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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은 질문으로 시작해야겠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1980년대의 '변혁 이론가'들이 '문화 평론가'들로 대량전업한 이유는 무엇일까. 명문대 출신 지식인의 자연스러운 현실 타협? 노후설계보험같은 '교수직'을 얻기 힘들어진 상황에 따른 자구책? 승승장구하는 자본주의적 대중문화와 문화산업에 대한 투항? 불확실하기는 해도 전망이 밝아 보이는 문화 엘리트로의 변신? 글쓰기로 생계를 마련하기 위해 수요급증 부문으로의 이동? 놀지도 못하고 허송해 버린 젊은 날을 만회하고픈 욕구? 원하는 대로 세상이 변하지 않는데 대한 체념? 선진 세계시민의 취향을 따라잡고 싶은 소망? 너무 냉소적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려면 더럽게 말이 꼬인다. 분명한 게 하나 있기는 하다. 그건 새파란 나이에 '어쩌다 보니' 변혁이론가가 된 이유가 단순명쾌했던 것에 비해, 문화평론가가 된 이유는 복잡무쌍하기 이를 데 없다는 점이다.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구차한 변명과 치사한 험담과 냉정한 무시를 거쳐야만 한다. 간단히 말해서 변혁이론가가 되었던 동기가 절박한 것이었다면, 문화평론가가 되었던 동기는 그만큼 절박하지는 않았다. '의미를 위한 투쟁만큼이나 재미를 위한 투쟁이 중요하다'고 제안해 봐야 곧이 곧대로 듣는 사람 별로 없다. '정치로부터 문화로 장을 옮긴 것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정치가 계속된다'고 주장해도 '그런 것 같기도 하군요'라는 시큰둥한 반응 이상을 얻기 힘들다. 서브컬처(하위문화? 제대로 이해합시다)와 카운터컬처(반문화? 번역하기 힘드네요)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 떠들어봤자 '한국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라는 반문에 말문이 막히게 된다. 맞다. 한국의 문화정치에서 보수적 지배문화와 전복적 하위문화의 싸움이나 상업적 대중문화와 대안적 반문화의 싸움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가끔 문제로 부상하는 것이 있다면, 대중문화 전체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의 문화정책'과의 싸움일 뿐이다. 이런 싸움에서 하위문화, 반문화, 대안문화 어쩌구 하는 얘기는 쓰잘 데 없다. 한 예로 '라이브 클럽 합법화'를 위한 싸움이란 게 있었다. "대중음악은 단지 상업적 연예오락이 아니라 나름대로 '문화'에 속합니다"라는 구걸 비슷한 목소리를 정부관계자가 들어주기까지 3년 동안 시끄럽게 '짖어야' 했다. 만화가 이현세의 작품을 둘러싼 논쟁도 마찬가지. "음란물이므로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차라리 양반이다. "만화가 주제에 지가 무슨 예술가라고 착각하느냐"라는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대한민국의 지배문화의 속성이자 본질이자 현실이다. 하나 더. 이박사의 음악이 '일본에서 인정받은' 사실이 없었더라면, 그의 음반은 고속버스 휴게소의 가판대에서나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반 팬'이든 '특수한 매니아'든 대중문화의 주체인 '대중'에게 수구적 문화관료와 비판적 문화평론가들의 논쟁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문화적 형세에서는 그게 자연스럽다. 가리봉 5거리, 대학로, 신촌, 돈암동 등지에서 숨바꼭질하듯 '여가의 공간을 점유하는 싸움'을 전개해 왔던 한국형 하위문화의 성원들에게 '공공 문화시설의 이용 문제에 관한 토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홈리스(=거지!)에게 경찰이 다가가 '공원에서 '나가라'고 그러면 거지 입에서 "인권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선진국'의 이야기는 그저 해외 토픽일 뿐이다. 서태지의 음악이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서태지의 이번 활동은 한국 대중음악 시스템의 울트라 상업주의를 개선하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추측은 얼마나 한가롭고 사치스러워 보일까? 그래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인디사이더(indiesider)로 살아간다'는 나의 지향은 얼마나 절박한 것인가? 어쩌면 이런 지향은 '보통의' 팬들보다도 절박하지 않아 보인다. '집에 일찍 들어오라'는 딸과 아내의 바램보다 절박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런 지향에 '취향의 엘리트주의(심지어는 겉멋)'가 전혀 없다고 뚝심있게 말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묻는다. 절박한 요구 이외에는 간단히 무시당하는 나라에서 또하나의 엘리트주의가 아닌 인디의 에토스란 과연 무엇일까라고. 적어도 지금 그것이 '시스템의 변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논리적·정서적 근거는 무엇이냐고. 20000929 * <씨네 21>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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