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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규항님의 글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김규항님에게 갑자기 황망한 사건이 발생하여, 쉽게 말해서 '빵꾸'내는 바람에 제가 원 포인트 릴리프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워밍업을 많이 못해서 초구에 홈런 맞고 강판당하는 일이나 없어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김규항님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점의 글에서 카타르시스를 원했던 분들은 부디 하해와 같은 아량을.] 미국 문화에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폴리티컬리 커렉트(politically correct)'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말의 유래가 레닌·스탈린인지 마오 쩌 뚱(한국어로 '모택동')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말은 대중의 일상 용어이자, 반어법의 대상이자, 토크 쇼의 단골 대사다. 물론 한 다리 건너 들은 것이라서 내 해석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과감하게 우기면 "당신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군"이라는 말은 "당신은 참 꽉 막혔군"이라는 의미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것도 아닌데 미국인들 표현으로 복잡미묘한(sophisticated) 단어라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같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 때로는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때로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된다. 1994년 미국 국회선거에서 어떤 국회의원이 "정치적으로 그릇된(politically incorrect) 노동 계급이 일어나서.. .변화를 위해 투표를 했다"라고 발언한 것이 이 말의 '복잡미묘한 사용법'의 한 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실제로 최근 주위에서도 이 용어가 심심찮게 들리는데, 한국에서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말장난'과 다르게 쓰이고 있다. 대부분 이 말은 '단순명쾌'한 뜻으로 이해되고 진지하게 사용되고 있다. 아마도 그릇된 정치가 많았고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힘든 한국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정치 노선 변경이 시내버스 노선 변경처럼 자유자재인 나라에서는 중요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당신은 정치적으로 올바릅니다"라는 말은 '원칙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찬사이지 '틀에 박혔다'는 비아냥은 아닌 듯하다. 반면 비난과 비아냥의 표현으로는 "정치적으로 순진하다"는 표현이 가장 많은 듯하다. 이 말은 주로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 외견상 중립적이지만 '결국은' 어느 편에 가담하는 정치적 효과를 준다는 것이 비난의 요체다.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대장도 CEO도 아닌 웹진의 게시판에 "댁은 왜 <주간조선>에 음악평론을 기고하십니까"라는 질문이 올라온 것이다. 조선일보와 관련된 운동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직업상 언론권력보다는 방송권력에 관심이 큰 터라 많은 관심을 보이지는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내게는 '읽는 사람이나 읽는' 글을 쓰는 조선일보 논설위원보다는 온갖 쓰레기 같은 프로그램만 내보면서도 '면피용'으로 시사 토론이나 시사 도큐 하나 끼워 넣는 '공영' 방송국 프로듀서들이 더 문제면 더 문제다. 이렇게 말하면 방송국 프로듀서들은 '싸잡아 욕한다'고 말할 것이다. 조선일보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닌가? 어쨌든 '먹고 살기 위해 여기저기 글쓰는' 일도 문제가 되는 세상인가보다. 하지만 개인 메일도 아니고 남들 다 보는 곳에다가 질문을 하는 저의는 납득하기 힘들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정치적으로 순진할 수 없었다. '무슨 사상검증 합니까?'라는 생각이 스친 것은 괜한 피해의식이겠지만 나름대로 답변을 주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는 점은 미심쩍다. 일전에 386 정상배들의 '가족주의'를 비아냥거렸을 때는 "진보를 위장한 수구"라는 말을 들었고 그 사람이 어떤 사이트를 추천하는 일도 들었다. 무브먼트든 스포츠든 좋아하는 운동 같은 건 사라진지 오래지만 나는 그런 운동은 싫다. 반대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취향에 안 맞는다는 뜻이다. '정치적 계산'은 익숙하지도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정치적 계산을 못하면 '머리 나쁜 사람' 취급하는 분위기도 싫다. 그렇게 살아야 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다. 그게 맞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잔머리만 늘어가는 것 같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한 시각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싫다. 나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지지 않다. 그런데도 자꾸만 정치적으로 민감해진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그래, 이런 말을 발설한다는 자체가 '정치적으로 순진한' 짓이었다. 분명히 내가 쓴 책의 출판사가 어딘지를 조사해서 '가재는 게 편'이라는 해석을 내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잘 계산된 운동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관심해 보이는 어떤 조짐들이 정치적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아니면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20000824 * [씨네 21]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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