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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책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에 관한 책들이다. '라틴 열풍'은 여타의 문화계에서는 2년 전부터 불어닥쳤고, 음악과 춤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문화형식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리키 마틴(Ricky Martin)이라는 라틴 팝의 세계적 슈퍼스타가 한 달 전 내한공연을 가졌고, 한국 대중가요계에서도 몇몇 가수들의 '시뮬레이션'이 있었다. 영화에서도 <탱고>, <살사> 등 라틴 댄스에 관한 영화가 개봉되었고, 일본 영화 <쉘 위 댄스>는 '라틴 댄스의 동양적 수용'에 관한 교과서 역할을 했다. 쿠바 음악을 소개한 도큐멘터리 영화 <Buena Vista Social Club>도 곧 개봉될 예정인데, 미리 발매된 사운드트랙 음반은 다소 엉뚱하기까지 '젊은층의 호응'을 얻고 있다('니들이 뭐 알아?'라는 뜻이다). 이런 열풍이 출판계에도 밀어닥친 것일까. 따지고 보니 1년 전쯤 체 게바라에 관한 평전이 날개돋힌 듯 팔려나간 이해하기 힘든 현상도 이와 아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외국의 트렌드가 들어올 때는 늘 '제대로 된 이해'가 부족한 게 한국의 문화적 현실이다. 이런 '제대로 된' 이해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서적을 찾는 게 습성이기도 하다(한국에는 아직 별다른 대안적 매체가 없는 듯하다). 이런 라틴 붐의 영향 때문인지 때마침 몇 개의 신간 서적이 출판되었다. 이들을 읽어 보면서 현재의 라틴 열풍의 허와 실을 짚어 보기로 하자.
1 현재 '라틴'이라고 부르는 단어는 주로 '라틴 아메리카'를 가리킨다. '라틴 유럽'이 아니라는 뜻이다. 라틴이라는 단어가 지금의 이탈리아에 있던 나라의 이름인 'Latium'에서 유래했고 현재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루마니아 등에 라틴족들이 살고 있지만, (루마니아를 제외하면) 나름대로 선진국들인 이런 나라들의 문화를 '라틴'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결국 라틴이라는 단어는 아메리카 대륙의 중부와 남부의 나라들의 문화를 상징하는데, 이 지역의 문화의 특징이 '잡종(hybrid)' 혹은 '합성(synthetic)'이다 보니, 라틴이라는 단어가 이런 특징을 내포하게 되었다. 라틴 문화가 토착 인디오와 백인(주로 스페인계와 포르투갈계) 정복자들 그리고 흑인 노예들의 문화가 뒤섞였다는 정도는 누구나 아는 상식일 것이다. 이런 혼성은 단지 물리적 공존이 아니라 '화학적' 합성이라서 기원을 따진다는 것이 무리일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하다. 좀 과장하면 라틴이란 '멀티', '잡종'의 상징어다.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해설은 정경원 등 세 명의 저자가 공저한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이해]가 적절할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언어와 종교, 건축, 조형미술, 음악, 문학, 영화에 이르는 각종 문화예술 형식들에 관한 해설이 장을 달리 하여 서술되어 있다. 부록으로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주요 지표들, 그리고 역사에 관한 간명한 연표도 수록되어 있어 별도의 사전을 뒤져보아야 할 필요도 없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사전' 역할을 할 책이다(이 책은 "세계의 역사와 문화"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워낙 여러 분야를 다룬 책이라서 세세한 논점을 평하기는 힘들다. 단지, 음악, 영화, 문학을 서술한 부분을 훑어보건대 1980년대 이후의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든가 분야별로 불균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어 브라질의 음악을 소개하는 부분은 삼바와 보사노바를 소개하고 그치고 있다. 이런 '국민 음악' 외에 1970년대 이후 국제적 영향을 받아 발전된 음악들 - 예를 들어 트로피칼리스무(tropicalismo)라든가 살바도르 사운드(salvador sound)라든가 아쉐이(Axe) 음악 - 에 관한 언급은 그리 많지 않다. 칠레, 쿠바, 아르헨티나 등의 누에바 칸치온(Nueva Canzion)나 누에바 트로바(Nueva Trova)에 관한 해설이 있기는 하지만 개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할 능력이 없지만 대체로 비슷해 보인다. 이는 앞으로 이 책을 업데이트하면서 보완되어야 할 점으로 보인다. 그런데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라는 책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곳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보이질 않는다. 한 예로 그곳 사람들의 정신구조를 지배하고 있다는 축구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아쉬웠다. 물론 이 책의 목적이 "한국은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을 통하여 서반구 진출의 전진기지를 마련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미주대륙 전역에 '꼬레아'의 선풍을 불러일으켜야 할 것이다" (1)라는 '민족주의적'인 것이 전부라면, 그럴 필요성이 그리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2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이해]가 '개괄적'이라서 전문적인 이야기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독자들이 있디면, 음악과 문학에 대한 신간 몇 권을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먼저 문학에 대해서는 민용태의 [라틴 아메리카 문학 탐색]이 적절할 듯하다. 몇 년 전 본토의 저자인 까를로스 뿌엔떼스가 저술한 [라틴 아메리카 소설의 이해](2)가 번역된 일도 있지만 아무래도 '여기서의 수용'의 맥락을 보기에는 힘들었다. 반면 이 책은 그곳의 문학을 대하는 이곳의 평론가의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은 그동안 저자가 연구해 왔던 스페인어권 문학에 대한 체계적 정리라는 성격이 더 강하다. 1장과 2장은 시를, 3장과 4장은 소설을 각각 해설하고 있고, 부록에는 저자가 직접 행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대가들(띠노 비아누에바, 호르헤 보르헤스, 에르네스또 사바또)과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초심자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갈 수 있도록 평이한 문체이지만, 내용이 워낙 생소한 편이라서 읽어 나가는 일이 그리 만만치는 않다. 파블로 네루다, 보르헤스, 가르시아 마르께스 등 1970-80년대 대학을 다니던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저자들을 포함하여 비중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문호들의 삶과 작품에 대한 소개로는 적격이다. 특히 붐(Boo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1960년대 라틴 아메리카 소설의 새로운 바람에 대한 해설이 특히 관심이 가게 하는 대목이다. 저자가 이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단지 '외국' 문학의 소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서문에서 저자는 멕시코 문학이 "동서문학의 화해와 조화로운 융화점"이라고 말한 노드롭의 말에 동의하면서 "유사 몽고적 인디오 문화와 라틴 문학의 접목이 낳은 가장 훌륭한 결실이 라틴 아메리카 문학"(3)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보르헤스를 지칭하는 여러 가지 용어들, 예를 들어 마술적 리얼리즘, 환상소설, 메타 픽션 등을 "우리의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유비(類比)하는 대목도 있다. 이런 명시적 주장이 없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본문에도 이런 유비는 여러번 등장한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의 가우초(gaucho)와 한국의 기마민족의 성향을 비교하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독자들 스스로 생각해볼 문제다.
3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은 '음악의 나라'들이기도 하다. 특히 쿠바와 브라질은 각각 야구와 축구의 세계 최강이지만 음악으로도 세계 상위권에 들 나라들이다. 쿠바의 룸바, 맘보, 차차, 브라질의 삼바, 보사노바, 람바다 등은 국민적 음악이자 국제적 음악으로 세계 전역의 댄스 플로어들을 달궈왔던 음악이다. 다른 나라들에도 고유한 색깔을 가진 음악들이 있어서 일일이 나열하는 일은 지면 낭비일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대체로 '댄스 음악'이라서 이제까지 한국에서 지적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책이 있다면 '댄스 교본' 정도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라틴 음악에 대한 지식인의 사랑은 1960-70년대 '누에바 칸시온(새노래) 운동'을 향하는 경향이 많고, 그 중에서도 빅토르 하라(Victor Jara)는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비극적 일대기 때문에 세계의 좌파 지식인들의 관심을 받아 왔다. 10여년 전 번역본이 나왔지만, 한국인에 의해 소개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책은 이런 관심에서 나온 듯하다. 구성은 칠레의 인민연합과 군부독재 시기에 대한 사회정치사로 시작하여(1부와 2부), 그리고 누에바 깐시온 운동과 빅토르 하라를 다루고(3부와 4부), 칠레와 한국의 상황을 비교하는 것으로 마친다. 네루다와 김남주를, 하라와 안치환을 비교하는 식이다. 하라의 노래 가사와 논문 하나를 번역한 부록의 분량이 너무 많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또하나의 부록인 음악 CD가 있기에 이 점에 큰 불만은 없다. 문제는 '월드 뮤직'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다. 저자는 월드 뮤직을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인종과 종교, 가치와 신념을 초월해 공감할 수 있는 음악 언어" (4) 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월드 뮤직이라고 불리는 음악들 대부분이 - 문화 선진국들에서 - '이국적 음악에 고상한 취향을 가진 이들을 위한 음악'이라고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저자의 대안적 해석이 어디에 근거를 두는 이야기인지 의심이 간다.(5) 이는 달리 말하면 빅토르 하라든, 누에바 칸시온이든, (한국의) 민중가요 운동이든 그것들의 '현재적 의미'에 대한 성찰이 많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투쟁했던 과거'에 대한 해석은 언제든 필요하지만 현 세대의 투쟁에 어떤 시사를 던지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6) 빅토르 하라의 책과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체 게바라의 라틴 여행 일기]라는 책을 읽을 때의 느낌도 다르지 않다. 게바라가 '글도 잘 쓰는 멋쟁이'라는 생각이 들 뿐 '투쟁 의지'를 불태우지는 않는다. "게바라 신화가 영원할수록 게바라 '산업'도 영원하다"고 1년 전에 예견했다고 생색낼 일은 아니지만 (7), '과거에 멋있는 혁명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 여기서 가지는 의미는 내게는 아직도 회의적이다. 그래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필요한 것일까. 어쨌든 '<자본론>이 <이지 라이더>를 만난다', '라틴 아메리카의 제임스 딘 혹은 잭 케루액'이라는 카피 문구는 게바라의 삶만큼이나 멋지다.
4 책들을 읽고 난 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이미지는 얼마나 바뀌었는가. 라틴 아메리카가 '한국보다 후진적인 곳'이라는 생각은 많이 불식되었다. 그곳이이야말로 가장 문화가 혼성화되어 다양한 문화가 발달한 곳인데 말이다. 어쩌면 '순수', '단일'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머리 속에 잡종은 열등한 것이라는 무의식이 들어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건 우리가 고치면 될 문제지만 하나 더 있다.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삶이 '미개하고 이국적'이라는 생각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것도 그렇게 오해될 수도 있다. 실제로 나의 경우 브라질에 관한 이미지는 [흑인 오르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실제로 브라질 사람들이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건 아닐 텐데도 말이다.(8) 한국인들은 언제부터 라틴 아메리카를 '미개하고 못사는 나라들'로 보게 되었을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고 조만간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20001102 * <문학과 사회>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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