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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c)라는 이름을 듣는 한국인의 반응은 '국내 프로축구에서 뛰는 동구권 용병인가' 정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에미르 쿠스트리차(Emir Kusuturica)의 영화 [언더그라운드], [여왕 마고], [아리조나 드림], [집시의 시간]을 본 사람이라면 독특한 사운드트랙에 대한 인상이 오래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고슬라비아의 영화음악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남(南) 슬라브 연방'이라는 뜻의 유고슬라비아는 이제 갈갈이 찢겨졌으니 그의 국적은 보스니아이다. 게다가 그는 현재 주로 파리에 거처를 정하고 있다. 또한 영화음악가라는 명칭은 그의 왕성한 음악적 실험을 표현하는데 부족한 말이다. 고란 브레고비치의 고향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Sarajevo)다. 사라예보라....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주축으로 한 한국 여자탁구팀이 무시무시한 마녀같은 중공(中共) 팀을 꺾고 한국 구기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제패한 곳' 이외에는 이곳에 대해 별로 아는 바 없다. 아, 맞다. '제 1차 대전의 총성이 울린 곳'이다. 이 사실도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졸았으면 가물가물하겠지만.... 어쨌든 사라예보가 위치한 발칸 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민감한 지역이라서 최근의 비극적인 내전에 이르기까지 분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얄궂고 암울한 정치적 운명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문화는 풍성하기 이를 데 없다. 근대 이전부터 서구의 카톨릭, 동구의 정교, 그리고 이슬람 등 3대 문화권이 충돌한 이 지역은 가히 문화적 용광로다. 브레고비치의 '멀티에쓰닉(multi-ethnic)'한 음악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는 특징이다. 그렇지만 고란 브레고비치가 처음 손을 댄 음악은 록 음악이었다. 그의 표현으로 록 음악은 "감옥에 갈 위험없이 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찬스"였고, 이런 찬스를 택한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비틀스'라는 평을 듣게 된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를 만들어 내었다. 1974년 첫 음반을 발표한 비옐로 두그메는 15년 동안 유고슬라비아에서 음반 판매량 및 공연 청중의 수 등 대중음악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밴드로 군림했다. 비옐로 두그메란 '흰색 버튼'이라는 뜻인데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오리무중이다. 그렇지만 '록 음악을 유고슬라비아화했다'는 평은 대충 감이 잡힌다. 영락없는 록 음악이면서도 쿵짝쿵짝거리는 동유럽 특유의 리듬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10대의 우상으로 살아가기 지겨워서" 1989년 개봉한 에미르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에 영화음악을 맡은 것이 또하나의 찬스였다. 이를 기점으로 그는 음악적 방향을 선회했고, 거기에 1991년 발칸 반도에 내전이 발생하는 곡절까지 겹쳐 영화음악은 10년 동안 그의 주된 직업이 되었다. 미국을 거쳐 파리에 정착한 그는 이 기간 동안 영화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 인물들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업적을 남겼다. [집시의 시간]의 메인 테마에서 술취한 듯 비틀거리는 리듬이 장엄한 곡조와 결합되는 것처럼 극단적인 것들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 그의 탁월한 재능이다. 발칸 지역의 민속음악이 전자 음향과 결합되는 것이나 비트가 '모던'하게 전개될 때면 멜로디는 묘하게 '오리엔털'한 것도 마찬가지 공식이다. 그러나 이런 공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그가 '녹이는' 음악들의 댜양한 스펙트럼이다. 헝가리의 작곡가 벨라 바르톡(Bela Bartok)을 포함하여 슬라브, 집시, 터키, 그리스, 불가리아 등의 민속 음악들은 인근 지역에서 쉽게 채취할 수 있는 음악이라고 치자. 하지만 재즈에 탱고에 모르나(morna)까지 들어와서 뒤섞이는 양상은 '흥미진진하다'는 표현 말고는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문자 그대로 '멀티에쓰닉'한 그의 음악의 성격은 '세르비아인 어머니와 크로아티아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는 출생의 이력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기 힘들다. 한 평론가의 표현처럼 그는 '코스모폴리턴 집시(cosmopolitan gypsy)'다. 터키의 세젠 악수(Sezen Aksu), 그리스의 조르쥬 달라라스(Georges Dalaras), 폴란드의 카야(Kayah) 등 '서방세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나라에서는 수백만장의 음반을 판매하는 국민적 스타들'의 음반에 참여한 것도 그의 음악적 특징과 잘 어울리는 행동들이다. 1995년 고란 브레고비치는 유럽 전역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한 쪽에는 베오그라드의 소규모 오케스트라가, 다른 한편에는 불가리아 합창단이, 중앙 뒤편에는 '웨딩 앤 퓨너럴 밴드(Wedding & Funeral Band)라고 불리는 브래스 밴드가 각각 자리를 잡고 있었다. 중앙에는 퍼커션 주자 오그녠 라디보제비치(Ognjen Radivojevic) 옆에서 흰색 옷을 입은 브레고비치가 전기 기타를 연주한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월드 뮤직'이라는 용언은 이럴 때만 사용하고 아무 때나 남용하지 말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단어를 없애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에게 음악의 미래에 대해 물어볼까나. "틀에 박힌 [나비 부인]보다는 곡조가 맞지 않는 집시 브래스 밴드가 훨씬 낫다", "음악에 대한 고전적 접근은 종말을 고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흠, 역시 심상치 않군... 주) 쿠스트리챠의 1999년 작품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에는 브레고비치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노 스모킹 밴드(No Smoking Bnad)가 음악을 맡았는데, 이들이 별도로 발매한 정규 앨범에는 쿠스트리챠가 직접 기타를 연주했다. 혹시나 둘 사이에 불화가? 브레고비치가 자신의 공연에서 쿠스트리차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수록된 곡들을 연주한 것에 대해 쿠스트리챠가 '왜 영화에 사용되는 곡을 별도의 용도로 사용하는가'라는 불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미확인 루머다. * 인터넷 서점 Yes24에서 발행하는 웹진 <Bookian>에 게재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