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프 라인'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나의 외모에 놀라움을 나타내는 사람이 종종 있다. 빈약해진 기억력을 더듬어 보아도 올해 들어서만 너댓 번은 족히 된다. 상대방은 대체로 기자 '나부랭이'들인데, "글과는 참 다르시네요"라는 게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평론가 '나부랭이'에게 관심을 보내주는 사실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이지만, 글과 이름으로 접했을 때와는 '다르다'는 뜻이 분명하므로 유쾌하게 넘어가지 못할 때가 많다. "어디가 어때서", "지는
뭐 별 다르나?"라는 볼멘 소리로 속이 부글부글 끓고 표정과 말투의
관리에도 점차 많은 신경을 소모하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려오면
일순 멍해진다. 글을 보았을 때는 참 '샤프'한 인물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
접하니 '마음좋고 푸근한 아저씨'같다는 것이다. 조금 매너를 갖춘 나부랭이들은
"상반신은 20대인데, 하반신은 40대네요", "사진 찍을
땐 가슴 위로만 찍으세요"라는 위로성 언사를 덧붙이지만, 대화의
소재를 바꿔버리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다. 친하게 지냈던 사람을 만나도 사정은 낫지 않다. 대체로 "몸이 많이 불었네"라는 말로 '오랜만의 인사'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논문 아직 안 썼냐?"는 말보다는 낫지만 기분이 개떡같은 건 똑같다. 몇 년 째 바지 사이즈는 그대로인데, 저렇게 말하는 건 "예전의 나의 샤프하고 날렵했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일거야"라고 속으로 자위하는 수밖에 없다. 하긴 나도 별 수 없다. 예전에 김정환과 황지우의 '모던'한 시를 읽고 난 뒤, 해태 타이거스 덕아웃에나 앉아 있으면 '딱이다' 싶은 실물을 보고 '으악'했던 기억이 있으니... 이제까지 한 말은 웃자고 한 말이다. 사실은 "그냥 솔직하게 '실망했다'라고 말하세요"라고 맞받아치는 여유가 생긴지도 꽤 되고, 불어난 몸에 대한 핀잔도 "보태준 거 있냐?"고 웃는 얼굴로 한마디 쏘아붙이면 그만이다. 물론 속마음은 다르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지겹다고 그러겠지만, 나를 포함하여 '배둘레햄'으로 상징되는 현대인의 비만은 일종의 직업병이자 산업재해라는 게 나의 소신이다. 밤낮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나 두들겨대고 있는데 정우성이나 차승원같은 체형이 될 리 있냐고? "운동 좀 해라"는 진심어린 충고도 있지만, 주당 근로시간이 50시간을 넘는 남한민국에서 운동이라도 제대로 할 만한 충분한 여가가 있냐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되고 때로는 줄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형국이니 할 짓 아니다. 주위에는 도(道)나 기(氣)를 건강의 수단으로 삼는 이도 있지만 신비주의자가 되기에는 히피 물이 덜 들었고... 그래서 "건강과 효율이란 여피의 에토스"이라는 정보를 접했을 때 눈이 번쩍 뜨였다. 맞아 맞아. 미국이란 나라를 보면 대통령 내외분을 포함하여 상류층들은 쭉쭉 빵빵한 반면, 뚱땡이들은 변두리의 중하류층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상류층들이야 지방질을 제거한 육류를 섭취하고, 요트와 윈드 서핑을 즐기면서 라틴 댄스(한국어로 '스포츠 댄스')도 한 자락 댕길 수 있도록 '관리'를 할 테지. 반면 돼지기름 질질 흐르는 맥도날드 햄버거나 켄터키 치킨 먹고 자라서 디룩디룩해진 사람이 상류층같은 몸매 만드려면 부작용이 발생하여 인생 아작나는 수도 있다(거식증으로 운명을 달리한 카렌 카펜터(Karen Carpenter)여, 고이 잠들어 계시길). 그러느니 차라리 황당하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망가진 신체(wasted body)가 반(反) 여피적'이라고 간주하면서 그냥 사는 편이 낫다. 그런데 요즘처럼 외모와 체형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서 이런 말 해봤자 "지가 게으르고 못나서 저러지 뭐"라는 말밖에 못 들을 것 같다. 신체에 관한 철학적 담론과 어거지로 연결시켜서 말해봤자 철지난 유행밖에 더 되겠나. 그래서 남들 다 좋다는 영화 [오! 수정]에 대해 불만이나 터뜨리고 끝내련다. 다른 건 다 좋은데, 그런 주제를 다루면서 몸매가 잘 빠진 배우들을 기용한 게 맘에 안 든다. 정보석 오빠는 나랑 동갑이던데. 안 되겠다. 이런 이야기는 (본인 말로) 미모는 빠방하지만 (내 눈에) 몸매는 망가진 '엽기도 8단' 최보은 아줌마한테 넘겨야겠다. 20000427 * <씨네 21>에 게재됨. |
GENERAL VIEW:
앞화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