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요의 황금기?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면 "아빠, 그런 거 말고 가요 틀어 줘"라고 말한다.
그에게 내가 즐겨 듣는 음악은 '가요가 아닌' 음악이다. 그렇다고 내가
우아한 유럽의 고전음악이나 미국의 재즈음악을 많이 듣는 것도 아니고,
'외국'의 음악만 듣는 것도 아니다. 197-80년대 한국의 '가요'를 들을
때도 그는 그게 '가요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의 말을 얼마나
존중해줘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용어법의 정확성을 덮어둔다면 그게
세간의 인식으로 보인다. 달리 말해 '가요'란 한국 대중음악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보자면 일부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가요'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하고 찬란해 보인다. 1990년대 이후 가요의 연주장면은 볼거리가 빈약했던 이전 시대에 비해 풍성한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수려한 외모, 멋진 댄싱, 특이한 의상 등 가요가 연주되는 3분은 팬터지로 가득하다. '립씽크'에 대해 논란이 있었지만 그것 또한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져서 이의를 제기하기조차 멋 적은 상황이다. 이는 단지 TV 스크린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본격화된 '이벤트형 콘서트'는 TV로는 보지 못하는 웅장한 면까지 곁들이고 있고, 장소도 실내 체육관을 벗어나 야외 경기장(stadium)으로 옮겨졌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렇다. 나아가 '가요'는 아시아권의 다른 나라들에도 진출하고 있다. 특히 중국, 대만, 베트남의 신세대들에게 한국가요의 인기는 미국, 영국, 일본의 대중음악을 앞지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각종 '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게 단지 일시적 유행에 그친다고 해도, 그리고 아시아권 국가들에만 한정되는 것이라 해도 '가요'가 '한국 음악'에 대한 전체적 인상을 뚜렷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 점 역시 이전 시대에는 없었던 현상이고 나름대로 '선진국적' 현상이다. 한국인인 우리가 아직도 '대만 음악'이나 '베트남 음악'에 대해 뚜렷한 인상이 없는 것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외국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아오기만 했던 한국의 음악적 생산물이 이제는 외국에 영향을 '주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Made in Korea' 중에서 외국인들이 대중적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는 전자제품과 자동차, 야구선수와 골프선수 다음으로 영화와 음악 등의 문화상품이 3위를 차지한다고 말해도 될 법하다. 이른바 '한류'의 선풍에 대해서는 시사 프로그램들이 '허와 실'을 짚어내 줄 정도다. '허'까지 짚어준다는 것은 '별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일정한 성과를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이를 국력신장과 연결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 앞서는 행위다. '문화 컨텐츠'를 차세대 수출상품으로 집중육성하겠다는 정부의 의지와 맞아떨어진다면, '하면 된다'라는 신념이 있는 나라에서 한류의 아시아 제패가 불가능할 것도 없다. 가요는 바야흐로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외화내빈? 가요가 화려하게 개화하는 이면에서 '가요'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 현상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앞서 잠시 립씽크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건 사태의 일면일 뿐이다. 한마디로 '가요'는 음악 중심적이 아닌 스타 지향적(이른바 '아이돌 댄스가요')이며, 그 온상은 지상파 TV의 순위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문제의식은 몇몇 평론가나 업계 관계자의 인식에 그치는 것을 넘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 올해 초부터는 '가요순위 프로그램을 폐지하라'는 주장을 담은 운동이 전개되었다. 아직 이에 대한 반응은 명확하지 않지만 지난 달 한 공영방송사가 순위 프로그램을 폐지한다고 발표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다소의 파장은 있는 듯하다. 현상적인 문제점을 깊이 파고들면 구조적인 문제점이 발견된다. 구조적 문제점들은 불균형성, 비전문성, 전근대성 등의 단어로 표현된다. 불균형성이란 밀리언셀러(이른바 '대박')가 탄생하면서도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는 음반이 70%에 육박한다는 점이고, 비전문성이란 음악의 장르나 스타일이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며, 마지막으로 전근대성이란 자금융통이나 음반배급 과정이 투명하지 않고 비공식 거래가 많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한국의 음악산업 시스템의 특징은 '소규모의 제작주체가 국내 시장에서 거대한 수익을 목표로 투기적으로 음반을 제작한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진단에 대해 '문화'는 다소 희생되지만 '산업'은 잘 되어가고 있으므로 별 걱정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나도 그다지 문제삼고 싶지 않다. 그런데 최근의 상황을 관찰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름 아니라 '컨텐츠'가 거의 고갈되어 가고 있는 현상이 보이는 것이다. 뒤에 논할 리메이크, 재편집, 패러디 등의 '재활용'이 융성하는 것이 그에 대한 반증이다. 1990년대 '가요'가 성립한 이래 한국의 음반 제작자와 작곡가들은 '외국의 트렌드를 한국의 정서에 맞게 토착화'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 왔다. 기억나는 대로 두서없이 적어보더라도 대략 다음과 같다. 랩(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하우스(노이즈, 잼), 레게(김건모, 룰라), R&B(솔리드), 레이브(R.ef), 마이애미(박진영), 정글(박미경), 테크노(이정현, 채정안), 힙합(지누션, YG 패밀리) 그리고 최근의 라틴(백지영, 홍경민), 인도음악(샤크라)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한 그룹이 앨범을 발표하면서 여러 스타일로 '변신'하는 경우도 흔했다. 예를 들어 H.O.T.는 3집(1998)에서는 '갱스터 랩'을, 4집(1999)에서는 '비주얼 록'을, 5집(2000)에서는 'R&B'를 주요하게 내세웠다. 물론 한 음반 내에서 수록곡마다 '다양한 장르를 잘 소화했다'고 내세우는 것도 또 하나의 관행이 되었다. 이 시기의 가요계가 끊임없이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는 점도 우연이 아니다. 한창 뜨던 시절의 룰라는 표절 시비로 인해 잠시 동안이나마 활동을 접어야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경우마저 마지막 앨범이 된 4집의 타이틀 곡 "컴백 홈"이 표절 시비에 휘말렸던 적이 있다. 물론 전자의 경우는 명백한 표절이고, 후자의 경우 '오해'가 작용한 것이라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도 '작품의 노골적 베끼기'와 '스타일의 건전한 차용'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1990년대 '가요'가 외국의 트렌드를 추종하는 데 온 힘을 경주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표절 논란은 잠잠하고, 신보는 '장르'를 내세우지 않는다. 왜일까. 몇 가지 이유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그 많은 장르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게 그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요 '수입선'인 대중음악의 선진국들에서도 역시 1990년대 후반이래 이른바 '대박'을 터뜨리는 트렌드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중음악의 최선진국인 영미권에서도 1990년대 후반 이후 틴 아이돌 스타들(스파이스 걸스,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등)이 득세하는 걸 보면 오히려 '한국이 선진적'이라는 자조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다. 선진국의 대중음악계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설명하는 일은 매우 복잡하다. 분명한 것은 그곳에는 '아이돌 팝만 있는 것이 아닌' 반면, 한국에는 그것 빼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언더그라운드'나 '인디펜던트'의 영역에서 꾸준히 문화적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라면, 운때만 맞추면 수면 위로 분출하는 것이 대중음악계의 운동법칙이다. 그렇지만 한국은 이제 그런 것 같지 않다. 언더그라운드나 인디펜던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산업이나 시스템의 '일부'가 아니라 시스템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재활용을 넘어서 앞서 언급했듯 지금은 표절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표절로 만든 음악을 좋아하던 대중이 이제는 그런 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위기로 변한 것도 한 측면일 것이다. 표절이든 아니든 '신곡'은 더 이상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오래된 것을 재활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그렇게 판단한 음반제작자들은 작년이래 '편집 음반의 시대'를 열었다. 조성모나 핑클처럼 앨범 한 장을 리메이크로 채운 경우도 있고, [이미연의 연가]나 [이영애의 애수]처럼 오리지널 레코딩을 재활용한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든 '검증된 곡'을 사용했기 때문에 흥행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1990년대의 경향이 외국산(産) 첨단 트렌드의 모방이었다면, 2000년대의 경향은 오래된 한국산(産) 작품의 재활용인 셈이다. 최근에는 또 하나의 재활용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패러디'고 당사자는 이재수라는 '음치 가수'다. 리메이크와 (재)편집처럼 패러디도 조용하게 넘어가지 않고 있다. 조성모의 리메이크 음반 [Classic]은 원작자에게 정당한 수입을 분배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었고, [이미연의 연가]도 비슷한 항의를 받았다. 이런 건 '돈 문제'다. 그런데 이재수의 패러디의 경우는 단지 돈 문제를 넘어 저자의 '인격권'도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한 복잡한 법률 규정을 따지는 일은 머리가 아프지만 '절차를 무시하는 관행'은 앞서 언급한 전근대성과 불투명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더욱 씁쓸한 것은 우리가 지금 창작보다는 재활용이 더 흥미로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만약 시스템이 현대화되어서 공정하고 투명한 제도와 관행이 정착한다면 한국 '가요'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인가. 그 동안 '의식 있는' 평론가와 팬들은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 시스템의 현대화는 물론 중요하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컨텐츠'가 자동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 글의 또 하나의 요지는 이제까지 한국 대중음악에 '컨텐츠의 혁신'이 있었다면 그것은 '외국'으로부터 왔다는 점이다. 국내적 대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건 외국으로부터 수입된 혁신을 절충하는 과정에서 작용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해 한국의 대중음악이 '유행가'로 끝나버리는 것은 내생적 발전의 동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국'이란 이제 단지 선진국만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앞의 예에서 언급했듯 '가요'는 이제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 '후진국'의 영향까지 흡수해서 '한국 유행가'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한류? '한국의 유행가'라는 뜻일 뿐이다. 재활용이라는 전략은 '가요사랑, 나라사랑'이라는 한 음반회사의 캐치 프레이즈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전략에 대한 비판은 "그게 '우리' 가요냐?"라는 반문으로 필요충분하다. 그래서 결국은 대중음악을 포함하여 '한국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가를 새삼스럽게 묻게 된다. 이런 질문은 산업 시스템이나 정부정책에 집중되어 왔지만. 이제는 제도권 아카데미도 포함되어야 할 것 같다. 제도권 아카데미는 대중음악을 배제해 왔고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도권 아카데미와 대중문화계가 분리되는 현상과 대중음악이 한낱 유행가 이상이 되지 못하는 현상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만약 '유행가가 아닌 대중음악'이 필요하다면 '산업 시스템'의 개혁 못지 않게 아카데미의 개혁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정부의 '문화산업 지원정책'은 이런 시각을 갖고 있지 않으며, 아카데미는 이런 제안을 추상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오늘 얘기는 존 케이지가 있었기 때문에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나올 수 있었고, 슈톡하우젠이 있었기 때문에 캔(Can)이 나올 수 있었다는 비유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이 편지가 언제 어떻게 수신될 지는 모르겠지만. 010815
|
OVERVIEW:
앞화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