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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중순경 고르바초프가 '조용한 홀대' 속에 한국을 다녀갔다. 제주도에서 노태우와 '재회'도 했지만 별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10년 전 6월 '한소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일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든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정확히 10년전 '쏘련'이라는 나라가 증발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미지도 급변했다. 한 예로 1980년대까지 '소련 여성'은 올림픽 체조종목을 싹쓸이하던 넬리 킴이나 슈슈노바처럼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얼음공주(ice princess)들이었지만, 지금의 '러시아 여성'은 부산과 인천 등의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춤을 추는 '무희들'이다. 영화의 경우도 안드레이 따르꼬프스끼(Andrey Tarkovsky)의 작품처럼 고전적이면서도 미래주의적인 '소련 영화'는 알렉세이 발라바노프(Aleksei Balabanov)의 폭력오락물인 [Brat 2(형제 2)]같은 '러시아 영화'로 대체되었다. 그래도 나같은 세대는 러시아가 심오한 사상을 가진 나라라는 미망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지만,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저 '후진국', 기껏해야 '약대국'일 뿐이다. 어떤 학자는 맥도날드와 강제수용소(gulag)의 합성어인 '맥굴락(McGulag)'이라는 말로 부를 지경이니까. 어떻게 한 순간에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이론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스탈린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식의 편리한 설명 말이다. 나의 경우 이런 혼돈에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 것은 우연찮게 들은 빅또르 쪼이(Viktor Tsoi)의 목소리였다. 그곳에도 '록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소련 붕괴라는 엄청난 사건의 원인을 해명하는 중요한 실마리였다. 이건 이론적 문제이기 이전에 정서적 문제라서 말로 설명하기는 참 힘들다. 어쨌든 빅또르 쪼이를 포함한 러시아 록의 '전설'들의 음악을 꾸준히 들으면서 나는 '소련 붕괴의 원인'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러시아의 록 뮤지션들이 체제가 바뀐 뒤에도 여전히 '반체제'라는 점말이다. 마피아가 지배하고 있다는 러시아 사회에서 음악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그곳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소년·미소녀가 대중음악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은 "걸프렌드의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는 지하 비즈니스맨"(한 외지의 표현이다)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1980년대 후반 러시아 정치인들이 '개혁의 상징'으로 치켜세우던 록의 지존들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계속되고 있다. 이 점에서는 서방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러시아의 록 뮤지션들은 '악마같은 소비에트 국가와 싸우는 투사'로 잠시 칭송받다가 이내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로 냉대받았다. 그래서 최근에 본 마이클 앱티드(Michael Apted) 감독의 도큐멘터리 [The Long Way Home]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스토리는 많이 다르지만 슬픈 감정이 밀려오는 건 비슷하다. 도큐멘터리의 주인공은 빅또르 쪼이를 키우는 등 '러시안 록의 지존'이라는 보리스 그레벤쉬꼬프(Boris Grebenshikov)다. 세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지만, 변방의 록 뮤지션의 운명은 어디나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빅또르 쪼이가 유작으로 남긴 가사가 다시 한번 절절하게 들려온다. "우리의 미래는 안개같다 / 우리의 과거는 지옥이자 낙원이었다 / 우리의 돈은 주머니로 들어오지 않는다"(<무라베이니끄(개미집)>). '지옥이자 낙원'이라... 아, 오해하지 마라. '록은 체제를 불문하고 반항의 음악'이라는 환상을 유포할 생각은 없다. 그저 [Brat 2]의 사운드트랙에 한 곡이 수록된 젬피라(Zemfira)를 들으면서 '러시아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 한번 바꾸고자 할 뿐이다(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타타르(tartar)계다). 빅또르 쪼이 트리뷰트 음반에서 "폭약이 있으면 불을 지펴라"라고 서늘하게 노래부르는 부분을 듣고 있으면 생각이 바뀐다(<꾸꾸쉬까(뻐꾸기)>). 어쩌면 나도 그녀처럼 "기억의 반지를 사 모으기 위해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써 버릴 거야"(<슈깔리야뜨 다취끼(불완전한 조각을 조롱하다)")라는 '소녀적 환상'을 미래의 전망으로 삼을지도 모르겠다. * '러시아에 관한 명상'은 10여년전 쯤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정환이 연출하고, 노래모임 <새벽>에서 제작한 노래극의 제목임을 밝혀 둡니다. * 인용된 세 곡의 음원을 듣고 싶은
분은 차례대로 다음을 찾아가십시오. http://210.221.110.223:1919/~lara/victor/TOPIC12/myraveinik.mp3 * [씨네 21]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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