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 ICONS:
심슨 (The Simpsons): 미디어 중독자를 위한 해독제P
"난 멍텅구리야. 엉엉엉" "언젠가는 큰 사고 칠 줄 알았다니까".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다. 바로 심슨 얘기다. OJ 심슨이 아니다. 맷 그뢰닝(Matt Groening)이 창조한 캐릭터, 호머 심슨과 바트 심슨 부자 말이다. 토요일 아침도 아니고 프라임 타임에 편성된 <심슨>은 '만화영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공식을 깨뜨렸다. 물론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심슨>은 이른바 'X세대(Gen X)'의 아이콘으로 군림하고 있다.
작은 도시 스프링필드를 배경으로 하는 심슨 가족의 이야기는 10년 가까이 포맷을 바꿔 가면서 200 여 편이 매주 펼쳐졌다. 아버지 호머 심슨은 원자력 발전소에 다니며 도넛과 맥주를 가족보다 더 좋아하며, "댈러스 카우보이스 구단을 사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는 '전형적인' 미국 (백인) 남자다. 어머니 마지는 현명하고 사려깊으며, 강해보이지만 가끔은 여리고 감상적인, 역시 전형적인 미국 (백인) 여자다. 뾰족머리 '스케이트보드 보이' 바트는 공부에는 전혀 관심없는 열등생이며 말썽꾸러기지만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별머리 리사는 우등생이지만 때로는 바트와 '모(Moe)의 술집'에 장난 전화를 걸면서 낄낄거리며 좋아한다. 그리고 아기인 매기는 언제나 평화롭다.
<심슨>은 삐그덕거리는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담은 시트콤의 변형이지만, 이를테면 <코스비 가족(The Cosby Show)>처럼 '완벽한' 가족이 아니라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조지 부시는 대통령 재임 시절 '가족의 가치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심슨>을 직접 공격받기도 했다. '나는 지진아인 내가 자랑스러워'라는 문구가 적힌 바트 심슨 티셔츠는 보수적인 학부모 단체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아 많은 학교에서 금지되었다. 물론 불티나게 팔려나간 다음이었지만.
<심슨>은 마이너리티를 겨냥한 전략을 내세우던 팍스(Fox) 텔레비전과 죽이 잘 맞는 '파격적인' 프로그램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반미국적이고 반가족적인 '파괴적인' 프로그램은 아니다. <심슨>의 많은 에피소드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인 미국적인 가족의 도덕으로 돌아오고, 미국식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을 표현함으로써 평온을 되찾는다. (사족 1: 따라서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노선을 가진 사람이라면 불만스럽다).
하지만 심슨의 매력은 건설적 비판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냉소와 풍자와 빈정거림, 대중문화에 대한 암시와 패러디에 있다. 이런 사회적 코멘트는 직설적이거나 노골적이지 않으며 쇼의 곳곳에 숨어 넌지시 말을 건넨다. 따라서 <심슨>을 보는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는 곳곳에 숨겨진 풍자와 패러디를 찾아내는 것이다. 5%의 시청자만이 알아챌 수 있는 농담으로 채워져 있는 심슨의 대사와 디테일은 미국인, 특히 '미디어에 중독된 미국인'이 아니라면 알아채기 힘들다(사족 2: 미국 대중문화를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두 번째 불만이다).
바트와 리사가 낄낄거리면서 즐겨보는 피와 살이 튀는 폭력 만화영화 '이치 앤 스크래치 쇼'는 <톰과 제리>를 패러디한 것이며, 텔레비전과 '텔레비전 폭력'에 대한 '셀프 레퍼런스'다. <사이코>부터 <타이타닉>에 이르는 영화, <멜로스 플레이스>나 "x"같은 TV 시리즈도 패러디의 대상이다. 조지 부시와 클린튼 등 정치인도 직접 초대되어 조롱거리가 되고, 때로는 시장, 교장, 목사처럼 따분하고 속물적인 캐릭터로 변신하여 등장한다.
그런데 고작 대중문화와 매스 미디어를 만지작거리면서 키득거리는 정도의 깊이 없는 텔레비전 쇼가 X세대의 아이콘이라고? 그렇다.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미디어에 빠져있는 X세대에게 사실은 그 미디어가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걸 일러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X세대가 미디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점이자 미디어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식이다(사족 3: 미디어가 자기의 메시지를 정확하고 투명하게 전달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진 이에게는 마지막 불만일 것이다).
1999. 10. 20.
이정엽(evol@nownuri.net)과 함께 쓰고
<<씨네 21>>에 게재됨.
ⓒ1999 신현준 (gilles@nownuri.net)
<<연보>>
1987년 팍스(Fox) 텔레비전 <트레이시 울먼 쇼>의 30초짜리 삽입 애니메이션으로 시작.
1989년 '크리스마스 스페셜' 방송.
1990년 30분짜리 시리즈로 발전.
현재 1999-2000년 시리즈(시즌 11)이 방송 중.
<<참고 사이트>>
http://www.digimark.net/TheSimpsons/index.html
http://www.mbnet.mb.ca/~daverh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