의 반자연적 리듬 하에서 살아가는 '아메리카적 생활방식'은 거부되었습니다. 구슬(bead), 녹비(buckskin), 머리띠, 노루가죽신(moccasin) 등의 장신구들을 자주 사용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백인, 아메리카인을 죽여라(Kill The White Man, The American In Me)"는 게리 스나이더의 슬로건이 당시의 지배적 감성을 표현해 줍니다.

그런데 아이러닉한 것은 히피들이 점차 '서부인 Westerner'을 진정한 아메리카인으로 사고하면서 그 속에서 대안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는 점입니다. '상실된', '농촌의' 아메리카 공동체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히피들은 이런 공동체에서 집단적으로 숙식하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지저분하고 게으른' 생활이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인디언, 카우보이, 비트닉 등을 자신들의 모델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단지 유럽 뿐만 아니라 유럽화된 서구로부터 탈출하여 본래의 태고의 아메리카로 들어가는" 존재로 간주되었고, '아메리카의 진정한 영혼', '본래의 아메리칸'으로 신화화되었습니다.

꿈이 폭발한 뒤

대략 1966년부터 1969년 사이의 시기에 '탈정치적'인 히피들의 반문화는 정치적인 좌파 운동과도 결합되기도 했습니다. '정직한 빈곤'에 기반한 대안적 생활양식의 건설이라는 히피들의 유토피아와 뉴레프트의 보다 전통적인 정치들 -- 예를 들어 사상과 지식의 자유 캠페인,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흑인 민권운동 등 -- 이 공생하는 시기였던 것입니다. 즉, 한 극단으로 히피들에 영향받은 뉴레프트인 이피(Yippies)들의 개입적인 '쉬르레알리즘'적 정치의 개입이, 다른 한 극단으로는 자족적인 '프릭'의 은둔이 있었고, 이 양극 사이에서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옵션들이 존재했습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바입니다. 개인적 희열을 맛보는 것 이상의 모든 것은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던 골수 프릭들은 더욱 더 심오한 자의식의 바다로 침잠해 들어갔고, 좌파 정치는 정부의 폭력적 탄압에 맞서 때로 폭력적인 양상을 띠면서 쇠퇴해 갔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반추해 본다면 히피 반문화는 노동과 여가, 쾌락과 일상 사이의 구분에 급진적인 의심을 품었던 최초의 운동으로서의 의심을 품었습니다는 가치를 가집니다. 즉, 이제까지 당연시했던 분할을 재고하면서 총체적 경험을 통해 문화와 사회를 통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이 모든 프로젝트를 고립된 개인의 정신세계 속에서 추구했습니다는 점입니다. 즉, 정신성은 집단적 체험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개인의 머리 속에 재영토화된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영국의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은 히피 반문화를 "아메리카 개인주의의 극단적 변종"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논점과 관련하여 사고해 본다면 히피들은 역사를 '생활양식의 역사'로 간주하고 그 역사를 종언시키고 태고의 자연상태로 회귀하는 행동에서 대안을 찾았습니다. 즉, 도시, 산업, 테크놀로지를 총체적으로 거부하는 지향은 자연적 리듬을 발견하려는 지향을 강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히피즘 특유의 전원주의(pastorialism)가 탄생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깊게 볼 점은 이들에게 역사란 여전히 '서구-백인-남성 중심의 역사'라는 점입니다. 즉, 이들에게 비서구 사회는 '역사없는' 사회로 비쳤고, 자연은 남성적 문명에 비하여 여성적인 것으로 비쳤습니다. 그렇다면 참 아이러닉하게도 서구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는 히피들에게도 변형된 채 유지된 셈이 아닐까요? 이들이 이 등식을 총체적으로 거부했습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지적한다면 근대적 시간 분할을 넘어서려는 것으로 출발한 이들의 운동은 곧 구체성을 잃고 역사의 진행을 한꺼번에 역전시키려는 무모한 유토피아의 추구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운동은 너무도 총체적이고 근본적이었습니다. 반면 그렇게 총체적이고 근본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혁명을 오직 '개인적으로', '머리 속에서', '싸이키델리아에서' 달성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의 혁명의 내용은 총체적이고 전면적이었지만, 그 형식은 극히 파편적이고 고립적이었습니다. 히피들이 사회의 전통적 마이너리티들, 예를 들어 여성이나 흑인에게 무관심했던 것은 이 점과 무관치 않은 듯합니다. 앞서 본 히피들이 이상으로 삼은 모델들도 모두 '백인 남성'들이지요...

결국 이들의 대안적 생활양식, 태고의 역사없던 시절로 퇴행하는 생활양식은 다양한 '현대적' 생활양식들 중의 하나로 정착하는 모순된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1960년대에 문명 전체를 거부하고 그 외부로 도피하려던 대학생들 대부분은 나이가 들게 되면서 반기성적 지향을 갖춘 멋쟁이들로 변신했습니다. 이들 히피 생존자들은 대부분 다시금 문명의 포로가 되어 미국 쇼비즈니스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일원이 되었습니다. 물론 골수 히피들은 부랑자가 되거나, '인간잠재력 운동 human potential movement'같은 탈정치적 운동, 아니면 동양 신비주의 단체에 입교했지만, 얼치기 히피들 중에는 여피가 되어 시장의 힘과 소비자주의를 찬양하는 신보수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동맹자가 된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물론 히피들의 친자연적 전원주의의 유산은 생태주의 운동(ecologist movement)라는 중요한 흐름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운동 역시도 은둔적이고 탈정치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점은 공통적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뉴 에이지 트래블러 New Age Travellers, 스쿼터스 Squatters, 크러스티스 Crusties, 미국의 블리서스 Blissers, 데드헤즈 Deadheds, 페어리스 Fairies, 투어리스츠 Tourists 등은 아직도 남아 있는 친생태론적 히피 생존자들의 단체들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골수 히피 생존자들 앞에서 붙는 수식어는 '멋지고 상큼한 hip, cool'으로부터 '늙고, 따분한 old, boring'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 수식어를 가장 처절하게 부른 이들이 바로 1970년대 후반의 펑크(punks)입니다.

3. 펑크와 아나키

펑크와 상황주의

펑크는 1970년대 후반, 정확히 말하면 1976년 11월 섹스 피스톨스 Sex Pistols라는 밴드에 의해 촉발된 영국 프롤레타리아 청년들의 반란의 이름입니다. 물론 펑크의 기원은 영국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펑크가 '폭발'한 곳이 영국이라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펑크는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평등주의적 DIY(Do It Yourself)의 에토스를 내세우면서 대중 음악의 판도를 급격하게 재편하는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글은 세평과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야 할 듯합니다.  펑크의 주역인 영국 프롤레타리아 청년들에게 특별한 '사상'이나 '지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펑크는 반지성적 운동으로 비쳤음에도 불구하고, 펑크는 지식인들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고 평가에 평가가 거듭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펑크가 노동계급 청년들의 '원초적', '자연발생적' 반란이라는 측면 외에 지식인들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섹스 피스톨스의 매니저를 맡았던 맬컴 맥클라렌 Malcom McClaren이 상황주의 Situationism라고 불리는 현대 아나키즘의 급진적 변종의 일원이었습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맬컴 맥클래런과 더불어 펑크에 개입했던 사상가들, 예를 들어 재미 라이드 Jammy Reid, 프레드 버모렐 Fred Vermorel 등은 모두 아트 스쿨 출신의 지식인들이었는데, 이들이 무정형적이었던 펑크 운동에 일관된 사상을 공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명의 지식인들은 모두 1968년 5월 봉기에 참여했던 인물들이고 상황주의에 영향받은 영국의 세포인 킹 몹 King Mob의 일원이습니다. 유럽의 1968년은 미국의 1967년과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를 잠시 검토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1968년 봉기 그리고 그 봉기에 참여했던 정파인 상황주의의 중심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정확히 말하면 파리)였습니다. 탈정치적이었던 미국의 히피들에 비해 프랑스의 대학생들은 과잉정치적이었습니다. 1968년 5월 당시 당시 파리의 벽에는 "일[노동]하지 말라...보도 밑에는 해변이 있다...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는 그래피티가 쓰여 있었습니다. 물론 기 드보르 Guy Debord 등이 대표한 상황주의자들은 1968년 5월에는 '소수파'였습니다. 봉기를 주도했던 것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둔 뉴레프트들의 급진적 정파들었고, 이들은 레닌과 스탈린이 아니라 트로츠키, 체 게바라, 마오 쩌 뚱을 '컬트'로 삼았습니다.

파리보다 규모나 파장은 작았지만 영국에서 1968년 봉기를 주도한 인물들은 보다 전통적인 정치적 뉴레프트 활동가들인 타리크 알리 Tariq Ali, 로빈 블랙번 Robin Blackburn 등이었습니다. 이 중 로빈 블랙번은 뒤에 {신좌익 평론 New Left Review}의 편집장을 역임하면서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인물입니다. 가장 과격한 분파였던 킹 몹의 소속원들은 이들 뉴레프트의 '주류'로부터는 다분히 소외된 존재들이었습니다.
상황주의자들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본다면, 이들은 소수의 예술가 집단으로 구성된 아나키스트 전위 집단입니다.

1952년 파리에서 '문자주의 인터내셔널(letterists International)로 출발했습니다가 1957년 '상황주의 인터내셔널'로 재건되면서 유럽의 전위 예술가조직으로 활성화됩니다. '무정부주의 전위'라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고 전위예술가들의 속성 상 구체적 분석은 없는 상태에서 정치적으로 무책임한 언사를 남발한다는 반대자들의 비판을 받아왔지만, 이들은 전후 소비자본주의에서의 대중의 불만을 분석해 내었습니다는 의의를 가집니다. 이들의 분석은 논리적으로 치밀합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가장 확신에 찬 것이었습니다. 특히 겉보기에 별다른 동기가 없어보이고 '비건설적'인 반란에 대해 주목하였습니다. 이들은 1965년 로스앤젤리스 워츠(Watts)에서 와일드 캣 스트라이크(wildcat strike)를 찬양했는데, 드보르는 이를 "일상생활의 궁핍화와 소외에 대항하는 저항"으로 보았습니다.

드보르의 저작은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으므로 여기서 상세히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명제만을 소개한다면 그것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유혹에 의한 지배(government by seduction)'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생산자로서 억압받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로서 '우대'받고 있고 이것이 새로운 지배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욕구를 대체하는 상품과 스펙터클이 분쇄해야 할 적으로 설정됩니다. 그래서 상황주의자들은 '상황들의 건설'을 전략으로 제시하는데, 이 상황들이란 해프닝, 장난(장난)입니다. 이들에 의하면 이런 상황들을 통해서 예술과 삶 사이의 경계가 파괴되고, 자연발생성, 즉흥성, 집단적 참여가 가능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면 디투르느망 d tournement이고, 이는 콜라주 collage와 잘못 영유함 misappropriation 을 통해 지배문화를 '재순환[재활용]시키는 것(recycling)'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이런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버텨나갈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상황주의자들에게도 인식되었습니다. 스펙터클들은 전복적인 시도들을 완충시키고 화해적인 '연예'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상황주의자들은 현대의 여가가 스스로에게 내린 판결을 집행하고자 한다"고 외치면서 그 집행을 통해 순수한 혼란, 순수한 아나키를 초래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드보르에 의하면 "승리는 혼란을 창조하되 그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있을 것"이라는 아리송한 말로 상황주의의 강령을 요약했습니다.

순수한 아나키 혹은 '가장 위대한 사기'

영국에 있던 상황주의자의 문하생들, 즉 앞서 언급한 맥클라렌 등은 완충과 화해적 연예의 주요한 사례를 바로 '록 음악'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록 음악은 외관상 자유, 해방, 자기표현 등을 주장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유혹'의 언어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록 음악은 청년 반항의 제 1원리이자, 청년 반항의 겨누어야 할 제 1의 타겟이라는 맥클라렌의 펑크의 강령이 도출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싸이키델리아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록 음악의 '진정성'도 부정되었습니다. 이 진정성이란 '허위의' 자유일 뿐이고 순전히 '사기성' 담론이라는 것이 맥클라렌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들의 전략은 스펙터클 속에서 일련의 '상황들'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를 통해 평소에는 매우 부드럽게 운영되는 매스 미디어의 기만을 벗기고 궁극적으로는 전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섹스 피스톨스가 전설적인 101 클럽에서 펑크 원년(Year Zero)을 선언한 뒤 BBC 방송의 <빌 그런디 쇼 Bill Grundy Shaw>에 나가서 "fuck"을 외치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광란의 공연을 개최하는(이른바 '주빌리 보트 트립 Jubilee Boat Trip) 등의 '상황들'을 한 것은 1968년에 못다 이룬 꿈을 8년 뒤 실현시킨 것입니다. 쓰레기를 이용한 장식물들, 울긋불긋 물들인 헤어스타일, 찢어진 티셔츠, 너덜너덜하게 만든 교복 등의 반(反)스타일 역시도 기존의 청년문화의 스타일들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상황들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테러리즘처럼 자유주의적 합의 배후에 거대한 억압장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파들은 이들을 사회주의자라고 몰아세웠고, 좌파들은 파시스트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정말 순수한 혼란이 초래되었던 것이지요. "테러리즘적인 행동들의 즉흥된 카오스, 색전증 embolism 처럼 미디어를 침투하는 의미의 진공상태"를 초래하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쉽게 표현한다면 이들의 전략은 '탈신비화(demystification)'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합니다. 밴드의 이름이 섹스 피스톨스인 것도 다음과 같이 계열을 이루는 신비화 메커니즘을 공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록 음악은 섹스의 신비화이고, 섹스란 사랑의 신비화이고, 사랑이란 가족의 신비화이고, 가족이란 계급제도의 신비화이고, 계급제도는 자본주의의 신비화이고, 펑크는 록 음악을 공격하고 탈신비화함으로써 이런 신비화의 연쇄고리를 연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여왕을 보호하사 God Save The Queen>의 코러스 부분의 '미래는 없다 No Future'라는 구호에서 보듯 궁극적으로는 이제까지 서구 사회를 신비화시켰던 진보 개념 그자체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펑크가 히피를 경멸했습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섹스 피스톨스의 리더였던 조니 로튼이 "나는 핑크 플로이드를 증오한다 I Hate Pink Floyd"라는 티 셔츠를 입었습니다는 사실은 널리 전해져오는 에피소드입니다. 부연하면 핑크 플로이드는 1960년대 후반 런던 언더그라운드에서 싸이키델릭 록으로 출발하여 뒤에는 아트 록 밴드로 불리우는 거물입니다. 펑크는 반(反)싸이키델릭 음악으로 출발했던 셈이고 히피 반문화에서 중요한 요소였던 섹스와 드럭도 경멸했습니다. 펑크 사운드는 광적인 리듬과 로보틱한 비트, 목에 핏대를 세우고 질러대는 이른바 '반(反)가창(anti-singing)', 지극히 짧은 '미니멀'한 곡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그 점에서 히피들의 낭만적인 즉흥연주와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펑크는 싸이키델리아의 신비주의적 영성(靈性)과 전원주의로의 도피를 또하나의 신비화라고 공격했습니다. 결론적으로 1970년대 후반은 이미 히피들의 유토피아적 낭만을 펑크의 허무주의적 부정으로 완전 대체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가 없는' 펑크의 허무주의적 디스토피아는 강한 묵시록적 경향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굉장히 강력하고 위험한(risky) 운동의 양상을 드러냈습니다. 물론 펑크는 대중 음악사에서 이제껏 묻혀있던 질문들을 자극적으로 제기한 운동이었지만 그만큼 위험도 컸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개의 위험 혹은 리스크를 지적하고자 하는데, 두번째 위험에 대해서는 한참 뒤에나 언급해야 할 듯합니다. 아마도 첫 번째 그리고 최대의 위험은 펑크 운동이 파괴의 블랙홀로 자멸적으로 빨려들어가는 양상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스펙터클을 전복시킨다는 전략은 자기자신이 그 스펙터클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내포한다는 딜레마에서 출발합니다. 달리 말해 '사기 hype'를 전복하기 위해 자기 자신 하이프가 되어야 한다는 딜레마를 가집니다. 따라서 의도된 '팔아먹기 selling-out', 의도적 사기행각이 피스톨스의 전략인데, 그 결과 진짜인지 가까인지, 순수한 것인지 사기인지를 분간하기가 힘들게 되어 버립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고도의 사기인 셈이지요. 한 예로 섹스 피스톨스는 활동 후반기에 히틀러를 패러디하여 나지 문장이 달린 옷을 입고 공연을 전개했습니다. 그들은 영국 여왕제를 '파시스트 체제'라고 비난했는데, 이를 위해 스스로 파시스트를 패러디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저게 파시스트를 비난하는 것인지 찬양하는 것인지가 혼동되는 것이지요. 그 결과 섹스 피스톨스에 뒤이어 등장한 펑크 밴드들 중에는 악명높은 스킨헤드와 연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순수한 아나키를 초래하면서도 드보르처럼 그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초래한 아나키는 문자 그대로 순간(moment)이었습니다. 섹스 피스톨스가 10개월간의 짧은 기간 동안만 활동한 것도 이런 강렬함 때문일 것입니다. 펑크의 순간은 상황주의의 염원이었던 "매일매일이 카니발같은 상태"를 초래했지만, 카니발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 {잉글랜드의 꿈 England's Dreaming}에서 펑크 운동을 연구한 존 새비지 John Savage의 말을 참고할 수 있을 듯합니다. 새비지는 "이들 미디어 거부자, 컬트주의자, 고함지르는 자들(ranters), 표절자(plagiarists), 장난꾸러기들(pranksters)은 천년왕국주의의 현대의 재현입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짧은 시기의 무지배와 카니발적 방종(license) 뒤에 도래하는 묵시록적인 '역사의 종말'인 셈입니다. 이런 묵시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역시 펑크를 연구한 미국의 평론가 그레일 마커스(Greil Marcus)도 펑크 폭발을 서양 역사에서 특이했던 카니발적 분출의 순간들의 계열에 위치짓습니다. 그에 의하면 1976-7년의 펑크 운동은 1968년 5월 봉기, 1871년의 파리 코뮌, 중세 말기인 16세기의 여러 사건들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실제로 상황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전범을 1920년대의 쉬르레알리스트 운동과 다다주의 운동, 청년 맑스, 생 쥐스트, 그리고 중세 이교도들과 '원탁의 기사'의 전통과 연관지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묵시록적 카니발 혹은 순수한 혼란과 아나키는 항상 정상화된 상태를 전제하는 것 아닐까요? 이는 펑크 뿐만 아니라 모든 카니발에서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카니발이란 간주곡(interlude)으로서만 일어났을 뿐이지요. 바타이유의 금기와 위반에 대한 주장을 보더라도 금기와 위반은 상호전제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회적 사실에 대한 부정"을 의도한 펑크의 전략은 바로 이런 위반이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위대한 거부로 출발했지만 곧 허무로 뒤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가능한 꿈

이런 상태에서 정상화로의 길은 비교적 급속하게 열렸습니다. 영국의 버진  Virgin 레코드사는 메이저 레코드사이지만 비교적 '리버럴'한 인물들에 의해 운영되는 회사입니다. 버진 레코드사는 매클라렌을 초대하여 이제는 섹스 피스톨스를 연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희대의 기회주의자인 매클라렌은 펑크는 "가장 위대한 로큰롤 사기 The Greatest Rock'n'Roll Swindle"였다고 잽싸게 주장을 바꾸면서 사태를 정상화했습니다. 이게 아마도 두 번째 위험이고 상황주의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지점일 것입니다. "스펙터클의 부조리성은 부조리의 스펙터클이 되었습니다"는 드보르의 예언을 매클라렌은 몸소 보여준 셈입니다. 묵시록 주장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종말'이 달성되지 않고 '미래가 오래 지속될' 때, 즉 묵시록 이후의 공간을 살아가려고 할 때 필요한 윤리에 대해서 상황주의(그리고 펑크)는 아무런 답변을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더 깊게 이야기한다면 탈신비화는 스펙터클을 전복(upside down)할 뿐만 아니라 스펙터클을 반전(inside out)시켜 버립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위기를 쇄신하여 전개됩니다. 결국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Demand The Impossible"이라는 상황주의의 주장은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정말' 실현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일거에 모든 것이 부정되면서 다른 모든 것이 허용되는 상태는 '순간'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고, 모든 부정과 위반은 정상성과 통제를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급진주의 사상인 상황주의에 대해 감히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듯합니다. 첫째는 상황주의자들이 묵시록적 비전 뒤에 제시한 아무런 통제 없는 자율(self-government) 혹은 자기통제 self-control)의 상태에 대한 것입니다. 아나키즘의 오랜 전통이지요. 그렇지만 이런 자율이나 자기통제의 기술이야말로 현대 사회에서 통제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상황주의자들은 자율을 성취하는 것이 곧바로 모든 권력의 종말이라고 생각했지만, 현대에서 권력은 자기검열의 기술 속으로 우리들을 주입시킵니다. 1970년대 이후 많은 연구에서 볼 수 있듯, 사회관리와 정신건강 사이의 경계면은 권력과 싸워야 하는 주요한 영역입니다. 푸코가 만년의 저작에서 자기윤리의 문제에 고민했던 것도 점증하는 자율의 요구가 새로운 통제사회를 향한 현대 사회의 경향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여기서는 이 정도만 지적해 두는 것으로 그쳐야 할 듯합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세상으로 진입할 때 항상 '전면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별 말이 아니라 늘 세상의 전복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술, 팝, 사랑 등 중독성 강한 대상에 욕망을 투여하고 때로 그것에 고착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런 중독과 고착에 대해 어떻게 싸워나가는가는 별도의 지면에서 고찰해야 할 듯합니다. 그렇지만 도처에 존재하는 권력의 그물망에서 살아가는 '천박한 다수(vile multitude)'의 입장에서는 상황주의자의 묵시록적 요구는 공허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불가능한 꿈'일 뿐입니다. 이는 비단 상황주의 뿐만 아니라 현대의 모든 급진주의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이 딜레마는 풀리지 않은 채 고스란이 1980년대로 이전됩니다.

4. 레이브 문화와 테크노스피리추얼리즘

애시드 하우스 '문화'로부터 레이브 '운동'으로

1980년대 이후 대중 음악과 관련된 문화 현상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MTV가 만들어내었던 이른바 '마돈나 현상'을 주목했습니다. 시뮬라크르, 하이퍼리얼리티 등 등의 용어로 새로운 현상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펑크를 '모더니즘적 부정'으로 간주했던 인물들은 이를 계승한 인디 록(혹은 얼터너티브 록)을 재조명했습니다. 신보수주의 정권에 가장 강력한 전투를 벌인 미국의 흑인음악인 랩과 연관된 힙합문화에 대한 조명도 있습니다.

이렇듯 1980년대 이후의 '포스트모던'한 상황은 과거의 특정 시기를 지배했던 각양각색의 하위문화들이 부활하고, 이들이 함께 공존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 고유의 가치를 가집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묵시록적 비전을 부활시켰다는 점에서 영국(및 유럽)의 레이브 문화에 대해 집중하고자 합니다. 특이한 것은 레이브 문화에서는 히피의 싸이키델릭적 영성과 펑크의 묵시록적 비전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시작하기 앞서 잠시 용어 정리가 필요한 듯합니다. 레이브라는 용어를 음악 장르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심히 부정확한 표현입니다. <<얼트 문화 alt.culture>>의 저자인 스티븐 댈리 Steven Dally와 내서니엘 와이스 Nathaniel Wice에 의하면 레이브란 "테크노 음악, 과다한 엑스터시(Ecstasy : 약물의 이름) 사용, 유토피아적 단합 togetherness에 의해 가열되는 정력적인 올나잇 해프닝"이라고 합니다. 즉, 레이브는 올 나잇 댄스 파티에 속하지만, 클럽이나 집에서 열리는 기존의 댄스 파티와는 다른 분위기와 감성을 가진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레이브란 댄스 파티임과 더불어 하나의 '문화'로 보아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레이브에서 연주되는 테크노 음악이란 또 무엇일까요? 이는 극히 복잡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좌우지간 현재의 용법에서 테크노 음악이란 협의의 테크노 음악이 아니라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이라는 메타장르를 총칭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 중에서 레이브를 태동시킨 일렉트로닉 음악의 한 장르는 애시드 하우스라고 불립니다. 역시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고 말씀드리면 '잉글리시 애시드 하우스'는 시카고의 한 클럽에서 탄생한 댄스 음악인 하우스 음악이 영국에서 수출되고 그 과정에 여타의 다양한 댄스음악과 뒤섞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스타일입니다.

통상 1988년을 '애시드 하우스 폭발 acid house explosion'이라고 부르고, 그 해 여름은 1967년의 사이키델릭 폭발과 유사한 분위기로 인해 '제 2의 사랑의 여름(The Second Summer Of Love)라고 불립니다. 물론 이 폭발은 영국에서 폭발하기 1년 전인 1987년 여름부터 예비되고 있었습니다. 폴 오큰폴드(Paul Oakenfold) 등 세 명의 영국인 DJ가 스페인의 휴양지인 이비자 Ibiza 섬에서 밤샘 댄스 파티(all-night dance party)를 성황리에 개최한 사건이 그것입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세 명의 DJ들은 각자 자신의 클럽에서 파티를 이어나갔고, 단지 클럽 뿐만 아니라 사운드 시스템이 구비되는 곳이면 어디서든 광란의 마라톤 댄스 파티인 레이브(rave)가 개최되었습니다. 이는 '펑크 이후로 가장 대규모'라는 평을 받으면서 대중적인 문화로 성장하였다. 특히 수만명의 청소년들이 런던 근교의 오비틀 거리에서 약물을 동반한 댄스 파티를 개최한 사건은 각종 언론에 의해 '오비틀 레이브 폭발(Orbital Rave Explosion)'이라고 대서특필되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도 많은 청년들이 배기 진(baggy jean)[헐렁헐렁한 청바지]과 후드 탑(hood top), 번쩍이는 로고의 의상으로 차려입고 런던 근교와 켄트 지역을 전전하며 해가 뜰 때까지 춤추고 노는 파티를 즐겼다. 화장실도 고급 바도 건물도 없었지만, 단지 사운드 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삐삐거리는 소리와 끊임없는 비트의 음악, 약물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른바 레이브 '운동'이 영국의 거리를 뒤덮은 것이며, 파티장에서는 어디에서나 애시드 하우스의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애시드 하우스에서 '애시드'의 의미는 본래는 샘플링 등 전자음악적 기법을 의미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고 합니다. 한 예로 미국에서 'acid burn'은 '남의 아이디어를 훔치다'라는 속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영국 및 유럽에서 애시드의 의미는 이런 본래의 의미보다는 약물 복용을 통한 사이키델리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와전'되었습니다. 물론 애시드 하우스 씬에서는 댄스를 비롯한 공동체적 행동과 레크레이션을 위해 엑스터시 Ecstasy(약해서 E) 등의 환각제가 널리 복용되었는데, 앞서 보았듯 엑스터시는 댄스, 음악과 더불어 레이브 씬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 애시드 하우스 폭발은 기성의 언더그라운드 댄스 음악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재편했습니다. <옵션 Option>이라는 잡지의 말을 빌리자면 "애시드 하우스 씬은 댄스 음악에 언더그라운드의 신용장을 부여하였으며, 핑크색 네온과 디스코로 가득찬 트렌디한 클럽들에 새로운 빛을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싸구려로' 자가제작한 레코드들이 팝 차트를 휩쓰는 기현상도 발생했습니다. 예를 들어 봄 더 베이스 Bomb The Bass라는 그룹 명의로 발표되어 싱글 차트 2위에 오른 <비트 디스 Beat Dis>라는 곡은 당시 19살의 '스페어 타임 DJ' 팀 심논 Tim Simenon이 단돈 £150(약 20만원)를 들여 'DIY로' 제작된 것입니다. 몇몇 평론가들이 애시드 하우스를 '새로운 펑크'라고 부르는 것은

이들이 평등주의적이고 반(反)스타적인 펑크의 에토스를 계승했습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펑크와 달랐던 점은 '탈정치적이고 생각없다(apolitical and mindless)'라고 보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애시드 하우스는 어떤 의미에서도 '혁명'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레볼루션 revolution'이 아니라 '레이볼루션 Rave-olution'이었습니다.

Rave-olution과 지피(Zippies)

클럽문화와 레이브문화를 상세하게 연구한 새러 쏜튼 Sarah Thornton의 저서 {클럽 문화 : 음악, 미디어, 하위문화적 자본 Club Culture : Music, Media and Subcultural Capital}(1996)에 의하면 레이브는 "클럽이라는 전통적인 댄스 장소로부터 벗어나 버려진 창고, 비행기 격납고, 농장의 저수지나 텐트 속 등으로 이동하여" 개최된다. 이는 클럽이라는 '예측가능한' 장소를 벗어나 "예측불가능성의 감성"을 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레이브란 관습적인 여가의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점유하는 실천, 탈영토화하는 실천인 셈입니다. 레이브와 클럽을 조직하는 레오 패스킨 Leo Paskin이라는 이도 위 책에서 "레이브는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반면, 클럽은 매일 똑같은 장소, 예측가능한 장소입니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따라서 레이브는 아무런 정치적 지향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곧 정치적 효과를 드러내었습니다. 1989년에 이르러서는 애시드 하우스와 레이브 파티가 기성세대의 눈에 점차 가시화되었습니다. 약물과 히피풍의 의상, 허가받지 않은 옥외 파티, 자연계를 훼손시키는 이 기이하고 퇴폐적인 행각을 주류 언론과 정부당국이 가만 놓아둘 리 없었고, "제 2의 사랑의 여름"이라는 표현도 주류 미디어에서 애시드 하우스와 사이키델릭 록을 밀접한 상관물로 다루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대략 1989년부터 경찰과 골수 레이브족들 사이에서는 쫓고 쫓기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레이브 파티는 불법으로 규정되어 2,000£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레이브 파티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1990년 6월 레이브 파티에서 나오는 모든 수익금을 몰수하고 프로모터는 6개월 금고를 처하도록 하는 새로운 법이 통과되었고, 결국 1992년에는 크리미널 저스티스 법안 Criminal Justice Bill이 통과되어 레이브를 원천 봉쇄할 법적 근거를 확보했습니다. 이 법안은  경찰에게 '무언가를 도모하는' 10명 이상의 군중들을 해산시킬 수 있다는 권력을 부여한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없는' 레이브 문화에 대해 정부가 노골적인 탄압을 가한 이유는 다소 궁금합니다. 그 이유는 골수 레이브족들이 개최하는 파티가 점차 종교적이고 영적(靈的)인 의미를 가지는 제의(祭儀)의 성격을 띠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레이브족들은 점차 경찰의 눈길을 피해 폐쇄된 집이나 창고를 떠나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는' 넓은 야외공간에서 비밀스럽게 파티를 개최했고, 연락도 전단, 비밀전화, 인터넷 메일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레이브는 마치 원시 샤머니즘의 제의처럼 되어갔습니다.  레이브 파티를 조직하는 DJ들은 '디지틀 샤먼 digital shaman'라고 불리웠고, 거기 모인 레이브족들의 춤은 마치 부족적 열기를 동반한 원시 이교도들의 군무같은 양상을 띠었습니다. 이렇게 디지틀 테크놀로지와 결합된 원시성의 현현을 지칭하기 위해 '테크노샤머니즘 technoshamanism'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약물과 춤을 동반한 이교도적 의식을 일렉트로닉 댄스음악을 매개로 혼합한 레이브는 마치 '태고의 부활 The Archaic Revival'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레이브 문화가 가장 최근의 또하나의 묵시록적 비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에 의한 탄압과 그에 따른 비밀결사적 특징만으로 레이브 문화의 영적 성격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나아가 또한 현대의 댄스 문화에서 나타났던 초월적 쾌락주의만가지고 설명하기도 부족합니다. 이전의 댄스 문화는 주로 개별적인 성적 접촉을 위한 '헌팅'의 성격이 강했고, 그 결과 디스코의 경우에서 보듯 쉽게 주류 문화와 타협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레이브의 경우 개인들 사이의 2자 관계보다는 훨씬 다형적인 교류 감각을 목표로 했고 이를 통해 몽환 상태에서 황홀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쾌락주의는 현세적이기 보다는 초월적이었고, 이 초월적인 상태는 초자연적이고 비과학적인 영성(paranormal spirituality)에서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외부의 현실 external reality에는 세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초자연적 힘이 숨겨져 있으며 그 힘은 다양한 '영성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식의 샤머니즘이 레이브씬을 감싼 것입니다. 그 결과 첨단 사운드 장비 속에서 치러지는 샤머니즘적 제의는 싸이키델릭했을 뿐만 아니라 '아포칼립틱'(묵시록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레이브 문화가 영적 성격을 갖추어 나가는 데는 이른바 지피(Zippies)라고 불리는 이들이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영국의 히피 생존자, 혹은 뉴 히피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1970년대 영국의 히피들은 이른바 뉴 에이지 트래블러들 New Age Travellers, 또는 '방랑자들 Squatters'이라 불렸는데, 이들은 아메리카풍의 히피 문화와 유럽풍의 집시 문화를 혼합하여 매년 자유 록 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1980년대 접어들면서 신보수주의 정권은 이들을 탄압했는데, 급기야 1985년 빈필드 매서크르 Beanfield Massacre라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은 당시 페스티벌을 목적으로 집결한 트래블러들을 어린아이, 여자, 동물 할 것 없이 무차별로 물리적 폭행을 가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에 보았던 레이브에 대한 탄압은 트래블러들에 대한 탄압의 후속책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면서 이질적이고 때로 적대적이었던  트래블러들과 레이브들 사이의 잦은 접촉이 전개되기 시작되었습니다. 이 양쪽의 공집합이 바로 지피인 셈입니다. 양자간의 유대가 확고하게 된 또하나의 사건은 1992년 봄 캐슬모턴 Castlemorton 교외에서 개최된 페스티벌이었습니다. 스파이럴 트라이브는 3만여명의 레이브족들과 대규모 페스티발을 개최했는데, 마침 그 근방에 히피들이 이미 소규모의 페스티발을 여는 중이었습니다. 스파이럴 트라이브는 이 두 계층을 함께 모아놓고 환각적 분위기의 전자음으로 가득찬 마라톤 공연을 펼쳤습니다. 경찰은 처음에는 이 페스티벌을 묵인했지만, 페스티벌이 끝난 후 다수의 참여자들을 약물소지 혐의로 연행했고, 스파이럴 트라이브의 10명의 멤버들을 "공중의 타락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크리미널 저스티스 법안 Criminal Justice Bill이 추진된 직접적 빌미를 제공한 사건은 이것이었습니다.

테크놀로지와 스피리추얼리티

그렇다면 레이브와 트래블러들은 어떻게 결합하게 되었을까요? '정부의 탄압에 의한 동병상련'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양자의 공통분모는 첫째, 테크놀로지에 대한 긍정이요, 둘째는 양자에 고유한 스피리추얼리티입니다. 또한 양자의 통합으로 탄생한 지피란 프레이저 클락(Fraser Clark)의 말처럼 "테크놀로지컬한 요소와 스피리추얼리즘의 균형을 잡은 사람"이고, 이들은 이 균형을 프로노이아 pronoia('편집망상증'을 뜻하는 패러노이아 paranoia의 반의어)라고 부른다. 지피란 '선에 영향받은 직업적 이교도들 Zen-inspired professional pagans'(혹은 '선에 영향받은 직업적 프로노이아들 Zen-inspired pronoia professionals')의 축약어입니다. 

프레이저 클락(Fraser Clark)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상가로서 1960년대부터 반문화 운동의 대표자였고 현재는 티모시 리어리를 제치고 지피의 대표적 사상가가 되어 있고, <<사이키델리아 백과사전 Encyclopedia Psychedelica>>이라는 언더그라운드 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습니다. 클락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와 같은 테크놀로지와 스피리추얼리즘의 융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20여년 동안을 테크놀로지의 측면을 멀리 하려고 노력하는 히피로서 지내왔다. 이제 난 PC를 새로 마련하고 모뎀을 장착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트래블러들은 레이브의 테크노샤머니즘 technoshamanism을 수용하여 1960년대 히피즘을 지배했던 도시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공포증을 극복했고, 레이브들은 히피의 유토피아주의를 수용함으로써 레이브 파티에 맴돌았던 데카당스함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정신적 지평의 반문화 운동을 꿈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레이브 씬에서 지피들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긍정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트래블러들은 그들의 여행 도중 PC를 사용하게 되었고, 레이브 씬도 결집을 위한 통신 수단으로 웹사이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그 점에서 지피는 싸이버펑크의 지향을 확대함과 더불어 싸이버펑크의 고립성과 파편성을 통합주의로 대체했습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 프레이저 클락과 그의 지지자들이 런던의 소호 Soho 거리에 만든 메가트리폴리스 클럽 Megatripolis Club이라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이 클럽은 레이브족들 등 일반적인 '클럽 고어 club-goer'들 이외에도 중년의 변호사, 교환학생, 그래픽 디자이너, 과학자들 등의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고 융합시키고 있습니다. 히피들의 고립주의는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댄스' 클럽에서 철학자나 과학자가 라이브 강의를 하는 현상이 가장 극적 표현일 것입니다.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새로운 정신적 공간을 창출하려는 지피들의 지향은 여기서도 확인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새로운 시공간을 창출하려는 프로젝트는 다시금 천년왕국적이고 묵시록적 비전을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그 대표인물은 프레이저 클락과 더불어 또하나의 컬트 지피 사상가인 테렌스 맥케나(1946년 생)입니다. 민속-생물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만물박사'인 그는 <<태고의 부활 The rchaic Revival>>(1991), <<진정한 환각 True Hallucinations>>(1993) 등의 저서로 일약 레이브-지피 씬의 대표적 사상가로 등극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인류 문명은 탄생 시기부터 싸이키델리아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구석기 시대 이후 포기된 유토피아가 2012년에 도래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1987년 '새로운 은하 광선'이 발사되었는데 이로부터 25년 뒤인 2012년 12월 21일  새로운 공간(맥케나는 이를 초공간 hyperspace이라고 부릅니다)이 창출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해 뭐라고 평하기는 이른 듯합니다. 이 초공간이 컴퓨터의 가상공간에 중독된 얼치기 히피의 망상인지, 아니면 가상공간을 넘어서는 무언가의 '개벽'이 도래한다는 심오한 사상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단지, 이제껏 테크놀로지를 거부했던 반문화의 전통과 달리 이들이 테크놀로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으로 장황한 소개를 마쳐야 할 듯합니다.

레이브 문화는 1990년대 접어들어 미국 등지에도 수출되어 중요한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렇지만 그와 더불어 레이브 역시도 다분히 관습화.제도화되는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레이브를 위해 급조된 음악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졌고, 오죽하면 한국에도 가요의 한 장르로 유행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레이브 음악의 상업화를 단지 정부의 외부의 탄압이나 쇼비즈니스계의 착취로 설명할 수만은 없다.'생각없는' 레이브들의 약물 복용은 때로 위험 수위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때로는 폭력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몇몇 클럽에서는 이권을 노린 갱들 사이의 영토 전쟁까지 벌어졌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1994년 아리조나주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에서 레인보우 패밀리와 함께 개최할 예정이었던 지피들의 잼보리 모임은 "지피들보다는 저널리스트가 더 많이 모인" 결과를 초래하고 결국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 지피의 활동은 다소 소강 상태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고, '태고의 부활'이나 '모던 프리미티브' 등은 잽싸게 패션 패드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정리해 보면 1987년부터 1992년 사이의 레이브 운동은 1980년대라는 묵시록적 상황에 대한 묵시록적 대응이었습니다. 그것은 후쿠야마에서 보드리야르에 이르는 다양한 지류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역사의 종언'이라는 담론에 대한 묵수적 순응이자 근본적 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1992년 이후의 '포스트레이브 씬'은 다시금 '묵시록 이후의' 즉 '포스트아포칼립틱(postapocalyptic)'한 시공간의 일부인 듯합니다.

5. 결론

여기서 본 세 개의 상이한 '대안적 운동'들,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히피의 낭만주의적 도피, 펑크의 허무주의적 부정, 레이브의 하이퍼리얼한 엑스터시는 모두 지향과 태도를 달리합니다. 그렇지만 공통적인 것은 모두 '일거에(once-and-for-all)' 역사가 종언한다는 노선을 취했다는 점입니다. 히피나 펑크처럼 그것을 지금 당장에서 찾았든, 아니면 레이브처럼 가까운 미래에서 구했든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다른 노선을 취해야 할 듯합니다. 물론 여기서 언급한 극한적 경험들과 거리를 두는 상이한 노선들이 대중음악의 자본주의적 질서로 투항하는 것이 될 위험은 상존합니다. 즉 역사의 종언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언없이 지속되는 것도 아니라는 방향을 취해야 할 듯합니다.

달리 말해서 '역사의 종언'은 당신의 머리 속에서 부단히 접근가능하지만 접근됨과 동시에 일탈합니다. 모든 카니발과 마찬가지로 이런 '여행'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든 새로은 질서나 체계로 전환될 수 없다는 속성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을까요? 즉 '역사의 종언'이란 자기의 통제 혹은 자기의 재창조의 대립물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혁명'을 아직도 말할 수 있다면 이는 '궁극적'인 것도 '영구적 permanenet'인 것도 아니라, 밀물과 썰물의 운동같은 끝없고 불연속적인 계열들, 과정들에 가깝습니다. Don't Count The Waves...

따라서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간주되는 1967년의 사랑의 여름과 1968년 5월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떤 혁명의 도식을 가지고 그때 나왔던 슬로건들을 낭만과 노스탤지어로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새로운 버전(version)의 묵시록적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끝없는 끝'을 향하여 부단히 여행하고, 처음에 설정한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그곳으로부터 이탈하는 운동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또한 '노동의 해방'도 '노동으로부터의 해방'도 아니고 이 운동 과정에 몰입하는 사람입니다. 역사의 종언(끝)에는 '끝'이 없습니다. 한 비극적이고 위대한 철학자의 말처럼 '미래는 오래 지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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