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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포진 교육박물관 덕포진에 다녀 왔다. 새로 건설되는, 김포에서 강화도를 잇는 다리 부근에 위치한 곳으로 이름처럼 나루(津)가 있는 곳이다. 수십 년 전 국사책에서 배우고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당시 대원군이 개발했다는 대포와 여타 무기들을 전시한 조그만 박물관이 있고, 대포를 발사했다는 진지도 몇 군데 남아 있다. 그 대포는 '맞은 사람만 죽고 터지지는 않는' 신기한 대포였는데, 양요 직후 대원군은 프랑스군과 미군(!)을 '섬멸시켰다'고 자랑스럽게 선전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박물관이나 사적(史蹟)이면 있게 마련인 멋대가리 없는 안내판에 쓰여 있는 내용이 아니라, 인근에 있는 '덕포진 교육박물관'이라는 곳에서 들은 내용이다. 몇 차례 TV 같은 매스 미디어에서 보도한 적도 있지만 이곳은 은퇴한 부부교사가 퇴직금을 털어 마련한 곳이다. 사연을 조금 더 소개하면, 아내가 시력을 잃어 교단을 떠나게 되자, '아내가 아이들을 계속 가르칠 수는 없을까' 고민하던 남편이 아내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설립한 곳이다. 실제로 박물관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조그만 교실이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초로의 전직 여교사는 풍금을 치면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학생'은 나이를 불문하고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다. 대부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오는 젊은 부부들이라서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과 함께 학생이 된다. 선생님은 교사 특유의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음조의 목소리로 '1일 학생'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치고 가끔은 '잔소리'도 해대신다. 아이들은 간혹 '재미없다'는 표정을 짓지만 엄마들과 아빠들은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게 된다. 그런 이유 중의 하나는 오랜만에 앉아보는 의자의 감촉 때문일 것이다. 나무 조각을 경첩으로 연결해 삐걱거리는 의자는 '여기에 정말 내가 앉았을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작기만 하다. 책상 표면은 볼펜과 연필로 쓴 낙서가 여러번 덧칠해져서 꼬질꼬질하기만 하다. 30분만 앉아 있어도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저려 오는 불편한 자리겠지만, 30대 중반의 사람들은 묘한 감회에 젖어 소중한 기억들을 되새긴다. 교실을 나오면 여기저기에 당시 학교에서 사용하던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한편에는 남학생이 입던 시커먼 교복과 얼룩무늬 교련복, 하얀 칼라를 달고 허리를 잘록하게 만든 여학생이 입던 교복,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이 입던 제복, 학교와 학년을 표시하는 각종 뱃지들처럼 한국 교육의 '공식적 역사'를 알리는 물품들이 있다. 그걸 쳐다보고 있으면 막상 학교를 다니던 무렵 그 옷들을 그토록 입기 싫어했던 기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웬일인지 나같이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에게도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은 순간이 다가온다. 다른 한편에는 학생들의 일상을 수놓았던 물품들이 있다. 구슬치기를 하던 구슬, 고무줄놀이를 하던 고무줄, 딱지치기를 하던 딱지처럼 수공업으로 자가제작하던 오락도구들 뿐만 아니라 파일로트 만년필, 모나미 볼펜, 왕자파스, 문화연필, 그림물감 등의 학용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쌔끈한' 신상품이었을 학용품들은 그때 그 시절의 아우라를 가진 투박한 자태 그대로 진열되어 있다. '50원'이라고 써 있는 주사위 놀이판에는 '북괴 간첩'이 그려져 있어서 그 시절의 '국민정서'를 새삼스럽게 일깨워 주었다. 주사위를 굴려서 말이 거기 닿으면 뱀 모양의 선을 따라 저 아래로 떨어지던 놀이판 말이다. 국가보안법을 저촉하여 감옥에도 갔다온 사람이 이런 '투철한 반공정신'마저도 정겨워 한다면 정신 나간 것일까.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덕포진 교육박물관은 콘테이너 건물 내부를 개조한 3층짜리 건물이다. 번드르르한 대리석이나 우아한 목조로 지어진 건물을 예상했다면 '초라한' 모습이다. 삼엄한 경비도 없고, 친절한 가이드도 없다. 그렇지만 노부부의 따뜻한 숨결과 삶에 대한 애정이 살아 있는 곳이다. 김두수... 은둔자 김두수는 1986년부터 1991년 사이 세 장의 음반을 발표한 음악인이다. '가수'라는 익숙한 단어를 쓰지 않은 것은 그가 사는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는 '가수'들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작은 새", "약속의 땅", "보헤미안" 같은 곡들은 소수의 컬트의 대상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낯선 곡이다. TV에 나오지 않는 음악인들을 모두 '언더그라운드'라고 부른다면, 그는 '언더그라운드의 언더그라운드'에 속하는 음악인이다. TV에 나오는 가수들 뿐만 아니라 '라이브 카페'에 나오는 가수들과도 다르다는 이야기다. 최근 그가 10여 년 만에 네 번째 음반 [자유혼]을 발표하면서 운좋게 그를 만나볼 수 있었다. 그래서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가다가 정선 방면으로 꼬부라지는 산중에 그의 거처가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그동안 그에 대한 소문을 아무도 몰랐던 이유도... 그곳에서 그는 자식도 없이 부인과 둘이서 자연을 벗삼아 지내고 있다. 그의 집 역시 덕포진 교육박물관처럼 콘테이너로 되어 있다. 음반 속지에 흐릿하게 나온 흑백사진을 보면 그의 집안 풍경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가끔 강릉과 서울에 들러 볼 일을 처리할 뿐 그의 삶 대부분은 산중에서 이루어진다. '문명의 이기'라고는 8트랙 녹음 장비밖에 없다. 전화도, 인터넷도 없고 컴퓨터는 아예 켤 줄도 모른다고 한다. 참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삶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음악은 '한국적'이다. '토속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 모르지만 그의 선율과 노랫말은 '한국적 서정'으로 가득차 있다. 요즘 같은 세태에 한국적이라는 말처럼 모호한 말은 없겠지만 이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참 아이러니다. 한국 사회의 주류적 삶을 떠나 은둔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한국적'(이라고 생각되는) 음악이 창작되는 걸 보면... 석관동 대중음악 아카데미 김형찬은 나와 비슷한 연배의 대중음악 연구자다. 지방도시에 연고가 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뒤늦게 서울에 올라 와, 지난 2월 한국종합예술학교 음악원에서 1970년대 한국의 통기타 음악을 연구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임진모, 강헌, 신현준 같은 '스타 평론가'가 아니며(이 표현이 자조적으로 들리지 않았다면 사과드린다), 그렇게 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석관동 대중음악 아카데미'라는 것은 정식으로 인가된 기관이 아니라 그 동네에 위치한 다가구 주택 반지하에 위치한 그의 자취방이다.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은 앞의 표현에 함축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리 크지 않은 이 공간에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 대한 각종 자료들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다. 도서관에 가서 손수 복사해 온 신문과 잡지 기사들, LP 레코드에 담긴 아날로그 음원들을 추출하여 자가제작한 CD들, 헌책방과 출판사들을 수소문해서 모아 놓은 음악관련 서적들, 음악 전문 케이블 TV에서 녹화해 놓은 비디오 테이프들, 음악 공연 때마다 모아놓은 팜플렛과 포스터들... 세속적 기준으로 본다면 그곳은 서울 변두리의 비좁은 단칸 셋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같은 사람에게 그곳은 보석처럼 소중한 자료들이 모아진 박물관이자 라이브러리이며,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이자 우주다. 단지 개인이 '좋아서' 수집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가진 공간이다. 그가 정성스레 모아놓은 자료들을 가끔씩 이용하는 나로서는 그곳이 '수해다발 지역'이라는 사실이 염려될 뿐이다. 이곳이 '아카데미'인 이유는 그가 대중음악을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사람들을 모아 세미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미나의 결과는 석사학위 논문의 내용을 확대하여 197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정리하는 책으로 출판할 예정이라고 한다.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 탓에 평생 책을 다섯 권 이상 내기 힘들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대중음악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는 것에 대해 미친 사람이라는 이야기나 듣지 않으면 다행인 나라에서 그의 의지는 확고하다. 조금 불안할 정도로. 어쨌거나 아카데미는 건물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 같다. 홍대 뒤 헌책방 오거서(五車書) 내가 대부분의 작업을 하는 공간은 홍익대학교 근처에 있다. 홍익대학교 뒷문에서 멀지 않은 이 곳은 한강에 인접한 강변마을이고, 강 건너편에 있는 국회의사당과 63빌딩도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그렇지만 이 동네의 분위기는 통상 '홍대앞'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첨단의 트렌드나, '홍대앞' '강변'이라는 말이 담고 있음직한 낭만적 서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서울의 보통 서민들이 살아가는 후미진 동네다. 폐병이나 결핵에 걸린 예술가나 작가가 살고 있을 법한 오래된 5층 아파트가 지금은 철거중이고, 다가구주택들 사이로 식당과 카센터와 목공소 같은 생업의 현장이 있을 뿐이다. 그들 사이에 오거서(五車書)라는 이름의 헌책방이 있다. 그곳에 가면 백과사전, 문학전집, 세계미술도감 등 어린 시절 그토록 갖고 싶었던 책들을 볼 수 있다. 사춘기 시절 명동이나 종로 등 당시에 가장 잘 나가는 장소에 나가려면 필수품처럼 가지고 다니던 미국 잡지 [Life]의 과월호들도 볼 수 있다. 주로 서적을 취급하는 곳이지만 옛날 음반, 낡은 기타나 아코디언 같은 악기, 그리고 오래된 오디오 기기도 있다. 꼭 책이 아니라 책과 함께 하던 모든 것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1년 전 이 책방의 입구에 '세 놓습니다'라고 쓰인 종이가 붙은 적이 있다. '또 하나의 문화공간이 사라지는구나'라는 아쉬움에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초조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스럽게도 그 안내문은 몇 달이 지나 사라졌지만 주인 아저씨의 표정은 예전 같지 않았다. '돈 안 되는 일'에 매달리는 것에 지쳐서 그런 것일까. 그래서 매번 구경만 하고 지나갔던 일이 미안해서 최근 장현, 윤항기, 최헌, 송창식, 고(故) 이수영(어니언스의 멤버) 등의 음반을 열댓 장 샀다. 어떤 업소에서 처분했기 때문인지 삼면에 테이프가 붙어있는 이 음반들은 아직 턴테이블의 바늘도 닿지 않은 채 나의 책장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상태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기록은 누가 하는가 이상의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까.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다'라고 결론 내리면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낭만주의일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은둔하고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최고의 미덕이다? 은둔과 전원주의(pastoralism)가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젠가 시인 최영미가 서울로 다시 올라면서 쓴 이야기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나의 기억으로는 사생활을 인정하지 않고, 경우 없고, 뒷말 많고, 한마디로 '개인'이 없는 토박이들의 텃세에 질렸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최근 시작한 TV 드라마 [위기의 남자]에도 표현되고 있다. 드라마 자체는 시원찮아 보이지만... 그렇다면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현대 한국인의 삶에 대한 총체적 문명 비판인가. 실은 처음 글을 쓸 때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실제로 정치판 같은 곳을 보고 있으면 정말 사라져야 할 낡은 것들은 완강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반면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은 너무나도 쉽게 사라진다. '새 것'에 집착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그저 휴일에 잠시 교외를 나갔다가 한번 해보는 생각 이상이 아닐지 모른다. 은둔은 현대의 도시인 혹은 도시의 유인원의 꿈이지만 그건 바로 꿈이기 때문에 실현불가능하다. 그 꿈마저 없으면 대도시의 광기의 삶을 견뎌낼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해지는 그런 꿈. 그래서 이상적 꿈을 말하는 대신 현실적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건 사라지는 것들을 문화적 유산으로 보존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공공적 관심의 필요성이다. 한국인 혹은 한국 사회는 버려야 할 것은 버리지 않은 반면, 버리지 않고 남겨놓아야 할 것들은 잘 버린다. 이렇게 버려지고 사라져가는 것들은 개인들에 의해 어렵게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덕포진 교육박물관에 있는 한국의 근현대 교육과 관련된 자료든, 김두수가 간직한 한국적 서정과 음률이 살아있는 음악이든, 김형찬이 모아 놓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 관한 자료들이든, 오거서에서 잘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서적들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이를 개인의 노력에 맡겨둘 것인가. 조금 '오버'한다면 "한국이라는 국가는 도대체 무슨 국가이길래 이런 일에는 아무런 아이디어도 실천도 없을까"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래서 이대로 이번 지방 선거나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날에도 나는 투표소에 가지 않을 예정이다. 자신이 선호하는 정책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선거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 민주시민의 도리니까.... 현재 치러지는 경선에서 '문화'에 대한 언급이 조금이라도 나왔다면 이러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기미도 전망도 보이지 않으니까. 선거날 뭘 할 거냐고? 어떤 상품의 광고에 나오는 말로 답하겠다. "그 날도 평소같았으면 좋겠어요." 020408 * [말]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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