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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교육이 문화를 짓누르는 최대의 장애물
내현이는 중학교 2학년이다. 나는 그를 꼬마 때부터 보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1세대' 문화평론가이자 가요평론가이고,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김창남씨이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다닐 때 동아리 선배였기 때문에 내게는 '창남이 형'이다. 가끔 TV 뉴스같은 곳에 나와서 '청소년 문제'라든가 '방송의 문제점' 등에 대해 커멘트한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으니 그만하면 진보 지식인 치고는 '떴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형이 작년 망년회를 앞두고 내게 전화를 걸더니 '할 얘기가 있으니 꼭 나와라'고 말했다.
'뭘까'했더니 내현이 문제였다. 뭔고 하니 내현이가 '공부는 안 하고 이상한 음악만 듣고 베이스 기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음악이란 설명을 듣고 보니 록 음악, 그것도 가장 '센' 장르인 하드코어(hardcore)라는 음악이었다. 형은 내현이가 내가 쓴 책, 그러니까 록 음악이나 테크노 음악에 대해 쓴 책을 열심히 읽고 '머리맡에 두고 잔다'는 말도 덧붙였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내현이가 이런 이상한 음악에 빠져 든 것은 내가 쓴 책의 영향이 크다'는 뜻으로 짐작되었다. 결국은 '니가 한번 만나보고 얘기 좀 해봐라'는 게 형의 부탁이었다.
글을 쓰고 보니 마치 '진보 지식인 김창남 교수도 별 수 없이 대한민국 보통 부모다'라고 표현된 듯하다. '보통 부모'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열 받으면 테이프나 디스크를 몽창 갖다 버리는 '만행'도 저지르는 부모들 말이다. 요즘은 덜 하겠지만 옛날엔 정말 그랬다. 라디오 방송에서 베테랑 로커인 김창완씨가 말한 바를 믿는다면, 1970년대에는 기타를 박살낸 부모도 많았다니 말이다. 창남이 형이야 그래도 아직도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과 이글스(The Eagles)의 신보도 듣고, 너바나(Nirvana)나 펄 잼(Pearl Jam)같은 '얼터너티브 록'도 들으니 말이다. 내현이도 '아빠가 사 온 CD'로 너바나를 듣고 록 음악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요즘 애들이 푹 빠져듣는 콘(Korn)이나 림프 비즈킷(Limp Bizkit)처럼 무지막지한 '하드코어' 음악은 도저히 들을 수 없다는 게 형의 고민으로 보였다. 하긴 그건 나같이 요즘 음악도 '들어내는' 기성세대에게도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가진 음악이라기 보다는 그저 '극한적 표현수단'으로만 들린다. 하지만 나는 10대 시절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이 그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므로, 내현이를 만나서 하드코어 밴드의 음반을 서너 장 주고 왔다. 그걸 받은 내현이는 즉시 CD 플레이어에 넣더니 이어폰을 끼고 '정신 없이' 듣고 있었다. 뭐라고 물어보아도 건성으로 대답하거나 "예?"하고 짧게 반문하고는 이어폰으로 전해오는 굉음으로 빠져들어갓다. 아, '상담'하기 위한 조건을 조성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여. 그렇게 내현이와의 첫 만남은 끝났다.
그순간 벽에 걸린 통지문 비슷한 종이를 무심코 쳐다 보게 되었다. 나는 그게 그저 학교에서 보낸 공문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보내는 '격식 갖춘' 공문이라기에는 뭔가 친절하고 자상해 보였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른 과목에 비해 국어 성적이 안 올라간다"라는 '학업 지도'로부터 "사교성이 많아서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낸다"라는 '인성 지도'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보고였다. 유심히 관찰해 보았더니 종이 맨 아래에는 '** 학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올해부터 나도 초등학생의 학부모가 되었지만, 요즘의 사교육이 어떤지 잘 실감하지는 못했는데, 이걸 본 순간 뭔가 띵하는 느낌이 다가왔다. 집에 돌아와서 '언제부터 학원이 이렇게 번성했느냐'라고 안사람(아니 바깥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하듯 "오래 되었다"고 대답해주었다. '스승의 날'조차 학교 선생님보다 학원 선생님을 더많이 찾는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그 사람이 교사생활을 너무나도 힘들어하는 이유도 절감할 수 있었다.다.
창남 형의 고민도 애가 '음악을 너무 좋아한다'는 차원이 아니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나와 형이 살고 있는 이곳 '신도시'는 고등학교 입시가 남아있는 곳이고, 그 결과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한 경쟁이 꽤나 치열하다. 들은 말로는 한 반에서 중간 정도의 석차가 안되면 신도시 안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를 마치고도 학원에 다녀야 하고, 그래서 '학원산업'은 날로 번창하는 듯하다. 도처에 걸린 간판이나 플래카드만 보아도 알 수 있고, 아파트 입구마다 철제 스티커가 붙어 있고, 신문 사이에 학원을 홍보하는 전단도 거의 매일같이 끼워져 있다.
'실패한 학자'이자 자녀교육 초보인 나같은 사람은 '공부 많이 해봐야 나 정도밖에 안된다'는 자조와 '과외같은 거 안해도 좋은(?) 대학 갈 놈은 다 가게 돼 있다'는 자부를 섞은 표현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좀 더 성질 나면 '학교에서 배운 똑같은 걸 뭐하러 두 번 배우냐', '사교육 산업에 투자한 돈의 절반만 다른 데 투자해도 대한민국이 이 모양은 아니다', '학원이나 참고서 사업하는 인간들 중에 운동권 출신도 많다던데 그런 기생충들은 나가 뒈져야 된다', '배울 만큼 배운 엄마들이 오히려 치맛바람이 더하다', '교육부는 뭐하냐, 폭탄이라도 던지고 싶다' 등의 극언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차라리 조기유학 보내거나 가족 전체가 이민 가겠다'는 말도 아직은 정말 실행에 옮길 말보다는 그냥 한번 해보는 말에 더 가깝다. 어쨌거나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절 적어도 저녁 시간 이후는 '나의 시간'이었던 때를 생각하면 요즘 애들은 감옥에 자발적으로 수감된 것 같다는 한탄은 계속된다. 한국에서 '성공'이라는 목표가 한풀 꺾이는 일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아무리 '21세기는 문화의 시대' 어쩌구 떠들어봐야 '여가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무슨 창조적인 문화가 나올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 그래서 내현이에게는 "한국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고자 하는 사람은 힘들고 외롭고 배고프다"고 말해 주었다. 내현이가 귀담아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귀담아 들었더라도 "공부 말고 니가 좋아하는 걸 해도 그 분야에서 꼭 1등 해라"라는 말로 듣지 않았어야 할텐데.
* <우리교육>에 게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