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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서? 대한민국 국토의 경계(이른바 국경)를 넘어본 일이라곤 단 두 번 밖에 없는 사람이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멋적다. 경계라는 '철학적' 용어가 굳이 물리적 국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자위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옮겨보는 수밖에. 일단 편의상 현대인은 각종 정체성들로 경계가 구획 당해 있고, 정체성은 두 가지로 이분될 때가 많다고 전제하자. 남자와 여자, 청소년과 성인, '우리'와 '그들' 등등. 젊은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그때는 스스로에게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라고 물었던 일이 많았다. 지금은 '무슨 방황하는 문학 소년이냐'라는 핀잔만 나오는 질문이지만 당시엔 꽤 심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걸 '몰라도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지나고 보니 해답은 참 간단했다. 그런 건 '없다'는 것이었다. 청년이었던 내가 지금 '아저씨'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뿐인가 자녀였던 나는 부모가 되어 있고, 학생이었던 나는 선생이 되어 있다. 똑 떨어지는 정체성은 없다는 증거 하나는 확보한 셈이다. 그런데 말을 해놓고 보니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뿐이라서 면구스럽다. 이건 경계를 넘는다는 멋진 행위, 경계를 넘어서 펼쳐지는 멋진 신세계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저 옥신각신하고 아득바득하는 비루한 일상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저씨'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주위에 꽤 있다. 무엇보다도 '일정한 직업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밥을 굶는 적은 없고 때로는 '유명인'이라는 황당한 말도 들으니 말이다(한국에서 유명인이란 '가끔씩 신문에 이름이 나오고 TV에 얼굴을 비추는 사람'인가 보다). 게다가 때로는 '학술 연구자'로, 때로는 '문화 평론가'라는 '직함'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에 '저 이상한 사람 정체가 뭐야?'라고 묻는 사람도 가끔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영화배우냐?'고 묻는 사람이 더 많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저는 정체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빙긋 웃게 된다. 그런데 본인 생각으로는 이상할 게 아무 것도 없는 일인데, '이상하다'는 말을 듣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현대 사회에서 각 개인에게 특정한 지위와 역할을 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값'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런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회보다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는 않아 보인다. 한국어로 '나이주의'라고 번역해야 되나, 어쨌든 영어의 'ageism'을 넘어서는 일은 한국에서는 참 힘들지만 유쾌하기도 하다. (고정된) 정체가 없다는 것이 개성(personality)이 없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386 세대'니, '475세대'니 하는 이상한 세대론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386이냐'고 물어보면 "몇 년 있으면 486으로 업그레이드됩니다"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한 이야기는 단지 '세대의 경계'를 넘는 것일 뿐이다. 다른 범주의 정체성들의 경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한 예로 성적 정체성의 경우 남성의 경계를 넘어보는 일은 용기가 부족해서 아직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그냥 온건하게 대안적 남성성(masculinity)을 실천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고 아직도 그럴 예정이다. 별 말이 아니라 '허세'로 상징되는 '한국 남자'의 모습은 피하기로 작정했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이 뭐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정체성이라는 인종적 정체성은 한국과 같이 '단일민족 국가'에서는 해당사항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넘어보고 싶은 정체성의 경계가 있다. 그건 다름 아니라 '국민적 정체성', 즉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다. 뚱딴지같은 이야기로 들릴 지 모르겠다. 하긴 어쩌다 외국인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버벅거리는 인간으로서는 과분한 망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말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너무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체성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고정불변으로 보이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도 가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면 곧 '국적불명의 사대주의자'라는 비난이 붙는다. 그런 말에 전혀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외국'이라고 부르는 실체는 대부분 '선진국'들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을 '나라 대 나라(예를 들어 미국 대 한국, 남한 대 북한)'의 대립구도로 사고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국제주의적이고 다문화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아닌' 정체성이 아니라 한국인의 '대안적' 정체성이 될 수도 있다. 음악평론가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가지고 발언한다면 나는 '우리 가요'와 '외국 팝'의 구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 가요'라고 부르는 음악들 대부분은 대개가 '외국'의 음악으로부터 강하게 영향받은 것들이다. 말하자면 국내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국민적(혹은 민족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이상한 '우리' 음악 말고 조금 더 '국제적'인 사운드를 갈구하게 된다. 신중현과 들국화의 음악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들이 만들고 연주했던 음악이 정말 '국제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한국 록'이라는 국민적 경계 내로 가두고 있지만 그들은 경계를 넘었던 인물들이다. 나의 전공분야는 아니지만 윤이상과 백남준도 그런 인물들이다. 이들 모두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인과 비한국인의 경계에 서있는 인물들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유명인들' 외에도 꽤 많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경계를 넘는 행위의 목적은 새로운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닌 듯하다. 미리 목적이 설정되어 있다면 그건 또 다른 고정된 정체성에 안주하려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아무런 목적지 없이 넘어서는 '행위' 그 자체 혹은 넘어서려는 '태도'가 소중해 보인다. 경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순간이. 한 프랑스 철학자의 개념을 빌려오면 '존재(being)'보다는 '생성(becoming)'이. 20001120 * 제목을 잊어버린 한 사보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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