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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최 (Victorr Tsoi):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아니, 아니, 상뜨 뻬제르스부르그의 마지막 영웅

고(故) 빅토르 초이가 출연한 영화 이 한국 땅을 찾아왔다는 시의성은 있지만, 그가 여기서 다뤄지는 데에는 모종의 '애국심'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확언하기 힘들다. 아무리 '로컬 히어로'라고 해도 대중문화계에서 앵글로-아메리칸이 아니면 명함을 내미긴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의 록 영웅이 대중문화계의 변방에서 탄생한 사실은 주목해 볼만한 일이다. 물론 '오버'하면 안된다.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강대국이 있던 시절 그곳의 대중음악의 주류는 <<모래시계>>류의 멜로드라마 삽입곡(요시프 코브존의 <백학>)이나 국내의 한 트로트 (여)가수의 번안곡(알라 푸가초바의 <백한송이 장미>)같은 것들이다. 거기에는 '상업 음악'이란 게 없었으니 음악을 업(業)으로 삼은 이들은 '프로페셔널'이었고, 아니면 모두 '아마추어'였다. 1960년대부터 '밀수'된 서양의 록 음악은 바이러스처럼 '사회주의적 생활양식'을 타락시키면서 무수한 아마추어 그룹들을 만들어내었다. 처음에 이들은 서양의 록 밴드를 모방하는 일을 신성한 사명이자 일생일대의 목적으로 삼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서방 세계'에 간헐적으로 소개된 록 밴드들, 예를 들어 고르키 파크(Gorky Park)나 상트 뻬쩨르스부르그(St.Petersburg)같은 메탈 밴드가 그런 경우다. 즈부키 무(Zvuki Mu)와 아비아(Avia)같이 '카바레 팝'을 아방가르드하게 전개한 록 밴드도 한때 관심을 끈 일이 있다.

그렇지만 전국민적 영웅은 '수출용'과는 좀 달랐다. 러시아의 록 공동체가 언더그라운드라든가 반문화라고 불릴 수 있는 현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록 음악이라는 바이러스가 러시아의 포크송(정확히는 바드 송 bard song)이라는 숙주(宿主)와 만나면서부터다. 안드레이 마하레비치(Andrei Makharevich)가 이끈 타임 머신(Mashina Vremia)이 아마추어 출신으로 프로페셔널 그룹이 된(그래서 '셀링 아웃'이라고 비판받은) 최초의 경우라면, 보리스 그레벤시코프(Boris Grebenshikov)가 이끈 아쿠아리움(Akvarium)은 '언더그라운드 록의 맏형'이자 영적 지도자로 남은 케이스였다. 록 공동체의 '체제의 기생충'들은 근로시간이 적은 직업을 택하고, 취업한 뒤에도 결근을 밥먹듯 하고, 손가락을 다치게 해서 징병을 기피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식 사회와의 절연 dissociation'이라는 반문화의 윤리를 실천했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現 상뜨 뻬쩨르스부르그)처럼 록 공동체가 활성화된 대도시는 "행동의 중심"이 되었고 록 공연장은 "신성한 사원"이 되었다.

빅토르 초이와 그의 밴드 키노(Kino)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의 그림자 아래에서 경력을 시작한 러시안 록의 '뉴웨이브'에 속한다. 1980년대 초 키노는 '통기타 듀오'였고 음악 역시도 '통기타 코드'에 기초한 범상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도 저음의 카리스마적인 보컬에 실린 가사의 메시지는 심상치 않았다. "시간은 있지만 돈이 없어", "손과 발은 얼어붙고 앉을 데가 없어"라는 가사는 '소비에트 청년들의 일상의 경험과 진솔된 감정을 표현한다'는 반응을 얻어냈다. 때마침 1980년대 초 소비에트 정부는 언더그라운드 록을 '합법화'시키려는 조치를 취했고 다소의 우여곡절 끝에 페레스트로이카(아! 얼마만에 들어보는 단어인가)가 이어졌다. 키노는 콘스탄틴 킨체프(Konstantin Kinchev)의 알리사(Alisa), 유리 셰브추크(Yuri Shevchuk)의 D.D.T. 등과 더불어 '상뜨 뻬쩨르스부르그 씬'을 이끌었다. 음악 스타일도 전자음향의 실험을 포함한 일렉트릭 사운드로 변화하였고, 가사의 메시지도 변화를 위한 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988년 <<혈액형>>에 실린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We Need Change>는 시대의 송가가 되었다. 낭만적 게으름뱅이(romantic idler)가 인민의 영웅이 되는 순간이었고, 빅토르 초이는 1980년대 중후반이라는 의미심장한 시기의 상징이 되었다. 마침내 1990년 모스크바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키노의 콘서트에는 1984년 모스크바 올림픽 이후 두 번째로 10만 관중이 운집하는 '전설'이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혁명가, 군인, 과학자 등이 '인민 영웅'인 나라에서 음악인이 '마지막'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절차가 남아 있었다. 빅토르 초이는 1990년 8월 15일 음반 발매를 목전에 두고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가 묻힌 보고슬로프스키 공원에 가면 그의 '개인 숭배' 현상이 관찰된다. 그의 팬들은 교대로 무덤을 지키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그의 노래를 부르고, 관광객 등 '외부인'들의 질문에는 불친절하게 답변한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도 '빅토르 초이의 벽'이 있다.

그렇지만 빅토르 초이 뿐만 아니라 영미 외의 국민적 록 영웅의 이름이 '로큰롤 명예의 전당'같은 곳에 올라갈 전망은 거의 없다. 게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러시아나 대중음악계도 '한국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마지막 영웅마저 사라진다면, 그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다국적 문화산업의 식민 지배의 재림을 한탄해야 할까, 아니면 문화적 잡종화(hybridization)를 통한 변이를 다시 한 번 기대해야 할까.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 질문은 집어치우는 편이 낫다. 영웅시대여, 안녕!

* 연보

1962년 뻬쩨르스부르그에서 빅토르 초이 탄생

1981년 빅토르 초이, 알렉세이 루빈과 더불어 뻬쩨르스부르그의 《록 클럽 Rock Club》에서 듀오로 연주.

1982년 키노의 '비합법' 데뷔 음반《45》 발표.

1984년 키노 4인조로 재편성하여 《캄차카의 매니저》발표.

1986년 상트 뻬쩨르스부르그의 선배 밴드들인 아쿠아리움(Aquarium), 알리사(Alisa), 스트레인지 게임(Starnge Game)과 함께 편집 앨범 《Red Wave》를 미국 시장에 발표.

1988년 키노, 《밤 Noch》,《혈액형 Gruppa Krovi》 발표.

1989년 빅토르 초이와 키노, 솔로비에프 감독의 영화 《아싸 Assa》, 누르그마노프의 영화 《바늘 Igla》 등에 출연.

1990년 빅토르 초이, 교통사고로 사망. 유작 앨범 《블랙 앨범 Chernyi Album》발표.

1991년 8월부터 매년 뻬쩨르스부르그에서 추모 공연 개최.

참고 사이트

http://www.music.ru:8080
러시안 록의 데이터 베이스. 등록된 앨범의 거의 전곡을 리얼 오디오로 감상할 수 있다.

http://www.plametaquarium.com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와 아쿠아리움의 준공식 홈페이지. 자료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http://www.tsoi.nim.to/~tsoi/index.php3
'가사번역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키노와 빅토르 초이에 관한 국내의 팬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