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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최고의 정치적 이슈가 '대선'이라면, 사회적 이슈는 '병역'이다. 대선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무시하는 게 쿨한 태도"라는 소신을 가지고 있지만(이런 다짐이 잘 지켜질지는 모르겠다), 병역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다. 이건 전방부대에서 소총수로 박박 기다가 '대한민국 육군 병장'으로 제대한 이력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가만히 있기 힘든 문제다. '군대 가서 고생했다'는 말처럼 촌스러운 말은 없지만. 병역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는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파 연예인 병역기피'다. 두 가지 이슈와 관련된 소란스러운 사건들도 발생했다. 하나는 29개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가 발족식을 가지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라고 촉구하는 집회를 가진 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2월 2일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병역 문제를 쌈빡하게 '해결'한 가수 유승준이 국내에 들어오려다가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한 사건이다. 두 사건은 성격과 사안이 다르지만 병역이라는 민감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에 일파만파의 충격을 던지고 있다. 그 '뜨거운' 분위기는 우리가 익히 느끼고 있는 바이다. 물론 두 사건의 성격은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거부'와 '기피'는 어감이 매우 다르며, 그래서인지 사건의 진행과정도 전혀 다르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이성적으로 문제가 제기되고 제도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반면, '해외파 연예인 병역기피'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앞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깊이 다루지 않겠다. 군대를 '징하게' 경험했으면서도 연대회의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개인적으로 경의를 보낼 뿐이다. 물론 '특정 종교를 믿는 척해서 군대를 빼는 얍삽한 인간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 그런 말을 할 계제는 아닌 것 같다. 게다가 "특정 종교집단에만 군 면제의 특혜를 준다면 입영 당시 종교를 위장하는 편법이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국방부의 입장을 편든다고 오해받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면 민간인들이 군대를 싫어한다는 점은 국 당국이 더 잘 아는 것 같다). 유승준의 병역 기피에 대한 비난 여론은 별도로 소개할 필요가 없고 나도 그의 행동이 '이유 없이' 못마땅했다. 그렇지만 입국까지 거부한 것은 심하다는 생각에 '동정 여론'을 뒤져봤더니 다음과 같은 견해도 있었다. "지구촌 시대에 우리 젊은이들의 사고가 너무 배타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마저 든다"라든가 "모국이란 법적으로 다른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나라여야 한다"라는 의견이다. 이 글은 "그런 까닭에 나는 하루빨리 우리 사회가 '유승준 쇼크'에서 벗어나 제 나라에서 사는 이들의 여유로움을 되찾기를 바란다"(<중앙일보>, 2002. 1, 24)라는 제안도 덧붙였다. 시비를 가리기 전에 차분하게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서 눈을 끄는 글이었다. 이상은 국내의 반응이다. 그런데 나라밖 반응은 보다 직접적이다. 일단 LA의 한인시민권자협회는 2월 6일 로스앤젤레스 한국총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가졌다.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유승준의 입국 거부에 항의한 것이다(<동아일보>, 2002. 2. 7). 익명을 요구한 한 교환학생은 "군대에 빼앗기는 세월 탓에 외국의 또래 젊은이들보다 모든 면에서 뒤질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청년들이 불쌍할 따름이다. 통일이여 오라"는 자조적인 발언을 했다는 것도 신문지상에 소개되었다(<스포츠서울>, 2002. 2, 4>). 한국인이라도 밖에 나가면 뭔가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사태가 이렇다면 유승준의 병역은 '국내문제'를 넘어 '국제문제'가 되고 있는 것인가. 실제로 LA의 한인사회에서는 유승준의 입국 거부가 "한미간 외교문제로 비화될지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과민반응이겠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의 반미감정이 격화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국인'의 반응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일본의 NHK 위성방송과 [아사히 신문]은 유승준 사건을 보도하면서 '한국인이 왜 분노하고 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동아일보>, 2002, 2. 6). 우리에게 '분노'는 나무나도 당연한 것이지만, 제 3자가 보기에는 천천히 따져보아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모양이다. 공식적이지 않은 '국제적' 반응은 보다 직접적이다. 대다수 외국인들의 반응은 "한국이 먹고 살만한 나라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모든 남자들이 군대를 갔다 오느냐?"라는 놀라움이다. 놀라움의 이면에는 왠지 '그 나라 참 한심하다'라는 빈정거림이 깔려있는 것만 같다. 국방이 신성한 의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런데 왜 기피하는 사람이 있느냐?"면서 더욱 의아해 한다고 한다. 이런 반응을 지켜보다 보니, 자기는 군대에서 * 뺑이치고 왔으면서도 '박찬호는 절대로 군대가면 안 된다'면서 아시안 게임 야구 결승전을 마음 졸이고 지켜보는 모습이 외국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유승준을 괜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내 속도 엔간히 좁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사건을 접했을 때 최초의 반응인 '나도 갔다 온 군대를 지가 뭐라고 안 가나'라는 옹졸한 생각은 지워 버렸다. 생각해 보니 군대갔다 온 일이 자랑은 아니지 않은가. 군대가 싫다면 적극적으로 거부할 일이지 그러지도 못한 주제에 말이다. 유승준이 군대에 가겠다고 공언했다가 말을 바꿨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건 앞서 LA 한인회장의 발언처럼 도덕적 문제일 뿐이다. '공인이 말을 바꿨다'고 입국을 거부시킨다면, 외국을 순방하고 돌아오는 대통령이나 정치인들도 입국을 거부해야 공평한 것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연예인에게서 바라는 게 도덕적 행동인가. 평소에는 '딴따라'라고 업신여기다가 문제를 일으킬 때만 '공인' 운운하는 것은 또 뭔가. 내게 가장 설득력있는 비판은 그가 '모국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견해였다. 이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점인데, 왜냐하면 그가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는 보도가 전해졌을 때 나는 그가 '당연히' 한국에서의 연예활동을 접고 미국에서 생활의 터전을 잡을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그가 한국에서 연예활동을 계속해도 법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다. <재외동포법>에 의하면 외국 시민권을 가진 재외동포들이 한국에서 취업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연예인이라고 여기서 큰 예외는 아니다. 만약 재외동포의 국내 취업을 장려해 놓고 이제 와서 "군대 가라" 운운한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법을 제정한 정부를 탓해야지 특정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을 일은 아니다. 군대도 합법적으로 면제받고 한국에 돌아와서 잘 먹고 잘 사는 '무늬만 외국인'들이 얄밉다면, 그건 글로벌 시대의 한국 사회에 발생한 구조적 모순이므로 '구조적으로' 해결할 일이다. 곰곰 따져 보니 유승준을 비판하는 견해들 대부분은 정서적인데 반해, 그를 동정하는 여론은 논리적이다. 논리적인 것이 정서적인 것보다 반드시 우월한 것은 아니지만, '국내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는 것은 온당한 태도가 아닌 것 같다. 정서적 반감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품고 말 일이지 공론으로 떠들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에게 면죄부를 줄 것인가. 그런데도 유승준의 언행은 뭔가 마땅치가 않다. 왜일까? 결국 나는 그 이유가 다른 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유승준과 비슷한 '재외교포'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이 '문화적으로' 못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직업상 내가 만나본 '교포 음악인'을 만나 보면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완전히 미국 문화에 동화되어 한국말도 거의 못하고 사고방식이나 행동거지가 '미국화'된 경우다(참고로 한국 교포들이 모국어를 잘 못하는 이유는 '부모들이 너무 오래 일해서 대화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음악활동도 미국에서 하고, 거기서 코리안은 소수민족일 뿐이니 이들 대부분은 '인디'적으로 활동한다. 나는 차라리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게 흥미롭다. '순종' 한국인도 아니고 '순종' 미국인도 아닌(혹은 순종 아시안도 아니고, 순종 아메리칸도 아닌) 묘한 문화적 정체성을 느낄 수 있고, 어떤 차이를 느껴도 그걸 생산적으로 토론할 수 있어서 좋다. 그들이 말하는 'Korean'은 우리가 생각하는 '국민'이나 '민족' 같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세계 속의 하나의 민족'일 뿐이다. 그래서 이들을 만나면 평소에 '한민족'에 대해 품었던 과대망상을 깨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도 된다. 다른 하나는 유승준과 비슷한 경우도 우리에게 보다 익숙하다. 이들은 외국(주로 미국)에서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영락없이 '코리안'이고 하나 같이 국내 대중음악계에 진출하려고 애를 쓴다. 그게 미국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킨 결과라면 나쁘지 않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미국문화에 동화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우는 만나 보더라도 너무 뻔해서 할 이야기가 없다. 그러니 '문화 차이' 운운하면서 "국내와는 환경이 전혀 다른 외국에서 생활해 온 만큼 국내의 시각으로 이들의 행동을 바라보면 너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스포츠서울>, 2월 2일자)는 주장은 엉뚱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 정도의 문화 차이라면 국내에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충분히 존재한다. 결국 나의 불만은 법률적 국적이 외국인이라면 문화적 국적도 뭔가 다른 걸 보여주어야 할 텐데 유승준은 지극히 '한국적'이기만 하다는 점이다. 한 방송국과의 인터뷰를 보니 청문회에 나온 증인처럼 이리저리 말을 빙빙 돌리면서 핵심을 회피하는 모습은 '어글리 코리안'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한국을 사랑한다' 어쩌구 하면서 자신이 애국자임을 애써 강조했다.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니까 나는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기를 원했다. "나는 진심으로 음악을 잘 하고 싶다. 그래서 합법적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걸 왜 기피라고 하느냐? 한국 법정에서 진실을 가려도 좋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서 음악 활동해서 먹고 살겠다는데 당신들이 왜 밥그릇 걷어차려고 난리냐? 입국 거부는 국제법 위반이므로 UN에 제소하겠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래야 '미국 시민'답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한국의 병역제도가 얼마나 불합리한지 국제 사회에 환기시켜야 한국 군대가 조금이라도 개선되지 않겠는가. 그게 미국 시민권자로서 한국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그래서 나는 해외파든 아니든 '가수들' 중에서 이런 입장을 표명하면서 병역을 기피 아니 거부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를 지지할 예정이다. 그게 아니라고? 군대를 가지 못하게 되었어도 병역을 '신성한 의무'로 생각한다고? 정 그렇다면 방법을 하나 알려주겠다.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 각종 전쟁을 불사하는 미군에 입대해라. 그래서 주한미군으로 와서 대한민국을 지키면 된다. 됐냐? 20020210 * 월간 [말]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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