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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 들어 '팬'이라는 말과 관련된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들국화의 팬이다. 오랜만의 공연을 전후해서 들국화 '형님'들을 직접 만난 일이다. 젊은 사람들이야 '들국화나 나훈아나 그게 그거'일지 몰라도 들국화라는 이름 석 자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거리는 나로서는 경건한 자세로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짧은 시간 동안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는데, (최)성원형과 (주)찬권형의 목소리는 한두번 들은 적 있지만 (전)인권형의 육성을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참 묘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고 들국화의 팬클럽에서 온 듯한 팬들이 태극기(?!)를 휘날리고, 게스트로 10여명의 '연예인들'이 무대에 오르면서 감흥이 깨지기 시작했다. 2년 전 공연이 '팬들과 함께'라는 느낌을 주었다면 올해 공연은 '그들끼리'라는 느낌이 밀려 왔다. 그건 들국화가 '나 같은 사람만 좋아하는 대상'에서 '아무나 다 좋아하는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들국화의 '진정한 팬'이 못 되는 듯하다. 이제 더 이상 '언더'라는 게 의미가 없는 그들의 상황을 헤아리지 못할 뿐더러,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용기있게 지적하지도 못하니까. 두 번째. 서태지 컴백 공연이 있던 시간에 홍대앞의 작은 레코드 샵에서는 '비인기' 음악인의 쇼케이스(showcase)라는 게 있었다. 정식 공연은 아니고 음반 발매를 자축하는 조촐한 파티같은 것이었다. 주인공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마이너리그 타격왕' 쯤 되는 델리 스파이스의 멤버인 김민규의 솔로 프로젝트 스위트피였다. 3-40명 남짓한 팬들을 앞에 두고 음반에 대한 소개에 이어 노래 몇 곡을 부르고 사인회를 갖는 자리였다. 스타와 팬의 관계는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처럼 돈독하고 친밀했다. 그렇기는 해도 이 자리에서조차 팬들은 '젊은 여자애들' 주축이어서 최연로 팬인 나는 다소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최고의 인기 영화잡지 [씨네 21]의 지면을 빛내는 유명 평론가가 왕림했는데 사인 해달라는 사람은커녕 "저 아저씨 뭐야?"라는 투의 표정으로 힐끗 쳐다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괜히 '오버'해서 쓴 부분입니다. 양해를). 마지막은 TV 스크린으로 보는 서태지의 팬들이다. '서태지가 싫어 죽겠다'고 말한 적은 없고, 한때 "필승"이 가요 프로그램에서 1등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으므로 나도 팬이라면 팬이다. 그렇지만 공항과 호텔과 공연장을 따라 다니는 팬들의 모습을 보니 계속 팬으로 남아 있기는 글른 것 같다. 음반은 그리 독창적인 스타일은 아니라도 '가요 음반' 치고는 꽤 잘 만든 것이라서 공연도 보고 싶었지만 '공연장에서 과연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지레 포기했다. 과연 TV 녹화방송을 보니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웠다. 다른 건 둘째치고 손수건으로 눈물 훔치면서 헤드뱅잉하는 팬들의 모습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해괴한 장면이었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100% 라이브로 연주하지 않았다'는 누군가의 평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다른 이유를 조합해서 이번에는 서태지의 안티 팬(anti-fan)이 되야겠다. 단지 저번처럼 괜히 주접을 떨어서 매체의 호들갑에 일조하는 촌스러운 짓은 안 하기로 했다. 팬이라는 단어는 '광신자'라는 뜻의 'fanatic'을 줄인 말이라고 한다(그러니 '광적인 팬'이란 중언부언인 셈이다). 팬들 중에 '여자'와 '청소년'이 많은 이유에 대해서는 이 계층이 한 사회에서 '권력'과 거리가 먼 집단이라는 사회문화적 분석도 있고, 사춘기 특유의 정서로 설명하는 심리학적 분석도 있다. 어쨌거나 무엇인가에 열중한다는 것이 아름다워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 음악인의 팬덤은 이상하리만큼 폐쇄적이다. 하찮은 '국내 댄스 그룹'이든, 고상한 '영미의 모던 록 밴드'든 오십보 백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를 싫어하거나 자기가 싫어하는 스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은 적(敵)으로 간주된다. 서태지 반대운동에 대해서 "조성모와 H.O.T만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데 하루도 안 걸렸다. 논리는 빈약하고 판단은 명확하다. 심지어는 특정 음악(이나 음악인)을 좋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그걸 좋아하면 그것마저도 싫어한다. 무언가에 대해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왠지 젊은이들의 팬덤 문화마저도 '어른들'의 정치 문화를 닮아간다는 생각이 들면서 씁쓸해진다. 스타(혹은 보스?)에 대한 충성, 배타적 패거리주의, 조직의 세(勢) 불리기 집착 등등. 하긴, 민주화 운동에 실패한 우리 '기성' 세대 잘못이지, 니들에게 뭔 잘못이 있겠냐. 20000914 * <씨네 21>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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