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어느 혁명가의 초상, 그리고 비지니스
‘1980년대 한국’에서 그를 만난다는 것은 <라틴 아메리카 혁명사>라든가 <사회주의 경제 건설론> 같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골치아픈 이론서는 ‘전위’들이 주로 보는 것이었지만,이보다 열배는 흥미로운 <영웅전>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중간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나 의사로 근무하던 인물이 좌파 혁명가가 되어 쿠바혁명을 성사시킨 뒤 혁명의 확산을 위해 안데스산맥에서게릴라전을 수행하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산화한 이야기’는 진중하고 장엄했다. 특히 물과 식량도 바닥나고, 동료들이 하나둘씩 총탄에 쓰러지고, 평소의 지병인 천식에 시달리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추호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는 마지막 장면은 숙연하기만 하다.
이상의 정치적 신화는 이런 지면에서 다루기는 어색해 보이지만 다음 이야기는 그럭저럭 어울릴 것이다. 1990년대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생 기숙사에서 그의 포스터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포스터로 보는 그의 이미지는 예수 그리스도 빰치게 잘생겼고 형형한 눈빛과 긴 머리 그리고 멋진 턱수염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제임스 딘이나 짐 모리슨처럼 ‘반항아’(rebel)로서 영원한 컬트의 대상이된 것이다. 그가 그려진 T셔츠도 대학생들의 애호품이고, 레이지어겐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이라는 ‘1좌파 하드코어’ 록 밴드는 데뷔 앨범에 그의 이미지를 수록해서 ‘정치’와 ‘비즈니스’ 양면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일도 있다. 10여년 전 쯤 대중음악 저널 <Spin>은 체 게바라와의 가상대담을 실으면서 그를 짐 모리슨(Jin Morrison: 록 밴드도어스의 리더)에 비유하고, 제리 가르시아(Jerry Garcia: 록 밴드 그레이트풀 데드의 리더)를 피델 카스트로와 비유했다. 앞에서예를 든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피델 카스트로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상징한다면, 게바라는 ‘젊어 죽은 이=영원히 사는 이’(He Dies Young=He Lives Forever)를 상징한다.
그가 쿠바에서 권좌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현재의 인기를 누릴수는 없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표현처럼 그는 ‘이유(혹은대의)를 가진 반항아’(rebel with a cause)일 뿐만 아니라 ‘따뜻한 심장을 가진 반항아’(rebel With a Heart)로서 추앙받고 있다. “증오는 투쟁의 요소다”라는 그의 지론에서 풍겼던 ‘냉혈혁명가’의 이미지는 동키호테적 모험가, 낭만적 이상주의자, 영원한 열혈 청년이라는 ‘쿨’한 이미지에 압도당한 것이다. 그가 죽은 지 정확히 30년이 되는 1997년 체 게바라의 ‘인기’는다시 한번 드높아졌다. 한해 동안만 해도 게바라의 생애를 다룬새로운 전기가 7종이 출시되었고, 다큐멘터리도 4종이 제작되었다. 이들 모두 대체로 잘 팔려나갔고, 그중에는 게바라 본인의 생애를 다룬 것이 아니라 ‘게바라를 묻은 사람’을 다룬 책도 포함되었다.
‘게바라가 그려진 T셔츠를 입을 수 없는 유일한 나라’였던 고국아르헨티나의 정권도 군사정권의 잔재가 청산되면서 “우리의체게바라”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한 신문은 “체가 돌아왔다”(Che Is Back)라는 제하의 기사를 냈고(아마도 야구실력이 들통난 마이클 조던이 농구코트에 돌아오면서 겸연쩍게 한 말을 패러디한 것이리라), <언제나 이길 때까지>(Until Victory Always)라는 헌정영화도 제작되었다. 물론 출연배우들은 아르헨티나의 보통젊은이들처럼 ‘게바라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이었지만. 볼리비아 정부도 게바라 신드롬을 한몫 거들었다. 체 게바라를 직접 체포했다는 퇴역 군인들을 시켜 게바라의 시신을 발굴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다소 뜻밖의 사실은 정작 게바라를 가까이서 보았던 볼리비아의 농민들은 게바라가 자신들을 구하러 온 해방군인지, 낯선 외국의 침략자인지 긴가민가했다는 점이다. 게바라가오기 전 시행된 농지 개혁으로 “게바라는 우리에게 해줄 것이 별로 없었다”고 고인이 들으면 다소 서운할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유골이 발견되더라도 본국으로 송환하지 말고, 그곳에 게바라를 기념하는 박물관을 세워 보관할 것을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유골을 발굴하는 2주 동안 농민들은 횃불로 “Che Lives”라는 글씨를 만들어 현장을 환히 비추었다고 한다. 이들은 아직도 게바라에 대한 애증이 남아 있는 것일까. 물론박물관이 생기면 관광수입이 쏠쏠할 거라는 생각도 없지 않겠지.게바라 신화가 영원할수록 게바라 산업도 영원하다! 빌어먹을.
연보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중간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남
50년 초 의사가 된 후 라틴 아메리카 각지를 여행하면서 좌파 혁명가가 됨
53년 과테말라의 좌파 정부 아르벤즈(Arbenz) 정권에 참여했다가
54년 우익 쿠데타 이후 멕시코로 망명, 카스트로 형제를 만남
56년 쿠바의 오리엔테 주에 상륙
59년1월2일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사시킴
59∼65년 중앙은행 총재와 상공부장관을 역임하면서 경제건설에 주력
60년 <게릴라전>(La guerra de guerrillas)
65년 <쿠바에서의 인간과 사회주의>(El socialismo y el hombre en Cuba)
66년 볼리비아로 잠입
67년 볼리비아의 발레그란데(Vallegrande)에서 진압군에 체포되어 살해됨
1999.4.29.
<씨네 21>에 게재됨.
ⓒ1999 신현준 (gilles@nownuri.net)
참고 사이트
http://www.weil.com/user/uki/che-2.htm
http://www.igc.apc.org/dollars/issues/1997_07/che.html
http://www.tezcat.com/~juanyen/che.html
http://www.nando.net/newsroom/ntn/world/122495/world632_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