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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TV 시사 프로그램의 '작가 언니(혹은 AD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 올 때가 있다. 용건은 '전문가의 멘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것 말고 할 말이 없습니다", "카메라 기피증이 있습니다", "비디오가 안 되서 못하겠습니다" 등의 대답으로 통화가 끝나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드물지만 집요하게 매달리는 경우도 있다. "여러 곳에서 다들 선생님을 추천합니다"라든가 "선생님 아니면 해 줄 분이 없습니다"는 말로 비행기도 태우면서. 물론 그런 말에 넘어갈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마땅한 사람을 알아보는 찾는 데 지쳤거나 아니면 나를 '추천'했다는 사람이 토스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니까. 이럴 때도 방법은 있다. 다름 아니라 '돈 이야기'다. "출연료 주시나요?"라고 반문하면 대부분은 해결된다. 농담이지만 "최불암 급 이하면 안 합니다"라고 말하거나. '전문가의 10초 멘트'의 경우 출연료가 없는 게 관행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터득한 처세술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주겠다'는 말이 나와서 옴짝달싹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연례행사처럼 TV에 얼굴을 비쳐 왔고, 그때마다 '친지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에 어쩔 줄 몰라해야 했다. 최근 그런 일이 한 번 더 생겼다. 물론 나의 발언은 전후 맥락이 잘린 채 편집되었다. 그건 예상했던 것이지만 하필이면 [에로 미스 코리아 대회]를 비치는 장면 사이에 들어갈 게 뭐람. 게다가 30분 동안 침 튀기면서 했던 말 중에서 지상파를 탄 부분은 '전문가'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 거기서의 '나'의 주장은 "n세대들은... 개성적이라기 보다는 획일적이고...목표가 분명하고...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지나가면서 한 말일 뿐이다. 이런 말이야 '동네 아저씨'면 다 하는 말인데 굳이 전문가를 찾을 이유는 뭐람? '그렇게 만드는 시스템이 문제이고, 그 시스템은 핵심은 방송사'라는 발언의 요지는 온데 간데 없었다. 하긴 이것도 진부한 말이지만. 이런 일이야 뭐 "PD랑 AD 괜찮은 사람들 같던데 이상하네"하면서 혼자 속앓이하면 될 문제다. 그런데 중차대한 사회문제를 다룰 때도 '출연자'들의 발언이 이런 식으로 편집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난번 '의료계 사태'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 방송국의 메인 뉴스 시간에 소아암에 걸린 아이가 "선생님 보고 싶어요, 빨리 오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부모가 밝힌 바로는 이 발언은 기자가 아이를 얼르고 달래서 입을 열게 만든 것이란다. 아하, 일부 기자는 이제 출연자에게 '연기 지도'도 시키는구나. 이 부모는 "앞뒤의 말을 끊어버리고 필요한 말만을 따서 짜깁기를 하는" 기자의 태도에도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미리 만든 각본에 따라 끼워 맞춰진 심정, 이해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TV 시사 프로그램의 목적은 사실의 보도가 아니라 여론의 '선도'다. 의료계 사태에 대해 한마디 더 하자. 그때 뉴스의 하이라이트는 조산으로 인해 사산되었다는 아기, 대동맥류로 고인이 된 할아버지, 농약을 먹고 사망한 아저씨에 대한 보도였다. 이것도 뒤돌아보면 극히 선정적이었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세 경우 모두 정상적인 상황이라도 사망할 확률이 높았다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의사측 주장'이라고 몰아붙이기에는 차분하고 논리적이었다. 반면 의사 파업을 반대하는 의견은 논조가 험악했고, 대부분은 'TV 보고 흥분한' 경우였다. 이상하다. 내가 직접 들러본 병원들은 비교적 차분하고 평온하던데... 다시 TV를 켜니 환자들은 고통을 못이겨 아우성치는 모습을, 의사들은 돈에 환장하여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각각 '연기'하는 듯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야 깨닫는다는 점이다. 나 자신도 TV만 보고 있을 때는 그게 '사실'이라고 믿었으니까. 순간적으로 '5.18 때랑 뭐가 다른가'라는 생각마저 머리를 스쳐갔다. 그래서 다시 한번 다짐했다. 다음부터는 '출연료 주겠다'고 해도 다른 조건을 달아야겠다.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목소리도 변조하고, 이름은 가명으로 해달라는 조건 등등. TV에 나온 나는 '나'가 아니고 연출된 각본에 따라 연기하는 건데 뭐 어떠랴. 그리고 선후배 동료 '전문가' 여러분, 방송에서 취재하겠다고 그러면, 연기의 댓가로 출연료 꼭 요구하세요. 설마 'TV에 얼굴 나오는 게 어디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20000706 * <씨네 21>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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