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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글로필' 음악 감상자를 넘어선다는 것

한국에서 대중음악의 감상자(listners)들은 대체로 영미 문화에 대한 숭배자들이다. '감상자'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대중음악을 '진지한 예술'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서나 들려오는(panasonic)' 대중음악을 그저 들을 뿐인 일반적 팬(fan)이 아니라 음악을 '주의깊게' 듣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건 한국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본산지인 미국과 영국이 아닌 곳에 사는 '진지한' 음악 감상자들에게도 보편적 현상일 것이다.

이때 '영미 문화'란 무엇인가. '영미'라는 단어는 영어로 쓰면 'anglo-american' 쯤 될 것이다. 이 단어가 현재 북아메리카로 '탈영토화된' 앵글로계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들 뿐만 아니라 대영제국에 남아있는 앵글로계까지 포함하는 것인지는 조금 혼동스럽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은 현재 앵글로계가 세계에 존재하는 자본의 60%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문화산업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영미 문화가 '다국적 연예산업'이라는 주체로 표상되며, 세계 각지의 문화에 '헤게모니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들은 음악산업 나아가 문화산업 일반에 관한 국내외 문헌을 찾아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문헌들이 준거하는 패러다임은 '문화 제국주의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교과서적으로 요약한다면 문화제국주의론은 "다국적 연예산업에 의해 대량생산된 대중문화의 형식들이 국지적 문화형식들의 통합성(integrity)과 활력을 침식시킨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제국주의론은 학술적 패러다임으로서의 유행은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의 근거가 된다. 혹은 '우리 시장을 지키려는' 국내 문화산업계의 '애국적' 주장에서도 드러난다. 결과는? 진지한 음악 감상자들은 '문화 제국주의의 포로'가 되어 버린다. 단지 감상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음악 생산자들도 영미 음악의 추종으로 시작한다.

여기에는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차이도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인디펜던트'하고 '얼터너티브'할수록 영미의 음악문화에 대한 '존중'의 정도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 백스트리트 보이스(Backstreet Boys)나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같은 틴아이돌 팝 스타의 팬에 비해 너바나(Nirvana)와 콘(Korn)의 팬들은 '음악을 들을 줄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함과 동시에 영미 문화에 대한 '문화적 해독력'도 뛰어난 편이다. 당연히 '자국의 음악문화'에 대해서는 자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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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안적 해석은 없을까. 물론 있고, 이는 문화 제국주의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문화 제국주의론에 대한 일반화된 비판은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다국적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된 텍스트의 의미가 수용자들에게 투명하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 제국주의가 세계 각지의 음악문화의 동질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수용자들은 '오해'나 '착각'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각지의 이질적인 음악문화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 문화연구 일각의 주장이다.

여기서 '능동적 수용자'를 강조하는 논의에 대해 일반적 평가를 내리기는 적절치 않다. 그렇지만 '물질적 생산수단'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수용의 능동성만을 강조하는 논의는 무용하지는 않더라도 한계가 명확해 보인다. 그래서 단지 수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산으로 응답하고 반작용한다는 논의가 관심을 끈다. 문화연구 일각에서 주장하는 잡종화(hybridization)라든가, 종합화(syntheticization) 등의 개념이 그것인데, 이 개념들이 주장하는 바는 영미 문화의 영향이 '일방적'인 것은 아닐뿐더러 그 영향을 흡수하여 문화적 변이를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로서 통상 자메이카의 레게(reggae)가 거론된다. 레게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이지리아의 아프로비트(afrobeat)나 인도/파키스탄의 방그라(bhangra)도 국제 대중음악계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이 경우 '트랜스컬처레이션(transculturation)을 통한 상호풍부화(cross-fertilization)'이라는 개념이 동원된다. 즉, 잡종화나 종합화를 통해 문화의 국내적 생산을 이룬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영향받았던 문화적 모국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레게의 경우 1950년대 리듬&블루스(rhythm&blues) 등 미국의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었지만, 1970년대 이후에는 레게가 국제적 대중음악 시장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잡종화나 종합화가 새로운 변이를 만들어내는 경우는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남아시아 등 서양과의 문화적 교환이 오랫동안 존재했던 지역에서나 현실적이지 않을까. 간단히 말해서 이들 나라들은 서양의 오랜 식민지배를 받아왔고, 그러면서 문화적 혼합(mixture)이 자연스러운 시기를 거쳐 왔다. 상징적으로 이 지역은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서양의 언어를 공용어의 하나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그래서 나쁘게 본다면 이 지역에서는 잡종화가 아니면 미래의 대안을 모색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 제국주의의 침탈이 오랜 동안 넓고 깊숙하게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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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속해 있는 동아시아 나라들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남아시아 등의 권역(券域)과는 다른 면들이 많아 보인다. '다른 면들'에 대해서 몇 가지만 들어 보자. 하나는 음악적 전통 중에서 '클래식 음악'이 강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권역에 비해 경제성장을 통한 '근대화'가 상대적으로 잘 이루어진 지역이라는 점이고, 마지막은 로마 알파벳과는 상이한 문자체계에 기반한 언어가 유일한 공용어라는 점이다.  

이런 특징이 음악문화에 미치는 효과는 무엇일까. 일단 현상적인 지적을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박제화된 전통문화'가 '우리 것'이라는 이름 하에 국민문화의 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에 기원을 둔 문화의 영향은 '일방적'인 것에 머물고, 잡종화는 대부분 '상업화'에 머문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악'과 '양악'과 '가요'는 전혀 다른 범주가 되고 그들 사이에 문화적 교류는 힘들다. 이는 그런 시도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국악, 양악, 가요의 시스템이 서로 이질적이다보니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대중음악과 비(非)대중음악 사이의 관계는 오늘의 주요한 주제는 아니므로 대중음악 내부로 들어가 보자. 먼저 음악산업의 측면에서 본다면 동아시아의 나라들은 국내 부문의 비중이 크지만 독자적 음악은 부재하다는 공통된 특징을 갖는다. 달리 말하면 동아시아의 대중음악은 경제적으로는 자립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종속적이다. 우스개소리에 가깝지만 동아시아 나라들은 '문화 제국주의론'에 대한 비판의 살아있는 실례다.  

이런 특징이 그자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남는 문제가 있다면 대중음악의 진지한 감상자들이 자신들의 '국내 대중음악'에 대해서도, '전통 음악'에 대해서도 별다른 자긍심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과 앞에서 예를 든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남아시아 나라들의 상황과 어디가 더 좋은(혹은 나쁜) 것일까. 단적인 예로 U2와 R.E.M.의 공연에 8만명이 모인다는 멕시코와 U2와 R.E.M.이 음반 1종당 5만장도 팔리지 않는 한국 중에서 어느 나라가 '좋은' 나라일까.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다. 문제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점이다.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면서 '국제적·선진적 감각'을 기르든가, 아니면 국내시장을 지키면서 '국민적·후진적 감각'을 감수하든가.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대중음악의 진지한 감상자들은 1990년대 이후 '상업적 잡종화'가 지배하는 주류 대중음악계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대신 특정 음악 장르에 대한 순수주의를 추구했다. 그 결과 한국 대중음악에는 '가요'와 '가요가 아닌 것'이 대치한다. 이건 장르의 구분이 아니다. 한 예를 들어 g.o.d.와 신화는 '힙합이 아니라 가요'이며, 드렁큰 타이거와 CB Mass는 가요가 아니라 '힙합'이다. 다른 장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상업적 잡종화와 비상업적 순수주의의 병렬적 대치가 현재 한국의 음악문화의 특징이다. 이런 병렬적 대치와 공존에는 앞서 언급한 '전통' 음악과 (서양의) '순수' 음악도 또하나의 변수들로 추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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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스파이스라는 '국산' 밴드가 있다. 외국이라면 이들에 대해 '평론가의 연인(critic's darling)'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대중의 반응은 그닥 열광적이지 않지만 평론가들의 평은 좋은 뮤지션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아마도 가장 '앵글로필'한 밴드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된 이들의 4집 [D]에 대해서 밴드 멤버인 윤준호가 이런 말을 했다. "이 곡은 외국의 모 밴드처럼 해보고 싶었는데 한국사람이 하다보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나는 '이런 결과'에 대해 만족하는 편이다. 단지 '한국 사람이 하다보니'라고 했던 말에 조금 더 '목적의식적 지향'이 들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음악을 듣다보니 문득 사월과 오월이라는 '흘러간 가수들'이 연상되었다. 그래서 오래만에 사월과 오월의 1974년 작품을 들어보았다. 당시 그들은 '통기타 듀오'로 소개되었지만 이들의 음악은 '이건 무언가 다르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지금 평하라고 한다면 "김소월의 시와 '통기타 가요'의 멜로디에 전기 기타의 솔로와 키보드의 효과음을 '잡종화'시킨 사운드"라고 말할 것 같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혁신적 사운드를 왜 '가요'라는 일반 명사나 '포크'라는 이상한 개념으로밖에 부르지 못했을까라는 점이다.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011023

* 계간 <문학과 경계>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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