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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의사'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을 때부터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고 빼고 했다. 결국 이렇게 붙잡혀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지만. 미루고 뺀 이유가 '의사'와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 익숙치 않은 주제에 대해 글을 쓰면서 골머리를 썩힐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글을 쓰고 싶지 않았던 무의식적 이유가 머리 속의 의식으로 들어오고 있다. 뭔고 하니 '내가 만난 의사'라는 주제로 글을 청탁하는 측의 의도가 조금은 간파되기 때문이다. 내게 의사라는 용어는 '직업'이라기 보다는 '지위'의 이름에 가깝다. 그 지위가 '나보다 높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나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에 대해 글을 쓸 때, 시기와 질투와 원망을 누르고 우아한 문체를 만들어 낼 인격이 아니기에 사양했던 것 같다. 이유를 파악하고 나니 대충의 시나리오가 머리 속에 그려졌다. 의사에 대한 세간의 일반적 이미지를 말해주고, 그렇지만 그들 역시 하나의 인간(혹은 노동자?)임을 강조하여, 언젠가부터 의사의 지위가 예전같지 않다(정말인지는 모르겠다)는 사실도 말해주고, 자기의 경험에서 특별히 고마웠던 어떤 의사에 대한 미담을 늘어놓고... 대략 이런 글을 원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만난 의사들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의사가 일반적으로 이렇다'고 할 말은 없다. 또 '악덕 의사'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도 TV나 잡지 등의 매스 미디어에서 보고 들은 것이지 실제로 겪은 것은 없기 때문에 괜히 입에 거품 물 일은 없을 듯하다. 가끔씩 무의촌에서 근무하는 의사에 대한 보도를 보아도 요즘 세상에 무슨 천연기념물을 보는 듯하여 오히려 감흥이 덜하다(속으로는 '그래도 그 촌동네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사람 아닌감?'하는 속좁은 생각도 한다). 그냥 나의 경험을 늘어놓는 편이 낫겠다. 의사에 대한 나의 최초의 기억은 청진기 등을 담은 가방을 들고 집에 왕진을 왔던 의사 선생님이다. 하지만 요즘 주로 보는 모습은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이다. 그들은 엄격한 내부 규율에 따라 움직이는 회사원들처럼 보인다. 말을 붙여볼 필요도 없거니와 그럴 엄두도 나지 않는다. 30년 사이에 병원도 '산업화'되었다. 예전에 의원이 동네 슈퍼처럼 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었다면, 요즘의 병원은 어마어마한 빌딩에 주차시설을 완비하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인술에 많이 의존하던 '노동집약적 산업'으로부터 첨단장비에 기초한 '자본집약적 산업'이 되어갔다. 이런 말이 '옛날은 좋았는데 요즘은...'이라는 말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뭐 다 그렇듯이 옛날을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그 시절로 돌아가서 살라고 그러면 '으악'하는 것이 현대인이다. 어쨌거나 이제 의사는 '인격'으로 만나지 못한다. 어떤 '시스템'이 주어져 있고, 의사는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에이전트같기만 하다. 환자와 의사 사이의 소통은 몇 마디 덕담이 있으면 다행이다. 환자의 상태는 알아듣기 힘든 전문 용어로 차트지에 쓰여진 뒤 '정보'가 되어 병원 시스템 어딘가에 입력되고, 그에 따라 처방이 내려진다. 처음에는 그게 참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언젠가 한번 코 수술을 하러 종합병원을 찾았을 때 아픈 상태에 대해 장황히 설명하려고 문장까지 만들어서 준비했지만, 막상 의사 앞에 앉았을 때 왜 그런지 설명을 제대로 못했고 그래서 진료실 문을 나서자마자 후회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필요만 말 몇 마디만 '정보'로 전해주면 된다. 미래에는 아예 예약을 한 뒤 몸 상태를 e-mail로 보내고 당일에는 병원이 마련해준 전산실에서 온라인 채팅으로 진료했으면 좋겠다는 망상도 해본다. 어쩌면 의사의 입장도 그게 편리할 것이다. 상담사가 아닌 바에야 '아쉬운 소리'를 매일 들어주는 게 어디 할 짓인가. 필요한 말만 주고 받는 게 서로에게 이득이다. 환자의 편의는 시스템의 효율성이고, 그 역도 맞다. 그래서 '좋은 의사'란 자상하고 배려깊은 스타일이 아니라, 환자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보내주는 의사라고 마음을 굳히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절박한 상황이 닥치면 이렇게 쉽게 말하기는 힘들다. 한달 전 쯤 초등학교 다니는 딸아이가 아파서 종합병원을 찾은 일이 있다. 휴일이라서 응급실 외에는 갈 수 없었는데 담당의사는 '뜻밖에도' 친절하게(그리고 정확하게) 진료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청구서를 받아보니 불합리하게 비쌌다. 병원측 - 의사가 아니라 - 의 설명은 응급실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말 응급이 필요한 증상이 아니면 높은 수가를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평일이 아닌 휴일에도 그래야 되느냐고 담당의사에게 슬쩍 '항의'했더니 그는 "이런 불합리한 제도 시정해야 된다고 말해 주십시오"라고 말해주었다. 그가 '황금같은 휴일에 일한다'는 이유로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면 나의 선입견은 지속될 뻔했다. 하지만 피곤이 담긴 그의 점잖은 말투에서 나는 주제 넘게도 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 입구에 붙어 있던 파업결의문을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문을 들어설 때는 '밥그릇 싸움'으로만 보였던 글들은 문을 나설 때는 '존엄을 위한 투쟁'으로 읽히고 있었다. 20000616 * <청년의사>(http://www.docdocdoc.co.kr)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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