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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라는 유령과의 싸움
새로 나온 음반의 장르는 본인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하드코어(hardcore) 혹은 핌프 록(pimp rock)이다. 이른바 '록 음악'의 한 장르고 미국 등 영미권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주류로까지 부상한 스타일이다. 서태지의 음반을 평하면서 언급되고 있는 콘(Korn)이나 림프 비즈킷(Limp Bizkit) 같은 밴드가 대표적이다. 강력하고 무거운 사운드, 공격적이면서 그루브를 가진 기타 리프(및 리듬), 랩의 영향이 강한 거칠고 과격한 보컬, 욕설이 자주 들어가는 반사회적(혹은 탈사회적)인 메시지 등이 이 스타일의 특징이다. 어쨌든 30대 이상의 보통 어른들이 듣기는 좀 거북한 스타일이고, 젊은 사람들이 들으면 피가 끓는 음악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비인기 장르지만 하드코어를 흉내낸 곡이 없지는 않았는데 H.O.T의 "열 맞춰", 이주노의 "무제의 귀환" 등이 이런 스타일과 비슷하다(물론 좀 사이비이긴 하다). 언더그라운드 밴드들 중에도 꽤 있다.
음반에 실린 "탱크", "오렌지", "대경성" 등이 이런 스타일에 충실하다. "인터넷 전쟁"은 전자음향의 색채가 좀 강하고, 타이틀곡 "울트라 맨이야"는 대중적 선율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 스타일은 유사하다. 그런데 서태지의 음반은 '본토의' 하드코어/핌프 계열의 음악이 주는 느낌과는 조금 다르다. 사운드는 하이테크 감각이 넘치고, 잘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해 제어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본토 하드코어의 '밑바닥에서 박박 기는' 느낌이 별로 없다. 본토의 것이 꼭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차이에 대해 궁금해 하다가 '좀 다른 느낌이면 어때'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음반이야 그렇다 치고 공연에서는 어떻게 연주할까? 닥터코어 911과 크로우라는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멤버들을 고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심 '라이브' 연주를 기대했다. 그렇지만 컴백 공연은 실연주가 아니라 미리 녹음한 것을 '틀어주었다'는 후문이 들린다. 가수의 '립씽크'와 더불어 연주자의 '핸씽크(hand sync)'로 공연을 꾸렸다는 이야기다. '뭐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가기에는 음악 장르의 특성과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보여서 찜찜했다. '라이브 콘서트라고 말한 적 없다'고 말할 지는 모르지만, 라이브가 아니라고 말한 적도 없고 악사들도 불러 갔으니까 라이브라고 예상한 게 자연스러운 것 아니었을까. "서태지와 아이들 때도 그러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두 명의 댄서를 정규 멤버로 한 댄스 그룹이었으니까 지금과는 사정이 다르다.
게다가 '서태지 팬'들의 모습도 이상했다.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건 난생 처음 보는 모습이었고, 음악의 리듬과는 상관없이 정박의 비트로 "서태지 서태지 서태지..."를 연호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거라고는 하지만, 그 장면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더불어 'TV가 만들어내는 올해의 신파 드라마'로 손색이 없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서태지에게 기대를 품고 있다. 그 기대는 "보기 싫은 H.O.T와 조성모 같은 애들 좀 눌러 줬으면 좋겠다"는 졸렬한 것부터 "엉망이 된 한국 대중음악계의 시스템을 새롭게 바꿀 것이다"라는 원대한 것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누가 그런 기대를 심어 주었는가. 적어도 서태지 본인은 아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팬들을 위해 음악인으로 돌아왔을 뿐'이라는 말 이상은 한 적은 없다. 대박 위주의 음반제작 풍토, TV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홍보구조, 라이브 공연의 불모화 등에 대해 서태지는 과거나 지금이나 일언반구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할 의도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난하는 것은 공정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랬는가. 다름 아니라 '언론과 매체의 호들갑'이다. 저항과 도전이라는 서태지 이데올로기를 만든 것도 서태지 본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저항과 도전이라는 반(反) 기업적 수사에 의거하여 서태지는 하나의 기업이 되어 있다. 잔뜩 기대를 품고 호들갑을 떨다가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니까 갑자기 마음이 변하는 또 하나의 촌스러운 호들갑이 벌어질 것도 눈에 선하다. 믿고 돈 맡겼다가 주가가 폭락하니까 펀드매니저 원망하는 꼴이나 비슷하다.
그래서 이런 글이나 써서 '언론과 매체의 호들갑'에 일조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어차피 이런 글도 '서태지 산업'에 기생하여 떡고물이나 묻히는 것으로 비춰질 텐데 말이다.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음악 그 자체를 여유있게 감상하고 평하는 차분한 분위기다. 서태지는 서태지일 뿐인데 말이다.
* <스윙>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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