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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중순 고르바초프가 '조용한 홀대' 속에 한국을 다녀갔다고 한다. 17일에는 제주도에서 노태우와 '재회'했다지만 별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다(문득 10년 뒤 김대중과 김정일은 어디서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진다). 1991년 6월 '한소 정상회담'이 떠들썩하게 열렸던 일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고르바초프가 누구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럴 법도 하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지금부터 정확히 10년전에 '쏘련'이라는 나라가 소멸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사라졌는데 '전 소련 대통령'이라는 직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사이에 러시아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도 너무 급진적으로 바뀌었다. '러시아 여성'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올림픽 체조종목을 싹쓸이하던 넬리 킴이나 슈슈노바같은 얼음공주로부터 부산, 인천 등의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는 '무희'들로 바뀌었다. 영화의 경우도 안드레이 따르꼬프스끼(Andreij Tarkovsky)의 작품처럼 고전적이면서도 미래주의적인 영화는 알렉세이 발라바노프(Aleksei Balabanov) 감독의 [Brat 2(형제 2)]같은 폭력오락물로 바뀌어 버렸다. 한마디로 지금의 러시아는 '후진국', 기껏해야 '약대국'일 뿐인 것 같다. 혹시나 아직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들먹이면서 러시아가 '심오한 사상을 가진 나라'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한때의 초강대국의 위세에 주눅들었던 나이든 세대의 미망일 뿐이다. 어떤 학자는 1990년대 이후의 러시아를 맥도날드와 강제수용소(Gulag)의 합성어인 '맥굴락(McGulag)'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을 정도니까... 어떻게 한 순간에 이 지경으로 변해 버렸을까. 10년 전 소련 사회주의 붕괴로 정신적 혼돈을 겪은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지금도 곤혹스럽다. 나 역시 이 질문에 대해 논리적으로 답변하기는 힘들다. 그저 이제는 정서적으로 느낄 수는 있게 되었을 뿐이다. 그 단서는 우연찮게 들은 고(故) 빅또르 쪼이(Viktor Tsoi: 1962년생)의 목소리였다. 그곳에도 '록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소련 붕괴라는 '한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사건'의 원인을 해명하는 중요한 실마리였다. 나에게는 그랬다. 빅또르 쪼이를 포함한 '러시아 록의 전설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 원인에 대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다름 아니라 러시아의 록 뮤지션들은 체제가 바뀐 뒤에도 여전히 '반체제'라는 사실이다. 마피아가 지배한다는 러시아 사회에서 음악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그곳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소년·미소녀가 대중음악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은 "걸프렌드의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는 지하 비즈니스맨들"(한 외지의 표현이다)이다. 그 결과 1980년대 후반 러시아 정치인들이 '개혁의 상징'으로 치켜세우던 록의 지존들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겪고 있다. 서방세계의 대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의 록 뮤지션들은 '악마같은 소비에트 국가와 싸우는 투사'로 잠시 칭송받다가 이내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로 냉대받았다. 그래서 최근에 본 마이클 앱티드(Michael Apted) 감독의 도큐멘터리 [The Long Way Home]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배경은 많이 달라도 정서는 비슷하다. 도큐멘터리의 주인공은 '러시안 록의 지존'으로 불리는 보리스 그레벤쉬꼬프(Boris Grebenshikov: 1953년생)다. 도큐멘터리의 내용은 보리스 그레벤쉬꼬프가 다국적 메이저 레이블 CBS(지금의 Sony)와 계약하고 앨범을 제작하지만 결국 좌절하고 마는 이야기다. 자세한 설명은 다른 기회로 미뤄야겠지만, 변방의 록 뮤지션의 운명은 어디나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빅또르 쪼이의 유작의 가사가 다시금 절절하게 들려온다. "우리의 미래는 안개같다 / 우리의 과거는 지옥이자 낙원이었다 / 우리의 돈은 주머니로 들어오지 않는다"(<무라베이니끄(개미집)>). '지옥이자 낙원'이라... 아, 오해하지 마라. '록은 체제를 불문하고 반항의 음악'이라는 환상을 유포할 생각은 없다. 일단은 [Brat 2]의 사운드트랙에 등장하는 젬피라(Zemfira: 1976년생)의 음악을 들으면서 '러시아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 한번 바꾸고자 할 뿐이다(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타타르(tartar)계다). 빅또르 쪼이의 곡을 다시 부른 (<꾸꾸슈까(뻐꾸기)>에서 "폭약이 있으면 불을 지펴라"라고 서늘하게 노래부르는 부분을 듣고 있으면 정말로 생각이 바뀐다. 나 역시 그녀처럼 "기억의 반지를 사 모으기 위해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써 버릴 거야"(<슈깔리야뜨 다취끼(불완전한 조각을 조롱하다)")라는 '소녀적 환상'을 미래의 비전으로 삼고 싶은 모양이다. * 추기 1. 위 글의 제목은 1990년대 초 시인 김정환이 연출하고 노래모임 <새벽>에서 제작한 노래극의 제목이다. '흥행'에 쫄딱 망했던 일이 기억난다. 2. [The Long Way Home]의 감독 마이클 앱티드는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영화 [넬(Nell)]의 감독이다. 3. 소련이 망한 시점은 미국 시애틀에서 너바나의 [Nevermind]가 '대박'을 터뜨릴 조짐을 보이던 시점이기도 하다. 이것마저도 21세기가 또한번의 미국의 세기임을 말해주는 사건이었을까. * 인용된 세 곡의 음원을 듣고 싶은
분은 차례대로 다음을 찾아가십시오. http://210.221.110.223:1919/~lara/victor/TOPIC12/myraveinik.mp3 * [씨네 21]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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