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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살다 온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의 백인 여자들 중에는 흑인 남자들을 애인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인간을 피부색으로만 분류하는 것은 '인종주의적'이지만 이번까지만 그냥 쓰기로 하자). 그렇게 된 데에는 스포츠, 특히 단거리 육상경기가 중요한 상징작용을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흑인이 가뿐하게 결승 테이프를 끊으면, 백인은 헉헉거리면서 그 뒤를 따르고, 황인은 '예선 탈락'이 대부분이다. 지난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흑인들은 100m부터 42,195km에 이르는 육상 종목을 휩쓸었고, 농구와 축구에서도 세계 정상을 차지했다. 그럴 때 흑인들의 다양한 국적, 최강대국부터 최약소국을 망라하는 국적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올림픽을 보는 시각이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1970년대의 시각은 '냉전식'이었다. 올림픽 메달 레이스의 기본 구도는 '미국 대 소련', '서구 대 동구'(그리고 '남한 대 북한')이었다. 코마네치와 (구)소련의 슈슈노바의 신기에 가까운 체조 묘기에 감탄하다가도 '얼마나 애들을 조져댔으면 저렇게 잘 할까'라고 딴지를 걸었고, (구)동독의 여자 수영선수 크리스틴 오토의 '떠발이'를 보면 특수부대 요원같았고, '중공(中共)' 선수단은 '6.25 때 쳐들어오던 인민군'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북한이 사격과 권투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는 '전쟁 일어나면 완전 좆 되겠구나'라는 공포감마저 엄습했다(강초현은 어떨까?). 물론 나이가 들면서 생각도 변했다. 냉전의 양대 종주국에서 반쪽 올림픽이 열린 뒤 무대를 서울로 옮긴 메달 레이스에서 소련이 미국을 압도하는 것을 보고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증명했다"라는 객기어린 농담을 한 적도 있지만 그건 잠시였다. 냉전이 붕괴된 1990년대 이후의 올림픽 경기는 '멀티'한 차이를 수반한 스펙터클로 다가왔다. 그 중 나에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인종의 차이다. 경기에 임하는 태도나 결과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개성을 발휘하며 경기를 즐기고, 흑인들은 놀이를 하듯 게임에 쉽게 임하는(또 쉽게 포기하는) 것처럼 비친다. 반면 '대한건아'들은 '하면 된다'와 '임전무퇴'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여' 안간힘을 쓰며 경기에 임한다. 승리를 거둔 뒤 하염없이 통곡하는 일은 줄었지만, 유교 문화권인 나라에 예수쟁이들은 왜 이리도 많은지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은 갈수록 늘어난다. 은메달이나 동메달 시상대에서 죄지은 사람처럼 인상 찌푸리는 모습은 '쇼트 트랙 사건' 이후 자제하는 듯하지만, 경기에서 패배한 뒤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모습은 여전하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서양 = 백인'이라는 등식이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미국은 물론이고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들 중에는 검은색(혹은 갈색) 피부를 가진 이들이 꽤 많다. 상대적으로 균일한 피부색과 골상을 가진 한국(및 아시아권 나라)과는 대조적이었다. 어, 한국을 포함하여 20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는 백인 사회에 진입하려는 욕망의 산물이었는데. 경제성장, 산업화, 민주화에 이어 정보화와 문화 발전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정작 '서양'은 이제 순수 백인 사회로부터 다문화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이제는 여러 문화를 수용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있는 나라가 보다 '쿨'하게(즉, '선진적'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폐막식의 '문화' 행사에서 '백인의 양심' 미드나잇 오일(Midnight Oil)이 생태주의 운동의 송가 "Beds Are Burning"을 연주하는 모습은 여전히 감동적이었지만, 요뚜 인디(Yothu Yindi)나 아취 로취(Archie Roach)같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aborigine) 음악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점은 못내 아쉽다. 혹시나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길이 요원하다면 '단일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문화적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홍대 앞이나 밤거리에 나가보니 백인 남자들과 팔짱을 낀 '아시아 여자들'이 눈에 띈다. 사생활에 간섭하는 일은 촌스럽기 그지없는 후진적 행동이지만, 그들은 마치 '아시아의 백인'처럼 보였다. 하긴 지가 언제부터 그랬다고 갑자기 흑인숭배자인 척하는 나도 별 수 없다. 신도시 주변에 많이 사는 이민 노동자들, 즉 '아시아의 흑인'과 마주치면 못본 척 고개를 돌릴 때가 많으니까. 20001013 * <씨네 21>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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