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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대화하는 도중에 상대방이 '우리 나라'라는 표현을 쓰면 나는 "나한테는 한국이 '우리' 나라 아닌데?"라고 반문한다. 친한 사이가 아닐 경우 "뭐하는 놈야"라는 투로 쳐다볼 때도 있고, 친한 경우라도 '그럴 것까지는 있느냐'라는 반응도 보인다. 대부분은 객적은 농담 정도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진담이다. 농담과 진담이 잘 분간이 가지 않는 단계에 접어들은 언변에 대해 후회막심일 뿐이다. 물론 논리적 반박이라기 보다는 심정적 반발이 먼저다. '우리'라는 말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상정하고 '국민'을 동질적으로 취급해서 싫을 뿐이다. '한국인은 어쩌구....'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민족중흥의..."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의 문구가 악몽처럼 떠오를 뿐이다.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이 한두명이 아닌데 왜 내가 그런 인간과 함께 '우리'나 '동포'로 한데 묶여야 하는지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운명공동체? 사람마다 운명이 이토록 천차만별인데도 공동체? 그래서 오래 전 운동권 모 정파에서 '애국'을 들고나왔을 때도 몹시 심난했다.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외국인들은 그냥 자기나라의 고유명사를 사용하지 '우리 나라'같은 말은 여간해서 사용하지 않는 점도 또하나의 근거다. 지식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홍세화의 책은 "프랑스는 멋진 나라고 한국은 후진 나라이므로,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식의 주장 이상이 아닌 듯하고, 복거일의 영어 공용화론은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우리말' 못지 않게 '그들'의 언어도 잘 구사해야 한다"는 애국적 주장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최근 나온 책들 가운데 '한국의 문화', '한국의 정체성'을 다룬 책들의 주장도 '여전히 한국이나 한국인을 동질적 집단으로 다루고 있군'이라는 나의 불만을 없애주지 못한다. 책에 대한 서평은 '지식인들이나 돌려 있는 책'에다 했으니까 여기서는 생략. 거기서 못다한 지적이 있다면 나름대로 '우리 것'에 대한 도발적 문제제기라고 생각하는 주장일수록 '우리'에 관한 집착이 강하다는 점이다. 묘한 일이다. 더욱 묘한 것은 이 책들 중 몇 권은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있다는 점이다. 평소에 민족이나 애국과는 거리가 먼 젊은이들 일부가 월드컵이나 올림픽만 열리면 너나 없이 애국자가 되는 현상 못지 않게 희한한 일이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한국인 아니냐?'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 뒤 "한국인의 특징은 한국인을 싫어한다는 것이다"라고 대답해 보지만 개운치 않다. 일상 생활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저냥 지내다가,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만 민족주의자가 되는 게 한국인의 생리인 걸까. 그렇다면 아예 정치적 성향이나 문화적 취향이 비슷한 무리들끼리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 그만 아니냐고 주장하고 싶지다. 하지만 이것도 '패거리주의'라고 비난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신경 쓰인다. 또한 아무리 마음 잘 맞는 사람끼리 모여도 결국은 아웅다웅 싸우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긴 나같은 인간도 '미군 범죄'나 '정신대' 같은 굵직한 문제가 터지면 열이 받치고 가슴이 저린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데가 아니다. 그걸 정말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인구의 30%도 채 안 될 듯하다. 그래서 '이민이나 갈까'라는 생각이 한달에 두세번은 들지만, 외국이라고 뭐 별 다를까라는 생각에 접어두고 만다. 그러면 현재 존재하는 나라 말고 다른 나라는 없을까. 국경과 국적을 초월하는 이른바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y)' 말이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게 진짜 '우리 나라'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외국인'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한국인'이 대부분일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그럴 만한 능력과 조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것도 글렀고.... 그런데 도대체 이런 생각을 왜 하는 걸까. 더 생각하기에는 아열대 기후가 되었다는 한반도 여름 날씨에 머리도 안 돌아간다. '우리'는 왜 '열'심히 일하고, 가'열'차게' 싸우는 것 말고는 존엄하게 살아갈 방법이 없는 것일까. 덥다. 20000804 * [씨네 21]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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