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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등수'에 민감한 사회다. 만 6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만 18세에 고등학교를 들어갈 때까지 1등부터 꼴찌까지 등수를 매기며, 아니 매김 당하며 자라온 나라에서 등수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공부에 해당하는 이야기고 다른 분야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1등을 지향하는 풍토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계올림픽 종목에서 은메달이라는 호성적을 차지해 놓고도 시상대에 울상으로 올라섰던 쇼트 트랙 선수단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사회의 실세라고 할만한 세력들도 이를 부추기는데 서슴지 않는다는 점이다. S 대기업은 "역사는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지상파에 자랑스럽게 내보낸 적이 있다. 일간신문 C 일보는 '1등주의 신문'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신문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스포츠나 경제처럼 성적이 숫자로 환산되는 분야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등수 매기기에 가장 민감한 분야는 대중음악이다. 영화나 서적 같은 경우도 주간 관객이나 판매량을 집계하고 발표하지만, 대중음악처럼 '감격적 행사'를 치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대중음악은 그렇게 해오고 있고, 그것도 지상파 방송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이른바 '가요순위 프로그램'이다. 아마도 '순위 프로그램 폐지를 주장하는 분이신가보군요'라고 누가 물어볼 것 같다. 맞다. '지겹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한번더 해야 되겠다. 그건 순위 프로그램 폐지를 위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3개 지상파 방송국 중에서 두 방송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한 방송사는 순위 프로그램의 형식만 폐지했을 뿐 내용은 그대로이므로 차제에 한번 더 강조해야 되겠다. '왜 폐지해야 하느냐'고 물어본다면 저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댄다. 그 중에서 방송사와 음반사(및 기획사)의 유착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나아가 객관적 조사에 의지하지 않고 인터넷 투표나 ARS 전화에 의존하는 집계방식은 공신력 면에서 문제가 있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 보다 근본적 문제가 있기 때문인데, 그건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교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A의 음반이 한 주에 1,000장씩 1년 동안 꾸준히 판매되었다고 하고, B의 음반은 한 주에 5,000장씩 10주 동안 판매되고 그 이후는 전혀 팔리지 않았다고 치자. 두 음반의 총 판매량은 모두 50,000장 수준이지만, 순위 프로그램에서는 B의 음반만 나오고, A의 음반은 나오지 못할 확률이 크다. 아마도 해를 넘긴다면 A의 음반은 계속 팔리겠지만, B의 음반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가 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설명의 편의를 위한 것이니 양해해주기 바란다. 물론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만은 아니다. A의 경우 자작곡을 연주하는 경우일 확률이 높고, B의 경우 곡을 받아서 노래하는 경우일 확률이 높다. A와 같은 경우 다음 앨범이 나오면 이전 앨범들도 동반 판매된다는 점은 업계의 속설이다. B의 경우는 한 음반의 라이프 싸이클이 3개월에 그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업계의 속설이다. 결과적으로 A의 경우는 순위에 한번도 들지 못했지만 음반 판매량에서는 앞설 수 있다. 나아가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같은 경우는 유행도 없이 고속도로 휴게소나 댄스교습소 근처에서 꾸준히 팔리지만 정규 음반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이런 모순은 어떻게 해결할까. 미국 등 이른바 문화선진국에서는 '싱글 차트'와 '앨범 차트'를 구분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싱글 차트는 단기에 승부를 보는 '히트곡'의 경연장인 반면, 앨범 차트는 두고두고 사랑받는 음악의 경연장이다. 물론 싱글 차트에 1위를 했다고 해서 난리법석을 떠는 일은 없다. 여기에 덧붙여 다양한 장르별 차트가 별도로 존재하고, 이들 차트는 음반 판매량 외에도 라디오 방송횟수 등에 의해 집계된다. 누구나 다 아는 '빌보드'라는 회사가 집계하는 차트다. 빌보드 외에 다른 차트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에 반해 주간 순위 프로그램밖에 없는 한국의 상황은 대중음악의 유행의 싸이클을 단축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유행가'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한국 대중음악은 여전히 유행가다. 앨범 전체를 공들여 제작하지 않는 관행도 이런 제도와 무관치 않다. 이런 이야기는 음반산업이나 방송산업이 '예술을 무시하고 장사만 한다'라는 비난이 아니라 장사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 예로 비틀즈의 음악은 '고전'으로 남는 반면, 신중현의 음악은 '70년대 가요'가 되어버리는 현상이 오직 음악적인 이유 뿐일까. 왜 비틀스의 음반은 줄줄이 재발매되면서 지금도 판매되는 반면, 신중현의 음반은 중고시장에서 뒤져 봐야 하는 것인가. 이건 단지 이 글을 쓰는 사람이 나이 들어가는 징조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건 한국의 음악산업이 탄탄하게 발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징조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차트가 생겼다. 이른바 '벨보드'라고 불리는 벨소리 차트로 휴대폰의 벨소리에 담길 음원의 인기 차트다. 이건 클릭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니 차라리 공신력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이것 역시 대중음악을 '유행가' 이상으로는 만들지 않는 차트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 '나라가 망한' 수준인 러시아와 아르헨티나에도 자국의 대중음악의 유산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있다. 한국은? 돈 좀 버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없다. 그게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인의 삶이다. 그러다가 언제 한 번 '도대체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지'라는 생각이 들면 대책 없을 때가 많은데.... 20020112 * 방송위원회에서 발행하는 대중문화비평지에 실릴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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