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 ICONS:

빌헬름 라이히 (Wihelm Reich): 성 혁명가, 또라이 과학자

빌헬름 라이히(Wilelm Reich)라는 인물을 '20세기 팝 아이콘'으로 다루려니 뭔가 멋쩍다. 하지만 1960년대 구미 사회의 뉴 레프트(New Left) 운동과 반문화 운동 시기를 떠올리면 아니란 법도 없다. 그의 저서 {성 혁명}(1930)은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과 더불어 대학가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벌거벗은 히피들의 집회에서는 라이히의 사진이 붙은 피켓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저작권료를 챙기기는커녕 저서가 소각 당하는 불운 끝에 1957년 옥사(獄死)했다.

그렇지만 라이히가 투옥된 이유가 정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라이히를 '약장수'이자 '정신병자'(심하게 말하면 '미친 노인네')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하긴 그의 행적이 좀 이상하긴 했다. 1939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임상심리학 강사를 전전하던 오스트리아의 과학자가 2년 뒤 FDA에 '에너지 축적기'라는 기기(및 치료법)의 특허를 출원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특허출원은 기각 당했지만,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사설 연구소를 설립하여 "만물의 실재가 이것으로부터 나온다. 이 원초적 질료의 이름은 오르곤", "우주의 역사는 오르곤 에너지와 원자 에너지의 대립"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이렇듯 그가 위험 인물로 지목된 것은 '불온'해서가 아니라 '황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라이히 본인은 자신의 투옥이 '빨갱이 파시스트(즉, 스탈린주의자)'들의 음해의 소산이라고 생각했다(즉, 투옥이 '정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의 고위층이 중하위직 공무원들의 오류를 시정하고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망상에 사로잡힌 '반공주의자'가 1960년대 '좌파'의 우상이 되었던 사실은 아이러니다.

업적이 광범한 만큼 라이히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청년 라이히는 촉망받는 정신분석가이자 열혈 공산주의자였고, 그래서 아직도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효시'라는 칭송(과 비난)을 받는다.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생식기의 오르가즘에서 모든 노이로제의 처방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론' 때문에 프로이트로부터 파문당하면서다. 1928년부터는 비엔나에 성위생 상담소를 개설하여 노동자들에게 피임, 낙태, 출산 등을 주제로 급진적인 성교육을 실시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파시즘과 공산주의 양측으로부터 '왕따'가 되었다. 상담소는 폐쇄되고 1차 분서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의 대중심리}(1933)는 아직도 파시즘에 대한 선구적이자 탁월한 분석으로 남아있다.

라이히의 사상(혹은 '증상')이 더욱 심오해진 것은 베를린, 코펜하겐, 오슬로, 뉴욕 등지로 망명 생활을 할 때부터다. 라이히는 점차 성적 억압과 계급 지배를 연관지으려는 사고를 포기하게 되었다. '사회경제적 억압보다 더욱 근본적인 무질서와 싸워야 한다'는 발상은 해괴한 실험으로 이어졌고, 앞서 언급한 '오르곤 에너지의 발견'은 대전환을 가져왔다. 그는 천체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안하여 이를 오르고노미 Orgonomy라고 불렀고, 아리조나의 사막에서 오르곤 에너지를 이용하여 비를 내리는 실험을 전개하여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결과는 물론 실패).

그렇지만 그가 죽자마자 라이히의 이론들은 '대중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다. 뉴 레프트 학생운동가들은 {파시즘과 대중심리}를 읽고 '사회적 억압과 심리적 억압의 상호관계'을 발견하려고 애썼고, 히피의 골수 '프릭(freak)'들은 {성 혁명}에서 '자유의 진보는 리비도의 해방'이라는 주장의 전거를 찾으려 했고, '인간잠재력 운동(human potential movement)'이나 '신과학 운동'의 주창자들은 생 에너지와 우주 어쩌구하는 라이히의 후기 사상에 주목했다. 1978년에는 라이히의 유지를 계승하려는 제임스 드메오(James DeMeo)인물에 의해 오르곤 생물리학 연구소(Orgone Biophysical Research Laboratory)가 설립되었고, 현재는 오레건(Oregon)의 경치좋은 산중에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그 이전부터 미국의 베이트슨(G.Bateson), 영국의 랭(R.D.Laing), 프랑스의 가타리(F lix Guattari) 등으로 대표되는 '대안적 정신의학(alternative psychiatry)' 운동'에서 라이히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마치면서 공상 하나. 만약 라이히가 더 유명해지면 한국에서는 어떤 대우를 받을까? 대부분은 성 도착자로 치부할 테고, 덜떨어진 리버럴들은 성 해방자로, '구성애주의자'들은 성 교육자로, '쿠울'한 운동권은 성 정치가로 예우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신비의 묘약의 조제자', '비아그라의 원조'로 사기칠 인간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약력

1897년 오스트리아 갈리시아에서 출생

1915년 제 1차대전 동안 중위로 참전

1918년 비엔나 대학 입학

1919-1927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종합진료소>에 근무하고, 비엔나 정신분석학회 회원이 되고, 비엔나 세미나를 창설하여 정신분석 요법을 연구

1927년 {오르가즘의 기능} 출판하고 프로이트와의 의견대립이 발생.

1928년 비엔나에서 <성위생상담소>를 개설하여 성 교육 실시

1930년 {성혁명} 출판하여 프로이트의 '문화철학' 비판. 베를린으로 이주

1931년 [성정치출판사] 설립하여 프로이트와 맑스의 이론적 통합을 시도

1932년 독일 사민당 및 공산당, [성정치출판사]의 출판물 배부 금지

1933년 {파시즘의 대중심리학} 출판 그해 말 덴마크로 이주

1934년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 라이히를 공식적으로 추방. 노르웨이로 이주

1934-37년 정신분석과 생물리학을 가르치면서 [성경제생활연구소] 경영

1939년 생명과 성욕에 고유한 에너지인 '오르곤 에너지'를 발견. 뉴욕 이주

1939-41 뉴욕 뉴 스쿨(New School)의 임상심리학 교수로 재직

1941년 '에너지 축적기' 특허 출원 및 기각당하고 FDA의 금지명령 조치.

1942년 메인(Maine) 주 랑젤리에 사설 연구소 오르고논(Orgonen) 설립.

1954년 아리조나에서 오르곤 에너지를 이용한 비를 내리는 실험.

1956년 FDA에 의해 모욕죄로 기소당해 2년의 실형을 선고받음.

1957년 코네티컷의 던베리 형무소에 수감. 망상성 정신병을 선고받고 펜실베니아의 레비스버그 교도소로 이감. 그해 11월 사망.

참고 사이트

http://www.hb.north.de:6160/e_reich1.htm

http://id.mind.net/community/orgone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