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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새해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라 제목의 글에서 '총선 때 신문이나 뉴스 보지 않고 투표하지 않기'와 '남북관계 개선된다고 그럴 때는 국내 정치판 변화에 조금 신경쓰기'라고 말했는데 '예상대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 신통하고 놀라운 예지력이여. 차제에 전업이나 해볼까. 여성지와 월간지에서 "남북 정상회담 예언한 역술인"이라고 때려주기만 하면, 그리고 미아리 고개에 사무실 차리고 병풍 치고 한복 입고 앉아 있으면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룰텐데. 아, 이 무슨 개소리냐. 이 글이 지면에 실릴 때 즈음이면 남북 정상회담 깜짝 발표를
둘러싼 시끌벅적한 이야기도 일단락되어 있을 듯하다. 격세지감이다.
뭐가? 예전에는 나중에 '사건의 진상'이 밝혀져야 '아, 그랬구나'라고
무릎을 쳤지만, 요즘은 발생 직후부터 '정부의 의도'를 헤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실향민인 아버지조차 휴지가 되어 버린 동화은행 주식은 아직도
고이 보관하고 있어도 이번 일에는 큰 기대가 없으시니 말이다. 그래도 '정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50년 분단 세월을 넘어 남북관계에 진전이 생기는 일을 반대할 명분은 없다. 고향에 두고 온 혈육과 상봉하는 일을 무심히 본다면 감정이 메마를 대로 마른 사람일 것이며, 미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북송을 꺼림칙하게 여긴다면 인생보다 이념을 선호하는 것이므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이미 북한 어딘가에 원전 기술자가 파견되어 있고, 일반인들도 돈만 있으면 유람선 타고 금강산도 왔다갔다하는 시대에 말이다. 원색적 비난을 늘어놓은 야당 정치인들도 정말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의 목소리는 '내가 못한 걸 남이 하니까 배 아파서', 그러니까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역사적 과업의 논공행상에서 소외되리라는 시기심에서 나오는 것 이상이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왠지 통일은 내가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 다가올 것만 같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지만 남북간 왕래가 자유로와지고 통일이 가까워온다고 해도 반갑지 않을 일들만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실무협의차 남북을 왕래할 각계의 원로 인사들의 얼굴이 떠오르는데 아무래도 내가 바라는 일을 추진하실 것 같지는 않고, '통일의 염원을 담은' 어쩌구 하면서 대량살육될 소떼가 건너간 일이 반복된다면 최근 동물보호론자가 된 나의 성향과 충돌한다. 이산 가족 상봉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사적 감정을 사적으로 남겨두지 않는 한국 TV의 생리 상 과잉감정의 신파조로 엮어갈 것도 뜨악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북한 전체의 토지를 거대한 투기장으로 만드는 일은 큰손 아니라 보통 남한인의 잔머리(이른바 JQ)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중국 조선족과의 교류 이후 드러났듯 동포들 사기치는 솜씨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리 만무하다. 북한 지역은 인공제설기를 사용할 필요도 없으니 스키장과 콘도를 건설하기 위해 포크레인으로 이 산 저 산 헤집으면서 흉물스럽게 깎아대기 바쁠 것이다. 위락시설이 있으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부대시설'을 위해 순진한 북한 처녀들을 '룸 싸롱 아가씨'로 만들어버릴 조직도 암약하는 데 지장없다. 좀 '오버'했나? 아무튼 남북간 왕래의 시기와 수순과 상관없이 '돈 있고 빽 있는 사람 먼저'라는 원칙은 요지부동일 것이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던 시절 한국이 발전 없는 '식민지 사회'라고 우기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옛날 일을 들추는 건 비겁한 일이지만, 그때는 '한국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 후진국과는 좀 다르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있어서 고민스러웠다. 현실은 무언가 이루어지더라도 짜증나는 식으로 이루어지거나, 아예 이루어지지 못해서 절망과 탄식을 안겨주는 것 둘 중 하나라서 판단이 헷갈렸다. 요즈음의 생각은 아무래도 전자로 기운다. 경제 성장도, 정치 민주화도, 올림픽 개최도, 심지어 최근의 정보화도 모두 마찬가지다. 까놓고 얘기해서, 이제껏 이 정도도 못 이루고 있는 여타 후진국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에 자리잡고 있고, 나도 그런 속된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그래서 이번에도 걱정이 든다. 1994년처럼 양국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에게 갑자기 변고가 생겨서 모든 게 무산되는 일 말이다. 저쪽 사정이야 잘 모르지만 이쪽 대통령은 보통 직장을 다녔다면 정년 퇴임한 지 20년은 족히 넘은 분이고, 이번 선거에 신경 쓴 일도 많아 보여서 은근히 걱정된다. 내가 이걸 왜 걱정하지? 하긴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어쨌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살아온 듯하다. 그래 좋다. 나(혹은 '우리')까지만 그러자. 꾸욱. 20000413 * <씨네 21>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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