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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한국의 문화는 겉보기에는 화려한 성과를 거두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두드러지는 가시적 현상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한국 영화의 국내 시장 지분이 50%를 넘어섰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대중음악의 아시아 시장 진출이 본격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방화(邦畵)'와 '한류(韓流)'의 성공 스토리는 TV 뉴스나 도큐멘터리의 단골 메뉴가 되었고, '여세를 몰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여론몰이에 나서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문화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서는 이런 성공을 거둔 생산자들에게 박수 쳐주는 일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화려한 성공의 이면에는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 법이다. 최근 개봉되었던 한 영화는 이런 어두운 면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주는 듯하다. 영화 제목은 [와이키키 브라더스]다. 미리 말하면 이 영화는 흥행에서 망했다. 무료 시사회를 수차례 개최하여 입소문이 나길 바랬던 제작사측의 바램은 실현되지 않았다. 매니아들의 지지로 시내의 한 극장을 '대관'하여 계속 상영하기로 결정했다지만 이건 적자를 각오하는 행위에 가깝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청소년 시절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음악을 지금도 하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나 퀸(Queen) 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던 학창 시절 밴드 멤버들 중 그 혼자 아직 그 길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약사, 공무원, 환경운동가가 되어 있다. 주인공이 한때 잘 나갔는지는 영화에서 자세히 묘사되고 있지 않다. 어쨌든 지금 그는 미인대회와 밤무대와 룸싸롱을 전전하면서 여흥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부르는 '넘버 쓰리 악사'가 되어 있다. 현재의 멤버들도 하나 둘 '살 길을 찾아' 밴드를 떠나간다. 여기가 영화평을 쓰는 자리는 아니므로 세세한 설명은 생략하자. 주인공의 인생유전을 보면서 자기동일화를 하는 것도 감상에 빠질 수 있으므로 피하도록 하자.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 사회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도 있는' 사회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게 현재 '문화의 위기'라고 말하는 현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키보드와 약사 자격증을 교환해야 하고, 드럼 스틱을 놓고 공무원 시험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다 못해 '시민운동가'가 되려고 해도 나름의 경력을 쌓아야 한다. 학창 시절 주인공을 사로잡았던 여학생 밴드의 리드 보컬이 봉고차를 끌고 다니면서 야채를 파는 아줌마가 되어 있는 사실은 '더 말해 무삼하리오'다. 음악이 아닌 다른 경우에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는 언제부턴가 한국에서 문화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문화 생산자가 지나치게 직업화(professionalization)되어 버렸고,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을 연결해주는 통로가 사라져 버렸다. 음악의 경우를 예로 들어 말해 보자. 1980년대까지만 해도 '뮤지션'은 음반과 악기를 구매하는 음악 소비자로 출발하여 멋모르고 음악을 하다 보니 생산자가 되었다. 반면 지금은 뮤지션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는(즉, 음악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찌감치 직업적 뮤지션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작곡가 지망생은 적잖은 돈을 투자하여 악기와 장비를 구입하여 처음부터 '직업적 작곡가처럼'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유학까지 갔다 올 때도 있다. '그저 좋아서' 하다가 '어쩌다 보니' 문화 생산자가 되는 케이스는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그때 나는 그저 아르바이트 대학생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SES와 핑클의 멤버들은 직업적 가수가 된 다음 대학교에 '거저먹기'로 들어갔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절대적으로 분리되었다'는 말이 좀 어렵다면 "'먹고 살기'와 '놀고 즐기기'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되었다"고 말을 바꿔 보자. 우리는 '먹고 살기'는 생계라고 부르고, '놀고 즐기기'는 문화라고 부른다. 현대 사회에서 이 둘은 어느 정도 구분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한국인의 삶이 '먹고 살기'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취직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뒤의 직장인은 '먹고 사는 일'에 바쁜 나머지 '문화적으로' 놀고 즐기는 일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오후 7-8시에 퇴근해서 놀고 즐길 공간이라곤 노래방과 단란주점밖에 없다. 전시장과 화랑은 문을 닫은 지 오래이고, 공연장, 클럽, 극장 등의 대안이 있지만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역부족이다. 노래방과 단란주점에서는 직업적 음악인들이 먹고 살기 위해 만든 MIDI 반주가 흘러나오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종업원들의 '접대'가 있을 뿐이다. 이러니 아시아의 청소년들을 살살 홀리는 음악은 생산되어도 '내 주변의 목소리같은' 음악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외국은 어떠한가. 선진국은 문화생산의 직업화의 정도가 한국보다 더욱 심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유심히 보면 직업화된 문화생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선진국들에서는 오후 4시쯤 퇴근해서 취미 생활로 인디 밴드에서 연주한다든가, 댄스 클럽에서 DJ를 본다든가, 카메라를 들고 도큐멘터리를 찍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꿈만 같은 이야기다. 한국인들이 우습게 생각하는 후진국들은?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통해 조금 알려졌지만 꾸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은 거의 매일같이 댄스 클럽에 나가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면서 살아간다.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할 때 코러스도 넣어주고, 꾀죄죄한 인상의 꼬마들도 북 하나 정도는 연주할 줄 안다. '못 사는 나라'에서의 삶은 우리처럼 팍팍하지는 않아 보인다. 선진국같이 번듯한 문화산업의 시스템이 없어서 그렇지 이 나라들에서 문화 소비자들은 문화 생산자로서의 잠재력이 충분해 보인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습작으로 소설 한 편 써보지 않고 문학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고, 기타나 드럼 한 번 쳐보지 않고 대중음악을 감상하기 힘들고, 캠코더를 들고 도큐멘터리 한편 찍어보지 않고 영화의 영상미를 제대로 느끼기 힘들다. 기층에서의 문화적 실천이 없는 상황에서 문화의 중흥을 논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만 같다. 문화산업이 이제나 저제나 '청소년'과 '여성'을 주요 타깃으로 삼아왔다는 사실도 이들이 상대적으로 '여가'가 많고 따라서 놀고 즐길 시간이 있다는 전제에 근거한다. 그렇지만 '입시교육'이라는 괴물은 이들 청소년과 주부들의 삶도 아빠들의 삶 못지 않게 삭막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인 문화 소비자가 이른바 '빠돌이·빠순이'로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이들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서는 그게 우리에게 적합한 '수준'이라는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 문화의 위기를 '문화를 무시하고, 산업만 강조하는' 분위기 탓으로 돌린다. 문화산업 종사자들이 간혹 지나친 상업주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리 틀린 지적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우리도 먹고 살려면 별 수 없다'는 항변이 사실이라면, '밥그릇'을 걷어찰 수는 없는 일이다. 문화를 가지고 '장사'를 하는 사람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문화산업 그 자체가 '악'이라고 간주하여 문화산업의 산업적 성격을 완화시키라는 요구는 말로만 가능할 뿐이다. 차라리 문화산업의 시스템을 보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정비하라는 제안이 차라리 현실적일 것이다. 문제는 보다 깊은 데 있다. 이제까지 설명했듯, 한국에는 잠재적 문화생산자(아마추어?)가 자연스럽게 문화 생산 능력을 테스트할 수 있는 문화의 하부구조가 부재하다는 데 있다. 이런 하부구조가 없는 상태에서 '음악을 쥐뿔도 모르는 음반 제작자'나 '영화를 개코도 모르는 영화 투자자'만 탓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문화 인프라'를 갖추는 일은 민간의
힘만으로는 힘들기 때문에 공은 정부로 넘어간 셈이다. 정부는 몇 년
전부터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선언했고, '신지식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문화산업을 육성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지금은 어떤가? 신지식인에
대한 이야기는 개그맨 출신의 영화인 한 명만 소모품으로 이용하고는
끝나 버렸다. 정녕 이런 정책밖에 없는가. * <사과나무>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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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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