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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berto Eco: '현대를 넘어선 새로운 중세'의 베스트셀러 작가P
한 이탈리아인의 고백을 인용해보자. "이탈리아는 웃기는 일들이 일어나는 나라이고, 심지어 정부가 하는 짓거리도 마찬가지다. 다른 나라들은 우리를 좀처럼 진지하게 보아주질 않는다. 마피아와 카모라 때문에 이탈리아인은 목소리크고 소란스러운 국민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박혀 있다". 매춘부가 국회의원이 되는 일을 비롯하여 '웃기는 이탈리아'의 사례들을 나열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글도 꽤나 웃긴다. 사전 정보가 없다면 그의 외양도 코믹하게 보일 것이다. 그는 머리숱이 거의 사라지고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검은색 뿔테 안경을 걸친 마스크 뿐만 아니라 '청바지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헤비급 체구를 가졌고, 그래서 때로는 코알라곰처럼 보이고, 때로는 코미디언(이나 개그맨)처럼 보인다.
불경스러운 발언은 이제 그쳐야 할 듯하다. 그가 글이나 말로 연출하는 웃김은 '하이브라우(highbrow)'라는 수식어를 반드시 달아야 한다. 지식인적, 교양인적 이라는 뜻이다. 달리 말해 그의 글에 담긴 유머와 아이러니를 제대로 느끼려면 상당한 지적 소양을 쌓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그가 쓴 '잡글'(주 : 한국 학계에서 '저널리즘 평론'을 지칭하는 속어)이야 이해 안가는 부분은 넘어가면서 읽어나갈 수 있지만 학술적 저술은 전혀 딴판이다. 수십개의 학위를 가지고 있고 지금도 볼로냐 대학에서 기호학, 언어철학, 커뮤니케이션학을 강의하고 있는 그의 수많은 학술 저작들은 전공자인 교수나 대학원생들끼리나 볼 성질의 것들이지, 비전공자라면 몇 페이지를 들춰보지 못하고 서가에 고이 꽂아둘 것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술 서적을 접하기 전 {장미의 이름}(1983)이나 {푸코의 진자}(1988)라는 소설책을 접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소설들도 만만치 않게 어렵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는 백과사전같은 지식이 등장하고 있고 플롯도 전통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 스토리를 요약하는 일조차 힘들다(혹은 아무 의미도 없다). 정말 진자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할 뿐인 {푸코의 진자}같은 경우 영미권의 기자들은 '읽힌 것보다는 팔린 게 더많은 more bought than read'이라는 표현으로 합의를 보고 있다.
학술연구자라면 누구라도 주(註)와 인용문들을 몽땅 지워버리고 사실을 과학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현실과 환상을 뒤섞은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물론 그 책이 '재미있는' 베스트 셀러가 되면 더 좋을 것이고, '진지하다'는 평을 받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에코는 이런 학자들의 '세속적'인 꿈을 실현시킨 인물이다. 이에는 에코의 저작을 토대로 장 자크 아노(Jean Jeacque Annaud) 감독이 만든 영화 {장미의 이름}의 덕이 커 보이지만,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소설책이 수백만권 팔렸다는 사실 앞에서 너무 과장할 것은 못된다.
에코의 업적의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대중 문화와 고급 학문을 접속시켰다는 '사실'은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기호학 서적을 추리소설처럼 읽고, 추리소설을 기호학 서적처럼 읽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모두가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그가 이런 소신을 실천해 온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소설을 쓰는 것 외에도 1970년대 중반부터 <레스프레소 L'espesso>지 등에 주간 평론을 기고하여 테러리즘과 사형제도같은 무겁고 정치적인 주제 뿐만 아니라 청바지와 축구같이 가볍고 일상적인 주제까지도 다뤄 왔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더불어 슈퍼맨(!)이 평생을 걸친 연구대상이 되고, 매킨토시는 카톨릭에 IBM은 프로테스턴트에 각각 비유된다(윈도우는 성공회에 비유된다).
에코가 이런 대상들을 '제대로' 분석하고 있는가, 혹은 그의 이론이 '올바른가'를 논할 수는 없다. 또 정치적 개입으로부터는 늘 한 발 떨어져 있었던 인물이 제창하는 '기호학적 게릴라전'이 얼만큼의 정치적 효과를 가지는가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아카데미 내부에서 고담준론을 행하던 인물이 '팔아먹기(selling-out)'라는 비난을 잘 피하면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에코는 헐리웃 스타나 록 스타들과 비슷한 풍요한 라이프스타일을 누리면서 지내고 있다. 강의, 세미나, 컨퍼런스, 인터뷰 등으로 '월드 투어'를 다니며, 여름 휴가 때는 17세기에 건립된 봉건 영주의 장원(!)을 개조한 별장에서 40,000권의 고서를 뒤적인다. 현대가 "포스트모던(後近代)이 아니라 새로운 중세(新中世)로 나아가는 길목"이라는 자신의 말을 몸소 실천하는 것일까.
나이든 대스타들이 어쩌다 한 번 은막에 나타나거나 음반을 발표하는 것처럼, 그도 1995년에 세 번째 소설을 발표했다. <지나간 시기의 그 섬 The Island of the Day Before>이라는 소설은 17세기 중반 난파선에 실려 남태평양에서 표류하는 청년의 스토리다. 이 소설에 대해 <<USA Today>>지는 "모든 지식이 유동적인 시대에 대한 흥미를 갖게 한다"라고 말하고, 그 시대는 현대와 유사하다는 평을 추가했다. '현대가 새로운 중세'라는 말은 이런 뜻에 보다 가까울테지...
1999.2.25.
<씨네 21>에 게재됨.
ⓒ1999 신현준 (gilles@nownuri.net)
참고 사이트
http://www.rpg.net/quali/libyrinth/eco
http://www.geocities.com/CollegePark/Union/9836/hyperreality.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