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년 동안의 대중문화계를 고찰하는 일은 매우 버거운 일이다. 우선 고찰대상이 너무 포괄적이다. 게다가 특별한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몇 년이 지나야 뚜렷해질 뿐 가까운 과거의 변화는 잘 인식되지 않는 것이 인간두뇌의 속성이다. 일단, 편의상 대중문화를 'TV 안'과 'TV 밖'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자. 누가 뭐래도 TV는 한국의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매체이므로 그 안부터 들여다보겠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텔리비전은 '드라마'로 먹고 살고, 드라마의 테마는 8-90%가 '멜로'다. 2001년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달라진 현상이 몇 개 있기는 하다. 우연의 일치인지 가을 즈음해서 방영된 드라마들은 한결같이 '부유한 여자와 가난한 남자의 사랑'을 다루었다. 지상파 방송 3사의 주말 드라마들인 <그 여자네 집>,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어>(순서대로 MBC, SBS, KBS-2)의 설정 구도가 모두 그랬다. MBC의 경우 일일 드라마 <결혼의 법칙>, 미니시리즈 <반달곰 내 사랑>에 이르기까지 '잘 사는 집 딸과 못 사는 집 아들의 사랑'을 테마로 할 정도였다. 마치 '현대판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로 승부를 보려는 듯한 양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경향에 대해 '여성의 경제적 자립도가 높아진 세태의 반영'이라고 분석할 수 있을까. <그 여자네 집>을 제외하고는 여자의 경제력이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런 분석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남성의 지위의 상대적 저하'를 반영했다는 시각도 일면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어쨌든 '신데렐라 스토리'가 주류를 이루었던 한국 드라마에서 '온달 스토리'가 대거 등장한 것이 특이한 현상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단, 이런 변화가 장기적 트렌드의 변화의 반영인지 아니면 그저 '신데렐라 석세스'가 지겨워진 나머지 잠시 옆길로 새본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현실에서 모 재벌그룹의 딸이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방송작가나 PD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 건지 아닌지도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불행히도 한두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해서 판단은 더 유보되어야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그 여자네 집>은 '전문직업층'의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일'과 '가정'에 대한 설득력있는 묘사를 보여준 수작이었지만, <반달곰 내 사랑>은 '어이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폐작이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시청률이 저조했다는 점도 드라마의 주고객인 '중년 여성'의 무관심을 반영하는 것 같다. 이런 구도와는 정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중년 여성이 외면한 드라마도 있었다. KBS-2 TV의 <푸른 안개>였는데, 중년 남자와 젊은 여자의 '불륜'을 그린 이 드라마는 시청률의 양적 수치와는 무관하게 묘한 파장을 낳았다. 이와는 반대로 중년 여성의 박수를 받은 드라마도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MBC TV의 미니 시리즈 <아줌마>였다. 30대 후반에 이혼한 뒤에도 경제적·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지식인' 남자와 멋지게 자립에 성공하는 '기층민중' 여자를 내세운 이 작품 역시 <푸른 안개>와 더불어 상반기의 화제작이었다. 두 작품은 성격이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극중에서 부부의 '파경'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이제까지의 경향과 단절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후반기 최고의 인기작이자 화제작은 SBS의 <여인천하>였다. 2000년에 방영된 MBC의 <허준>과 KBS의 <왕건>(지금도 방영 중)에 이어 '사극 붐'을 낳은 이 작품들의 성공 원인은 '역사적 허구를 다루면서도 현실의 단면을 오버랩하는 능력'으로 보인다. 물론 특정 인물을 지나치게 연상시키게 한다거나 '정치적'인 해석을 의도적으로 조장하는 듯한 부분은 '무늬만 사극 아니냐'라는 비판을 낳고 있지만, 각종 선거가 연잇는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가 될 내년에도, '현재에 대한 우회적 묘사'를 시도하는 사극은 강세를 이어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 지상파 방송의 드라마들은 2001년에 스타급 연기자 섭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시청률에서 약세를 보인 방송국의 경우 특히 정도가 심했다는 말도 들린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근년에 한국영화가 약진을 보인 사실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진단된다. 즉, 스타급의 연기자들이 영화로 대거 몰려감에 따라 TV 드라마의 주연급으로 기용할 배우(혹은 탤런트)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특히 '젊은 여배우'의 경우 두드러져 보인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TV 탤런트는 영화배우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 단계가 되고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드라마 외의 TV는? 시트콤은 드라마에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별도로 취급해 보자. 그렇다면 2001년은 '최초의
성인 시트콤이 등장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MBC TV에서 상반기에 방영한
<세 친구>, 그리고 잠시 휴식기를 가진 뒤 최근 시작한 <연인들>이
그것이다. 이들 성인 시트콤은 '그게 그거'처럼 되어 버린 '청춘 시트콤'을
넘어서는 참신함을 보여주었지만, 참신함을 지속시키는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성인'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온 가족이 시청할 수밖에 없는'
지상파 TV의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나온 가요순위 프로그램에 대해 방송국마다 상이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흥미롭다. 폐지를 주장한 측의 논거는 대략 순위산정의 공정성이 없다는 점, 그리고 립씽크 관행이 문제가 많다는 점으로 집약할 수 있는데, 두 가지 모두를 수용한 방송국은 없었다. KBS는 순위제만 폐지했을 뿐 프로그램의 컨텐츠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 없었으며, MBC는 립씽크 관행은 금지했지만 순위제는 유지하고 있다(이는 뒤에 논할 '연제협 사건'과 관련되어 이해할 수 있다). SBS의 경우는 이전과 똑같은 포맷을 유지하고 있다. 영화와 달리 대중음악의 경우는 음악산업이 장기불황에 처하면서 대중문화로서의 존립 자체도 불투명한 위기상황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화려하지만 밀리언 셀링 앨범(이른바 '대박' 앨범)과 그렇지 않은 앨범들 사이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라이브 클럽을 비롯한 음악의 일상적 생산 공간이 거의 붕괴한 상태라는 현장의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가수라는 존재에 대한 세간의 인식도 '탤런트보다 한 급 아래의 연예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나라들에서 '한류(韓流) 열풍'이 불고 있는 것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현실이라고 하겠다. 대중음악의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음반산업의 시도는 '편집음반'이라는 임시방편으로 나타났다. 이미 발표된 곡들을 다시 모아서 발표하는 편집음반은 작년 하반기에 나와 올 상반기를 주도한 [연가]를 비롯하여 [애수], [러브]. [열정] 등 수 종이 발매되어 시장을 석권했다. 편집음반과 더불어 한 후배 가수가 여러 선배 가수들이 예전에 녹음한 곡을 다시 불러 레코딩한 '리메이크 음반', 여러 후배 가수가 한 선배 가수에게 헌정하는 '트리뷰트 음반' 등도 어느 정도의 반응을 얻었다. 그렇지만 이런 편집음반들'만' 득세하고 개별 가수의 음반은 판매의 부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은 '불황의 타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중론이다. 음악 장르 상으로는 10년간 대중음악계를 지배했던 '댄스 가요'보다는 '발라드'가 득세했다. 이는 댄스 가수가 발라드 가수로 교체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한 가수(혹은 그룹)가 음악 스타일을 바꾸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했다. 성시경, 박효신, 브라운 아이즈 등 신인으로서 곧장 스타덤에 오른 가수들이 앞의 경우에 해당된다면, 김건모와 박진영 등 이제 베테랑급이 되어 중반기 음반시장을 석권한 가수들은 뒤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댄스그룹 H.O.T 출신의 강타의 솔로 음반이나 하반기에 음반을 발표하여 정상의 지위를 누릴 것으로 예상되는 g.o.d도 뒤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2001년 대중음악계(이른바 '가요계')는 유난히 사건이 많았다. 방금 언급했지만 H.O.T는 소속사와의 불화로 인해 정상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해체되었다. g.o.d의 경우는 한 멤버가 한 여성 탤런트와의 열애를 공식적으로 표현했다가 기획사로부터 '퇴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뒤에 팬들과 멤버들의 항의로 퇴출이 번복되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H.O.T 사건과 더불어 가수와 기획사(매니저) 간의 갈등 관계를 부각시켰다. 이런 구조적 문제점은 한 지상파 TV가 가요계의 매니저 시스템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자, 연예인 매니저들의 이익단체인 한국연예제작자협의회(연제협)에서 해당 방송사에 출연을 거부하는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지난 7월의 연예계와 방송계는 '연제협 사건'으로 인해 매우 뜨거웠다. 이 사건은 방송사와 음반사(기획사) 사이의 역학관계나 대중음악의 전체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로 발전했지만, 양자의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 직전인 6월에는 박진영과 싸이의 음반 수록곡들의 '외설성'이 문제가 되어 당사자 가수들이 보수적 시민단체들과 공방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표현의 자유냐, 청소년 보호냐'라는 주장의 대치는 향후 한국 대중문화에서 꽤 오랫동안 평행선을 이룰 문제로 보인다. 11월에 싸이가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된 사건 역시 '연예인의 약물 복용'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란을 다시 한번 제기했다. '법대로' 하면 형사처벌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이미 광범하게 유포된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 셈이다. 약물중독자를 위한 재활시설도 변변히 없는 한국의 상황은 문제의 악순환만 초래하고 있는 듯하다. TV 밖을 벗어나면 대중문화가 아니라 소중(小衆) 문화가 된다. 몇 년째 암중모색을 계속해 온 인디 음악을 비롯한 인디 문화들은 아직도 암중모색을 계속하고 있다. 인디 음악 출신의 델리 스파이스와 크라잉 넛 등이 주류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인디'라는 이름을 단 대부분의 문화 생산자들은 아직도 '생계의 마련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정부가 후원하는 <독립예술제>, 한 기업이 주최한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등 인디 문화의 축제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가고 있지만, 그것을 번듯한 비즈니스로 성립시켜 줄 시스템의 구축은 아직도 요원한 상태다. 이런 요원함은 '주류 문화와 독립된 인디 문화가 과연 가능한가(그리고 바람직한가)'라는 의문을 낳고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주류로부터 독립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보다는 전체 시스템의 개혁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비단 대중음악계를 중심으로 하는 연예계의 문제만은 아니다. 여기서 다루지 못한 게임산업, 만화산업, 공연산업 등 한국의 대중문화산업은 저작권제도, 방송제도, 조세·보조금 제도를 보다 합리적으로 정비하지 않으면 대중의 높아지는 문화적 욕구에 부응하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다. 이에 더하여 온라인문화, 인터넷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과제도 추가되고 있다. 이에 대한 전문가적 진단과 합리적 대안의 모색이 '사회의 일반적 관심'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은 2001년 말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사실을 연말 때만 지적하고 연중에는 '바빠서'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적 분위기인 것 같다. 아마도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되고 정착한다면 이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성화되리라고 생각한다. 성인들은 직장에서의 노동으로부터, 학생들은 학교에서의 공부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럴 때 비로소 대중문화를 TV 중심으로(그것도 지상파 TV 중심으로) 논하는 이런 글도 사라질 것이다. 20011122 * [문화예술]에 게재됨. |
OVERVIEW:
앞화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