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0년 말 한국에서 국외 음반 중 판매량 1위를 차지한 음반은 비틀스(The Beatles)의 [1]이었다. 2000년 12월과 이듬해 1월까지 팝 음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고 이후에도 몇 달 간 20위권 내에 머물면서 최소한 50만장 이상이 판매되었다. 비틀스가 신곡을 작곡했을 리는 만무하므로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1960년대에 만들어진 곡들이다. 비틀스가 음반을 처음 발표한 것이 1962년이고, 미국 시장에서 선풍을 일으킨 것이 1964년이므로 어언 '4반세기'를 지나 '반세기'에 가까워진다. 그런데도 비틀스의 '새' 음반들은 나오기만 하면 기본은 팔린다. 이때 '새 음반'이란 '오래된 음원을 새로 포장한 음반'이라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혹시 가격이 싸서 그런가. 다른 '신보'들과 큰 차이는 없고 국내 가요 음반보다는 오히려 비싼 편이다. 음반제작비가 거의 들지 않았을텐데도 말이다. 막말로 '판 것 또 파는' 셈이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9년에는 [Yellow Submarine Songtrack]이라는 타이틀의 음반이 나왔다. [Yellow Submarine]이라는 앨범은 동명의 애니메이션 음악을 담아 1969년에 발표된 적이 있다. 하지만 1999년에 발표된 음반은 1969년작과는 딴판이다. 몇몇 곡은 중복도 있지만 수록곡들은 많이 다르다. 더욱 다른 것은 음원들이다. [Yellow Submarine Songtrack]은 비틀스의 원곡(오리지널 레코딩)을 '디지털 리매스터링'한 것들이다. 오리지널 레코딩에서 뭔가 뭉뚱그려져 있던 악기음들이 입체적으로 재배치되어 있다. 특히 "Eleanor Rigby"에서의 현악기들이나 "All You Need Is Love"의 관악기들은 첨단 기술에 힘입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폴 매카트니 본인도 "놀랍다. 예전에 우리가 녹음했을 때 묻혀있던 소리들이 이제는 여러 방향에서 각각 튀어나온다. 정말 생동감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술 더떠 1995년에는 죽은 존 레넌이 '시험삼아(demo)' 레코딩해둔 트랙에 나머지 멤버들이 레코딩을 추가한 두 곡 "Free As A Bird"와 "Real Love"가 발표되었고, 다른 데모 레코딩들을 모아 [Anthology]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총 여섯 장의 CD로 발매된 일도 있다. 이제까지 언급한 사례들이 특징적이기는 해도 그 외에도 수많은 '편집 앨범'들이 존재한다. 예전의 LP로 발매된 정규음반들이 모조리 CD로 재발매된 것은 물론이고, 스물 몇 장짜리 싱글 모음집, 미발표곡 모음집 박스 세트에 이르기까지.... 이런 현상을 '음악산업에 의한 재발매(reissue) 전략'이라고 부른다. 과거에 발매된 음반들의 카탈로그, 이른바 백 카탈로그(Back Catralog)를 보유한 음반사들이 이런저런 시류에 맞추어 음원들을 재편집하여 발매하는 것이다. 사소한 점 하나를 지적한다면, 이런 재발매가 연말에 집중되는 것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나 새해를 위한 선물로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음악 팬들은 재발매 전략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음악을 발굴하지 않고 과거의 음원들로부터 이윤을 창출하려는 전략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음악산업의 안이한 비즈니스야 그렇다 치고 소비자로서 한 가지 짚어볼 점이 있다. 비틀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뮤지션들의 음반이 재발매된다면 과연 팔릴까. 비틀스야 워낙 출중한 존재라서 비교가 힘들기 때문에, 다른 예나 들어보자. 1970년대라는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 중 도나 서머(Donna Summer)와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비교해 보자. 모르긴 몰라도 디스코 시대에는 도나 서머가 레드 제플린보다 인기가 좋았으면 좋았지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레드 제플린은 '박스 세트'가 있는 반면, 도나 서머는 그런 게 없다. 구매자의 입장에서는 도나 서머는 가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들을 뿐 정규 앨범 한 장을 사기도 조금 아까운 반면, 레드 제플린은 '돈 생기면 꼭 사야지'라는 각오를 다진다. 요지를 말하기 위해 너무 빙빙 돌아왔다. 말하자면 비틀스와 레드 제플린은 '아티스트'인 반면, 도나 서머는 '엔터테이너'라는 이야기다. 달리 말하면 전자는 '록 아티스트'인 반면, 후자는 '팝 가수'일 뿐이다. 조금 길게 부연하면 전자는 스스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여 자기를 표현하는 에술가인 반면, 후자는 남이 만들어준 노래를 부르기만 할뿐인 기능인일 뿐이다. 참으로 아이러닉한 것은 '예술가'로 대우받을수록 음반이 잘 팔린다는 점이다. '예술'과 '비즈니스'가 이렇게 황홀하게 결합한 예는 인류역사상 아주 드문 일이다. 한 예로 음반 해설지에 '음반사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 충분한 자율성을 가지고 음반을 제작했다'는 말은 오히려 음반의 판촉에 도움이 된다. 이걸 '록의 시스템은 팝의 시스템과 다르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록의 시스템은 수개월 동안 공을 들여 음반을 레코딩하고 그게 명반(masterpiece)으로 평가되면 '스테디(steady)'하게 판매된다는 가정 하에서 작동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탈락자는 있겠지만 '기회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다'는 불평은 없을 것이다. 반면 팝의 시스템은 '히트 싱글'을 연발로 발표하는 것에 승부를 거는 단기전이다. 그러니 작곡가와 가수 사이에 분업이 이루어지고, 둘 중에서 작곡가는 비교적 장수하는 반면 가수는 단명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예로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과 폴 영(Paul Young)을 아직도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 많을까. 반면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록 밴드인 U2, 그리고 당시에는 한국에는 알려지지도 않았던 '얼터너티브' 밴드 R.E.M.은 현재도 현역으로 장수 중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한국에 사는 우리로서는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국내 '가요'는 여기에서 언급한 것 같은 팝 대 록의 구분 같은 것은 없는 시스템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메이드인코리아 대중음악'은 장르를 무엇이라고 부르면서 홍보하든 모두 '가요'다. 시스템이 그런데 별 수 있는가. 물론 1970년대의 트로트 대 포크, 1980년대의 오버그라운드 대 언더그라운드의 구분이 있었다. 그렇지만 서양식 '록의 시스템'이 정착하지 못한 채 1990년대 이후의 '아이돌 스타 시스템'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렸다. 아이돌 스타 시스템이 방금 언급한 팝의 시스템처럼 '단기전'에 승부를 건다는 것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대중음악의 '명반'은 시장에서 정상적으로 구할 방법이 없다. 황학동이나 회현동의 중고음반가게에서 뽀얗게 쌓인 먼지를 치우면서 뒤지는 수고를 해야 겨우 몇 개 건질 수 있을 뿐이고, 가격도 장난이 아닌 수준이다. 신중현, 김민기, 산울림 등의 음반은 십수만원을 호가할뿐더러 아예 구하기도 힘들다. 이건 '희소성의 원리'라는 경제학 교과서 첫 페이지에 나와있는 개념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 없이 '유행'만 있는 한국의 대중음악의 현실은 경제학만으로 설명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 [동원증권 사보]에 게재됨.
|
OVERVIEW:
목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