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VIEW:
- 대중음악의 팬들
대중음악의 역사는 스타의 역사이자 팬의 역사다. 비틀매니아 없는 비틀스는 앙꼬 없는 찐빵, 아니 찐빵 없는 앙꼬다. 듀래니언(Duranian) 없는 듀랜 듀랜, 데드헤즈(Deadheads) 없는 그레이프풀 데드도 마찬가지다. 이들 노랑머리 나라가 아닌 한국도 마찬가지다. 가장 최근의 예로 H.O.T나 (해체되었지만) 젝스키스의 팬클럽들은 대중음악계의 중요한 '세력'이었다.
팬이라는 말의 유래는 '광신자', '열광자'라는 뜻의 fanatic이라는 단어다. 그렇다면 '광적인 팬', '극성 팬'이라는 말은 중언부언인 셈이고, 팬이란 본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다. 그런데 팬이란 무엇인가? 학술 문헌을 뒤져보면 팬이란 "특정 뮤지션의 음악과 생활 혹은 특정 장르의 역사를 열심히 쫓아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정의되어 있고, 팬들이 하는 행위로는 "콘서트 가기, 음반 모으기, 스크랩북 만들기, 침실을 포스터로 가득 채우기, 스타에 관해 다른 팬과 수다떨기" 등이 나열되어 있다.
팬은 주로 '10대', 그리고 소년보다는 '소녀'들을 지칭한다. 20대 이상이나 소년들 중에는 팬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스타에 열광하고 스타에게 '헌신'하는 정도가 아무래도 '10대 소녀'가 으뜸이라는 것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이라는 결과가 나와 있지만,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한 사회에서 '권력'과는 가장 거리가 먼 집단이 '10대 소녀'라는 사회문화적 분석도 있고, 사춘기 특유의 정서로 설명하는 심리학적 분석도 있고, 미디어 조작에 의한 어떤 시스템의 체계적 비즈니스를 요인으로 지목하는 경제학적 분석도 있다. 아니면 이상의 여러 가지 분석들이 뒤섞이거나.
어쨌거나 점잖은 문헌들에서는 팬과 관련된 문화 현상을 '병리'나 '일탈'로 취급한다. 가끔씩 TV에 얼굴을 비추는 '문화평론가'들의 시각도 대동소이하다(애들한테 잘 보여야 먹고사는 평론가들이 가끔 우호적인 시각을 표할 때도 있지만). 또한 음악 '애호가'들(이른바 '진지한 팬'들)도 '무비판적 팬'들(이른바 '골빈', '한심한' 팬들)을 비판한다. 점잖은 아줌마·아저씨들의 지적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같은 대중음악 애호가들도 팬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팬들은 분명 스타의 음반을 사 모으지만, 그건 스타에 대한 관심의 한 측면일 뿐이고 이들은 오히려 스타의 이미지와 '페르소나(persona)'에 집중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스타와의 강렬한 자기동일시'가 팬들의 즐거움의 원천이다. 그 과정에서 고통과 불안이 있더라도 그것마저도 즐거움의 일부다. 왜? 고통과 불안도 스타를 통해서 해소될 것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젊은 시절 한번쯤 '극성 팬'의 행동을 안해 본 사람이 있을까. 정도의 차이야 있을지언정 스타에 대해 열정을 품고 '헌신'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거나 감정이 말라비틀어진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쟤들 도대체 뭐가 좋다고 저렇게 난리냐"라는 말은 "나는 왜 이렇게 열정이 메말라 버렸을까"라는 자기 내면 어딘가에 침잠해 있는 자탄의 발로일지도 모를 일이다. 팬들을 이용하여 떼돈을 벌어들이는 스타와 그의 배후 인물에 대해 배아프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기 못난 탓에 남 탓하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이상한 게 있다. 스타에 그토록 열광했던 팬들은 어느 순간 스리슬쩍 사라져간다. 때로는 그토록 열광했던 스타의 이름조차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팬이 된다는 것은 스타를 매개로 '또래들의 문화(혹은 권력)'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 스타를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열중할 다른 대상(애인, 일, 공부)이 생기면 스타라도 별 수 없다. 스타는 팬을 '이용'하지만 팬도 스타를 '이용'한다. 서태지가 위대한 것은 쉽게 끓어올랐다가 쉬이 식어지는 팬의 세계의 생리를 잘 파악하고 스타로 '장수'한다는 점이다. 모든 걸 '극비로' 처리한다면서 정보를 슬쩍 흘려주고, 아무 데나 쉽게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무엇보다도 사라질 때 사라질 줄 안다. 역시 슈퍼스타는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그런데 추석 연휴 때 서태지 컴백쇼를 보고 있으니 어르신께서 이런 말을 하신다. "서태지 쟤, 미국에서 돈 떨어져서 여기 온 거 아니냐? 옛날에 조영남이나 패티김이 그러더니..." 설마 그건 아니겠지.
* <스타일>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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