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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열풍과 동아시아 담론 올해 들어 유난히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몇 년 전부터 불어닥친 현상이지만 최근 들어 더욱 두드러진 것
같다. '제 2외국어'로 중국어가 가장 인기가 높다는 사실이 최근의 중국
열풍을 상징하는 것 같다. 내가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중어중문학과에
배정받은 친구가 '재수(再修)냐, 전과(轉科)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하면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포즈를 취했던 일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다. 이렇게 돈과 성공에 환장한 중국 열풍이 아닌 건 없을까. 물론 있다. 진지한 담론의 경우 중국에 대한 이야기는 '동아시아 담론'이나 '한중일 담론'의 형식을 취한다. 2002년 들어 주목할 만한 움직임은 지난 2월 초 출범한 '동아문화공동체논단'이다. 이 논단은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출범식을 가진 뒤 이틀에 걸쳐 한중일 3국의 학술연구자와 문화예술인들 사이에 토론회를 가졌다. 이 모임은 학술회의이므로 여기서 내용을 전달하기는 힘들다. 단, 한 가지 흥미로운 점만을 지적하겠다. 이 포럼의 네쪽 짜리 안내책자의 앞면은 중국어로 되어 있었다. '第1會 東亞文化共同體論壇'이라는 '타이틀'과 '新自由主義下東亞之文化的講通化共生'이라는 '서브 타이틀'은 모두 중국어로만 되어 있었다. 반면 뒷면에는 이 중국어를 한국어와 영어로 번역한 문구가 적혀 있었고, 속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온 사람들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글로 적혀 있었다. 자료집은 하나의 글을 두 개 국어로 번역하는 수고로운 작업을 거친 다음에야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런 점이 동아시아의 '소통과 상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고 이렇게 별도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이유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건 '반쪽자리 한국이 중국같은 초강대국이나 일본같은 경제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주제가 되느냐'는 항의와는 조금 다른 문제다. 별 말이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과 한국인이 한자리에 모이더라도 언어장벽으로 인해 자연스러운 소통이 힘들다는 점이다. 똑같이 한자문화권에 속했던 나라라도 발음이 다르니 요령부득이다. 예를 들어 '北京'이라고 표기된 문자를 한국인은 '북경'이라고 읽고 중국인은 '뻬이징'이라고 읽는다. 일본인들이야 오래 전에 국제화되었으므로 '뻬이징'으로 발음하겠지만 표기를 가타까나로 할 때도 있으며 나이 많은 일본인이라면 그들식의 한자 발음대로 '혹꾜오'라고 부른다. 예를 하나 더 들겠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의 말에 의하면 한중일 3국의 유학생끼리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홍콩 영화를 보았다'는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금세 확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똑같은 영화라도 각자가 본 영화의 제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도 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헤어질 때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소림사의 십팔동인"으로 알고 있는 영화를 중국인은 "샤오린쓰...." 식으로 알고 있으며 일본인은 영어 제목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장 이상한 경험은 이런 소통을 서양의 언어를 통해 해야 하는 상황일 것이다. 나 역시 이런 경험으로부터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3월 2일 서울을 찾은 츠이잰(崔健)의 공연 때문이었다. 崔健,, 최건, 츠이잰, Cui Jian 츠이잰이 처음 서울을 찾은 것은 한 공영방송국의 TV 쇼에 출연한 1997년이었지만, '록 공연다운 공연'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연장의 현수막에는 "The First China Wave in Seoul(서울에서 최초의 화류(華流)'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이를 테면 이 행사도 한중문화교류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날 공연장에 온 사람들의 숫자로 보아 츠이잰의 음악을 좋아하는 한국인이 그리 많지는 않아 보였다. 한국의 윤도현 밴드와의 합동 공연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공연장에 온 사람 전체가 츠이잰의 팬이라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츠이잰의 음악을 좋아하는 동기도 다양해 보였다. 중국어권 음악 전체를 좋아해서 츠이잰도 그중 하나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츠이잰의 음악이 '록 음악'이라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츠이잰이 정치적으로 저항적이라는 이유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단지 그대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날 그가 무대에서 한 말은 즉석에서 한국어로 통역되었지만, 그는 이와는 별도로 간단한 중국어도 가르치고 한국어 표현도 구사하면서 청중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럴 때 나는 '차라리 영어로 말했으면...'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의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에 밴드 멤버와 대화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중국인인 그들도, 한국인인 나도 '서양문화와의 혼성교배를 통해 만들어진 문화적 잡종'이었던 셈이다. 츠이잰이 주연을 맡은 영화의 제목이 [北京雜種(Beijing Batards)]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츠이잰의 경우 문화적 잡종화는 하나의 차원이 더 있다. 다름 아니라 그가 '조선족'이라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超越那一天(Get Over That Day)"이라는 곡을 연주하기 전 "저는 한국인 2세가 아니라 중국의 조선족입니다"라고 못박았다. 그리곤 홍콩에 사는 여동생이 뻬이징을 잠시 방문했을 때의 슬펐던 심정을 피력하면서 "이 노래를 여러분과 북한의 형제들에게 바칩니다"라고 말한 뒤 "우리 모두 정치를 초월합시다"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건 '한민족의 염원을 담은' 것이 아니라 국제주의적 소통과 연대를 부르짖는 외침이었다. 그래서 공연이 끝난 뒤 한 케이블 TV과 가진 인터뷰에서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한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쪽을 응원하실 겁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그가 피곤한 표정을 지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츠이잰에 뒤이어 등장한 윤도현은 조금 달랐다. 그는 태극기를 두건으로 두르고 그것도 모자라 태극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 일순 우익단체의 집회에 온 듯한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럴 수도 있으려니'하는 기분으로 지켜 보았다. 그렇지만 공연 중반부에 그는 "난 흰둥이들이 정말 싫어. 왜 인종차별을 하는 거야"라는 식의 메시지를 터뜨렸다. '김동성 사태' 직후의 시점이라 청중들 역시 열광적 반응을 보였고 개중에는 태극기를 휘날리는 사람도 있었다. 윤도현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게 평범한 한국인의 진솔한 감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에서 유래한 악기를 들고 록 음악을 하면서 애국을 외치는 것은 자가당착 아니냐?'는 의문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렇지만 그 자리가 그의 단독공연이 아니라 '국제 문화교류'의 자리였다면 자국의 국기를 휘날리는 모습은 부적절해 보였다. 단적으로 말해서 츠이잰이 잡종이고 국제주의자였던 반면, 윤도현은 순종이고 민족주의자였다. 이런 말이 둘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또하나의 중화사상 아니냐'는 핀잔을 들을지라도 내 느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때 문득 바라본 플래카드에 '崔健'이 '최건'으로 표기되어 있는 사실은, 마치 'garden'을 '가든'으로 쓰고 '숯불갈비집'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윤도현의 공연의 한 장면은 2월 5일 아일랜드의 록 밴드 U2가 수퍼볼(Super Bawl) 경기 하프 타임에서 연주한 장면과 함께 나의 우울한 기억이 되고 말았다. 성조기를 휘날리는 관객 앞에서 거대한 백스크린에 9.11 테러 사망자 명단이 나오고, 보노(Bono, U2의 보컬)가 점퍼를 벗자 성조기 무늬로 된 티셔츠가 나오니까 난리도 아닌 장면이 연출된 사건 말이다. 이런 '기독교 문명권의 국제주의'에 비해 '동아시아(유교문명권?)의 국제주의'는 아직 허약하다는 것이 공연을 보고 난 뒤 나의 또하나의 결론이었다. 영국의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의 내한공연 때는 공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한국의 록 뮤지션이 츠이잰의 공연장에서는 발길을 끊은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이 정말 봐야 할 공연은 츠이잰의 공연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 주제넘은 이야기겠지만... 동아시아의 문화적 국제주의를 위하여 츠이잰이 다녀간 뒤 또 한명의 세계적인 중국 음악인이 한국을 찾았다. 통영에서 열린 '통영국제음악제'에 참여한 비파 연주자 우만(Wu Man)이다. 현재 미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그녀는 작곡가 탄 둔(Tan Dun), 보컬리스트 류 솔라(Liu Sola) 등과 더불어 중국의 전통음악을 현대 음악과 접목시키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불행히도 이 글을 쓰고 받는 원고료로는 통영에 다녀올 차비도 되지 않아서 그녀의 연주를 보지 못해서 못내 아쉽다. 단지 우만이 세계적 명성을 날릴 수 있던 하나의 이유는 지적해야 할 것 같다. 그건 다름 아니라 중국의 '궈위에(國樂)'가 한국의 '국악'과 달리 원형 그대로 보존된 전통음악이 아니라 그자체 서양음악과 중국음악이 뒤섞인 현대적 변종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중국음악과 현대음악을 '퓨전'하는 일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의 음악가들이 서양음악은 서양인들 못지 않게 잘하는 경우가 꽤 있어도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도 이 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물론 이건 내가 과문한 탓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지난 두 달의 경험을 통해 나는 중국 열풍을 넘어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를 구상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과거에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만남의 조건이 자동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 구상이 미국 헤게모니 하에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서는 흐름을 형성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그걸 또하나의 지역주의가 아닌 진정한 국제주의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잡종적' 정체성부터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동아시아'도, '동양'도, 글로벌 시대에는 단지 비(非)서양이 아니라 서양과의 문화적 교환을 통해 만들어지는 실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3국 사이의 문화적 교류를 위해서는 '서양화를 통한 잡종화를 각자 어떻게 이루었는가'의 문제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왠지 이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츠이잰이 다시 올 때를 대비해서 "一無所有"의 가사라도 외워 놓겠다는 소박한 다짐을 해본다. 참, 일무소유가 아니라 '이우쑤어요'다. 그건 중화사상 아니냐고? 하지만 뜻도 모르는 채 멋모르고 '팝송'을 따라 불렀던 과거를 생각한다면 이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던 사람들 중 일부가 '한국 포크'나 '한국 록'을 만들어 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점에서도 3국은 참 다르다. 자국인이 만든 록 음악을 한국인들은 (한글로) '한국 록'이라고 쓰고, 일본인들은 (영어로) 'J-rock'이라고 쓰고, 중국인들은 '搖滾'이라고 쓴다. '요곤'이 아니라 '야오군'이라고 읽는 이 단어는 영어의 'rock'n'roll'을 음차함과 동시에'라고 '흔들고 돌리다'는 뜻도 은근슬쩍 빌려온 것이다. 세 나라는 이렇게 서양화를 통한 잡종화의 양상이 다르다. 타이완과 홍콩까지 포함시키면 더 복잡하다. 이런 복잡하고 미세한 차이들을 서로 존중하면서도 일관성을 부여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서양', '미국', '영어' 말고... 그걸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으로 21세기의 인물일 것 같다. * 월간 [말]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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