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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가 너무도 빨리 변화하는 사회이긴 하지만, '성 정체성'에 관한 공개적 토론만큼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사건도 없을 것이다. 하리수의 '성공적' 성 전환과 홍석천의 커밍 아웃이라는 굵직한 사건이 있었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모 여자 탤런트가 양성애자"라는 류의 '루머들'도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렇게 사적 문제를 공적 언어로 드러내는 현상은 성 정체성에 대한 '삐딱한' 논의를 금기시했던 과거에 비해 한국 사회가 서서히 개방적 분위기로 가고 있다는 징후로 볼 수 있다. 공적 언어로 성 정체성을 말하는 시도가 자주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시도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어 '문제가 되는 사람들'에 대한 일방적 억압이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다면 그건 환영할 만한 일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는 사회가 성숙했다는 지표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최근 몇 가지 사건의 진행과정을 보고 있으면 '시도 그 자체'만으로 반가워만 할 수는 없는 점들도 관찰된다. 하리수의 경우에 주목해 보자. 이 경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라는 '민감한' 논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드문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혹을 지울 수 없다. 만약 '그녀'가 그렇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지(혹은 '만들지') 않았다면? 만약 그녀에게 매스 미디어에서 눈독을 들일만한 재능이 없었다면? 그랬다면 그녀는 '시사' 프로그램에 등장하여 목소리가 변조되고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되는 수많은 '그녀'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의심을 보내는 부분은 '만약'이라는 가정이다. 이 사례에서 토론의 초점은 '동성애'나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하리수라는 개인에게 맞추어져 있고, 그 시선은 다분히 '선정적'인 것이다. 또 한가지 문제는 논의의 초점이 하리수가 '그인가 그녀인가'인지를 '판단'하려는 문제에 맞추어졌다는 점이다. 동성애란 여전히 '판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이고, 판단의 주체는 '정상적' 이성애자다. 대중이 하리수를 '허용'한 것은 그녀가 '정상적 여자'가 되었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때 '여자'에 대한 관념은 사회의 지배적 통념과 아무런 거리가 없다. 시쳇말로 '예쁘고 쭉쭉빵빵한 그녀'니까. 라깡(Jacques Lacan)까지 인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체성이란 분명히 거울같은 면이 있다. '나'라는 정체성은 타인의 정체성으로부터 도출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완전하게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비친 모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 예를 들어 자기가 남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여자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만든 것이고,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인식하는 것은 동성애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거꾸로 말한다면 어떤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먼저 자신의 위치를 돌아볼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런 말을 인정한다면, '비정상적' 성적 정체성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선정적 호기심 이상이 아니라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논의 과정에서 '그들(혹은 그녀들)'을 바라보는 '정상인'은 어느 덧 '절대자'로, '판단하는 자'로 군림한다는 느낌마저 준다. 실제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특수한'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래서 수많은 말들은 뭔가 알맹이가 빠진 듯 허전하다. 이런 말이 '잘 나가는' 하리수에 대한 질투 정도로 들릴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연예계'에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수다스러운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정작 소수자들의 커뮤니티에는 전통적 억압이 계속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름 아니라 인터넷상에서의 음란·퇴폐문화를 '정화'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실시된 인터넷 내용 등급제의 여파에 관한 소식이다. 최근 한국 사회의 성적 분위기('문란한' 분위기?)로 인해 나 역시 이에 대해 무조건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애먼 사람들이 당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이미 다음(Daum)이나 프리챌(Freechal)과 같은 대형 통신사들은 대다수의 성적 소수자들의 커뮤니티를 강제 폐쇄했다. 그 이유는 동성애가 '음란·퇴폐등급'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참고로 "여성생리"는 혐오·잔인 3등급, "문신, 동성애"는 음란·퇴폐 2등급, "낙태"는 음란·퇴폐 3등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TV에서 하리수를 보면서 음란하고 퇴폐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는가. 동성애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다수자의 혐오증은 '특정한 지위'를 근거로 하는 억압이라는 점에서 한 사회의 억압성의 척도라는 주장이 있다. 나는 성적 소수자에 속하지 않지만 이들의 주장에 동의한다. 게다가 일방향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일수록 이런 식의 억압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사건을 둘러싼 세인의 시선은 한국 사회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갑갑한 사회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동성애자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혹은 동성애는 '허용'해야 하는가 라는 통속적 질문을 던지지 말고, 동성애자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언뜻 보면 그게 그거 같지만 여기에는 '시선'이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혹은 '그녀'의 성 정체성을 문제삼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문제삼아야 할 시점이 온 것 같다. * 차우진과 함께 씀. * 새한그룹 사보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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