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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설(Husserl)의 현상학 요약 <1>

당신은 번째 손님입니다.

 

 

<훗설의 현상학에서는 여러 가지 어려운 용어들이 나타나고 내용도 복잡한 것 같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데카르트의 철학을 이해하고 시작한다면 한결 이해하기 쉽다.>

 

1. 현상학의 이념 :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

○ 훗설 : 철학의 '정밀성' 추구 비판

― 근세 이후 수학의 정밀성을 본받아 철학까지도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정밀하게 만드는 것이 철학의 이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렇게 구성된 학을 엄밀하다고 부를 수는 없다.

― "엄밀학"이란 수학과 같은 엄밀한 방법에 따른 학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훗설이 의미하는 엄밀성은 수학에서와 같은 추리과정의 필연성뿐만이 아니라 필연적 추리의 시초가 참일 것을 함께 요구한다.

○ 철학의 개혁

― 철학은 그 추리의 정확성도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그보다 앞서 모든 존재와 인식이 그 위에 세워질 최후의 근원인 절대적인 기반이 확보되어야 한다.

― 제 1 철학이자 모든 학의 기초학으로서의 철학은 그 근거 자체도 참이어야 한다. 근거 자체가 참이라는 것은, 그것이 참이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참인 것,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참인 것, 즉 "자명한" 것이어야 한다.

― 이러한 절대적 출발점을 훗설은 "명증"에서 찾았다. (데까르트가 "명석 판명"한 것에서 학의 출발점을 찾듯이.)

※ 다른 철학자들과의 차이점 : 아리스토텔레스, 데까르트의 제일철학은 형이상학이었으나 훗설의 제일철학은 정초의 근본주의, 절대적 무전제성으로의 귀환, 시작하는 자가 스스로 절대적 기반을 확보하게 되는 근본적 방법을 의미할 뿐이다.

 

2. 현상학의 원리

○ 절대적 명증의 근원 ;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

― 우리 인식의 권리 원천은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이다. 이는 우리의 "직각에 근원적으로 제공되어 있는 것", 또는 "우리가 의식 자체에서, 즉 순수 내재성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통찰할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 어떤 존재 정립이건 어떤 주장이건 간에 그 정당성의 근원은 오직 의식의 직관적 소여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개념이나 명제는 결국 근원적인 직관으로 돌아가서 증명되어야 한다. "사상 자체에로!"라는 훗설의 구호는 바로 이러한 의식의 근원적 직관에로의 귀환을 뜻한다.

― 의식의 소여가 명증적이고 그 이상의 것(특히 형이상학)을 요구하지 않은 채 철학을 전개하고자 하기 때문에 훗설 스스로 참된 의미의 '실증주의자'라고 하였다. 이러한 훗설의 실증주의는 형이상학적 실증주의가 아니라 '방법적 실증주의'이다.

― 무전제의 명증에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명증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3. 심리학주의와 그에 대한 훗설의 비판

○ 심리학주의

― 수학적 추리나 논리적 사고도 인간의 심리현상이므로, 이것을 심리학이 연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심리학이 모든 과학의 기초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심리학주의이다. 그리하여 심리학주의는 인간의 심리적 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 훗설의 비판 : 심리학주의의 입장에 따르면 자연현상을 물리학으로 설명하려는 것과 동일하게 되어, 결국 논리학의 법칙도 심리작용의 법칙이 되며, 따라서 귀납에 의해 얻어지는 경험적 법칙이 된다. 그래서 개연성과 상대성을 면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논리학은 필연성과 절대성의 학문이다. 심리학주의에 따르면 결국 상대주의 및 회의주의로 빠지게 된다.

<이리하여 훗설은 진리 객관주의를 수용하게 된다.>

○ 볼짜노(Bolzano)의 진리 객관주의

― 칸트처럼 진리의 객관성, 보편타당성의 근거를 의식 일반에서 찾는 것은 심리주의이다. 비록 초개인적인 주관에 의해서 파악되는 진리라고 하더라도 칸트의 진리는 어떻든 주관의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된 진리'이지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 훗설은 진리 자체가 어떠한 사유 내지 판단 작용과도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진리는 사유가능성이나 인식가능성에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존재한다. (특히 수나 논리의 진리가 그러하다.)

<진리 객관주의를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논리가 의식에 의해서 생각되어진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훗설은 지향성 개념을 끌어들인다.>

○ 브렌따노(Brentano)의 지향성 개념

― 심리적 현상은 "대상의 지향적 내재"라는 점에서 물리적 현상과 구별된다. 의식은 반드시 "∼∼에 대한" 작용으로서 그 대상을 지향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지향된 대상 자체는 허상일 수도 있지만 그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자체인 지향관계는 비실재적일 수가 없다.

<진리객관주의와 지향성 개념에 근거하여 훗설은 다음과 같이 심리학주의를 비판한다.>

○ 훗설의 심리학주의 비판

― 심리학주의는 의식작용과 의식내용(의식대상)을 혼동하고 있다. 의식은 언제나 "어떤 것에의 의식"으로서 지향적인 것이요, 이 때에 의식되는 대상과 의식작용은 전혀 그 존재 양식을 달리한다.

― 사실로서의 의식작용은 시간적으로 생성되고 인과적으로 규정가능 하지만, 의식내용 즉 지향적 대상은 초시간적이고 객관적인 의미존재이다. 심리주의는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심리작용과 거기서 얻어지는 경험적인 심리적 사실로서의 표상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적인 사고도 경험적인 사고 작용으로 되며, 논리학의 법칙도 사고라는 심리작용의 법칙이 된다. 이는 결국 귀납적 방법에 의해서 얻어지므로 개연성과 상대성을 면할 수 없어 진리의 상대주의, 회의주의에 빠지고 만다.

― 훗설의 논리주의적 입장 : 사고라는 주관적, 심리적인 요소를 전혀 내포하지 않는 객관적인 진리 자체의 세계가 있다. 수나 논리의 세계가 바로 이런 진리 자체의 세계이다.

○ 훗설과 브렌따노의 차이점

― 브렌따노 : 브렌따노는 대상과 의식의 관계가 일대일 대응이라는 정적인 관계라고 파악했다. 즉 "지향적 체험의 외적인 분류와 기술적 고찰"에 그치며 그 때의 의식은 다만 대상을 여러 방식으로 '의식에 가지는' 것으로만 분석된다. 브렌따노에게 있어서 이식은 여러 대상과 정적으로 일대일 대응한다는 의미에서 지향적이다.

― 훗설 : 훗설에게 있어서 "의식은 대상을 형성하는 주체로서 동적 관계"를 맺는다. 대상을 대상으로 성립케 하는 작용이 의식의 지향관계이다. 여기서 대상은 언제나 지향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형성체이다. 브렌따노가 단순히 의식과 대상이 일대일 대응 관계에 있다고만 주장했다면 그에 반해서 훗설은 의식과 대상이 형성작용과 형성체의 관계, 즉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의 상관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지향적 의식의 근본구조이다.

○ 프레게 식의 논리주의와의 차이점

― 같은 점 : 훗설이 생각한 대상은 논리주의의 대상과 같이 인식주관의 유무, 또는 여하에 관계없이 보편적, 객관적이라는 점에서 논리주의와 공통점을 지닌다.

― 다른 점 : 그러나 그것이 인식주관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어서(논리주의에서는 대상과 의식의 관계에 주목하지 않는다.), 대상은 어디까지나 인식된, 지향된 대상이어야 한다. 즉, 대상은 주관에 의해서 형성된 형성체이어야 하며,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노에시스-노에마의 상관관계로서의 지향성 개념이다.

※ 수라는 대상 앞에서 수학자는 형성체인 수를 직접 다루지만, 현상학자는 수를 있게 하는 형성 작용으로 눈을 돌린다.

 

4. 훗설의 기술적 심리학과 현상학

○ 기술적 심리학 : 훗설의 초기 사상이다.

훗설은 현상학에서 "대상성으로부터 이것을 의식하는 주관적 체험 및 활동적 형성작용에로 되물어 가려는 시도 및 과제"를 제시한다. 즉, 대상을 직접 문제삼지 않고 대상을 형성하는 지향작용을 분석, 기술하는 것이 현상학적 태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상학은 '기술적 심리학'이라고 불릴 수 있다.

※ 훗설은 의식의 지향성에서 의식의 대상형성 작용과 형성체로서의 대상 간의 관계인 노에시스-노에마 관계를 파악해 내고 이 관계를 통해서 대상을 향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형성작용을 향해서 기술해 나간다.

○ 훗설은 나중에 자신의 초기 사상인 기술적 심리학을 비판한다.

― 내적 경험에 대한 심리학적 기술은 외적 경험의 기술, 즉 자연과학적 기술과 같아서는 안된다. 현상학의 기술은 "경험적 인간의 체험", "실재하는 인간의 실재적인 심리 사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철학이 아닌 다른 분과학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심리학이 경험과학을 의미한다면 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은 기술적 심리학이 아니다.

― 현상학은 순수 기술이어야 한다. 즉, 현상학은 경험적 심리학이 아니라 이것에 기초를 주는 "체험의 순수 본질론"이어야 한다. (왜 현상학이 경험과학에 대한 기초를 제공하는가? 최초의 전제조차 참인 것어야 한다는 엄밀한 학의 이념을 생각하면 이해될 것이다.)

― 현상학은 사실학이 아니라 '선천적(a priori)' 또는 '형상적' 학문으로서의 본질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의 사실에서 그 본질, 형상을 파악할 수 있는 본질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훗설은 "형상적 환원(=본질직관)"에로 논의를 진전시킨다.>

 

5. 형상적 환원

○ 형상적 환원 = 본질직관 ('본질직관'이라는 용어는 플라톤 철학에서부터 시작된다.)

― 형상적 환원이란 사실의 세계로부터 본질, 즉 형상의 세계로의 전환을 가리킨다. 이 때 본질이란 "어떤 사물을 바로 그 사물이게끔 하는 것, 그것 없이는 그 사물과 같은 것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필연적 형식"을 의미한다.

― 본질학으로서의 현상학은 오로지 이러한 본질만을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본질의 파악은 현상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 본질직관은 다음의 세 단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1> 자유변경 : 어떤 대상에서 출발하여 자유로운 상상에 의하여 무한히 많은 모상을 만들어 간다.

2> 이 모상의 다양 전체에 있어서 서로 겹치고 합치하는 것이 종합-통일된다.

3> 여기에서 이 자유변경 전체를 통해 영향받지 않는 불변적인 일반성, 즉 본질을 가려내어 이것을 직관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포착한다.

○ 이러한 본질직관, 즉 "자유변경"의 특징은 '임의성'이다.

― 형상은 경험과는 독립적인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인 의식 사실로부터 초월적 형상을 얻기 위해서는 경험과의 결부에서 완전히 벗어나 "순수 가능성", 즉 "자유로운 임의의 왕국"에 들어가야 한다.

― 따라서 자유변경은 그 "임의성"을 근본적 특징으로 한다. 즉, (1) 변경의 출발점이 임의적인 것이고, (2) 이 임의의 원상을 변경하여 다양한 모상을 만들어 갈 때에도, 임의로 형성해 간다는 것이다.

― 이렇게 순수 가능성의 세계에 들어선 다음에, 임의로 이루어지는 무한히 다양한 변체들을 계속적으로 파지하면,그 계열 내의 모든 임의의 변체들은 서로 중첩되는 일치에 이르러, "순전히 수동적으로 종합적인 통일"에 이른다. 이 겹치는 일치는 완전히 수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수동적으로 선구성되어 있다.

― 형상의 직관은 이 선구성되어 있는 것을 능동적으로 직관하여 파악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 훗설의 개체와 본질의 의미 설명

― 훗설에 잇어서의 '본질'은 플라톤적인 실재론이라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재론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유 : 훗설에게 있어서 개체는 언제나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실은 우연적인 것이라 하지만, 이 우연성은 실제로는 어떤 필연성 즉 본질필연성, 본질일반성에 상관적으로 관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한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개체는 그저 단순한 개체로서 여기에 있는 일회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본질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이란 "그 개체를 그 개체이게 하는 것"을 말하므로 그 개체는 이런 본질을 소유하고 있기에 그러한 개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참된 존재가 개별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자에 있으며 형상(에이도스)이 진정한 실재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가 구체적인 것들에 의해서 그 원래적인 뜻을 갖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인 사물들이 독자적인 실재 자체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 개체직관과 본질직관

― 개체의 직관은 그 속에 내포된 본질의 파악없이는 단순한 인상들의 집적에 불과하다. 즉 개체직관은 본질직관의 가능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본질직관은 해당 개체에로 시선을 전향하는 가능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 이 두가지 직관은, 하나는 그 대상이 개별적 감각 대상이고 또 하나는 일반적 본질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하지만 대상을 원본적으로 파악하는 직관이라는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한 직관이다.

 

6. 선험적 환원(=현상학적 환원)

○ 초재(超在)와 내재(內在)의 구분 및 초재에서 내재로 들어감

― 대상에는 의식 초월적인 대상과 의식 내재적인 대상이 있듯이, 본질에도 의식 초월적인 본질과 의식 내재적인 본질이 있다.

> 의식 초월적인 본질 : 이것은 의식의 여러 형태로만 자신을 표명하는, 따라서 의식에는 간접적으로만 알려지는 본질이다.

> 의식 내재적인 본질 : 이것은 의식에 그대로 현출되는, 따라서 의식에서 직각적으로 파악되는 본질이다.

― 형상적 환원에 의해서 우리는 초월적 본질의 세계로 들어가지만 이 환원을 내재적 본질의 세계로 확장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본질의 파악이 "충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이 "원본적 직관"이 미치는 영역에서 뿐이요, 엄밀학을 추구하는 현상학은 당연히 순수 내재성의 이 참된 현상학적 영역에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초월적인' 것은 경험적인 것을 의미하며 '내재적인' 것은 선험적인 것, 그래서 의식 속에 원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훗설이 본질직관이라고 하는 것은 내재적 본질의 직관적 파악을 말한다. 이런 본질직관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내재적 영역에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훗설은 자연적 태도에 대한 "판단중지"를 제안한다.

(이것이 좁은 뜻의 "현상학적 환원"이다. 넓은 뜻의 "현상학적 환원"은 "형상적 환원"도 포함하는 것이다.)

○ 자연적 태도

― 이처럼 현상학적 환원이란 초월에서부터 내재로의 환원, 즉 의식 초월적인 세계로부터 의식 내재적인 세계에로의 환원을 말한다. (훗설이 이런 것을 의도하는 까닭은 엄밀한 학으로서의 현상학의 이념을 기억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 문제점 : 그러나 형상적 환원(=본질직관)의 특징이 임의성에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우리는 "임의"라는 의식 하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변경 하에서 진정 사실과의 완전한 결별을 이룰 수 있는가?

> 문제의 근거 : 즉 자유변경을 통해서 얻어진 일반적 본질에도 아직 현실성과의 관련이 남아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변경을 할 때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말하자면 '색깔 일반'이, 실지로 보아 온 색깔 또는 인간이 보는 색깔이라는 확신을 저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 발전 방향 : 그러나 형상이 순수 형상이기 위해서는 자유변경에 들어오는 각 변체들이 사실적 현실성과는 완전히 무관하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 눈 앞에 주어지는 사실적 세계와의 결부는 철저히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 여기서 훗설은 우리의 "자연적 태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 자연적 태도란? : "자연적 태도"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취하고 있는 태도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을 지각할 때 그 대상이, 그리고 그 총체인 세계가 지각된 그대로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소박하게(상식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물론 착각이나 환각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때에도 우리는 세계 자체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계확신을 수반하는 생활태도를 훗설은 "자연적 태도"라 부른다.

― 사실과학으로서의 자연과학이나 정신과학은 물론, 형상적 환원을 통해서 도달한 본질학도 이 자연적 태도 위에서 성립한다. 즉 우리는 세계의 존재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순수하게 수나 그 법칙을 연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사물이나 세계의 존재확신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 판단중지의 요청 : 판단중지 때문에 사실적 세계와 완전히 결별한 순수한 형상을 얻으려면 이러한 세계정립과 존재결부를 의식하고, 이것을 의식적으로 무력하게 해야 한다. "판단중지"를 통해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한다.

○ (좁은 뜻의) 현상학적 환원(판단중지)을 하는 이유 = "명증"을 얻기 위해.

― 의식 초월적인 실재로부터 으식 내재적인 현상학적 영역으로 환원을 요구하는 이유는 엄밀학으로서의 현상학이 "무전제의 원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무전제의 원칙이란? : 현상학적으로 완전히 실현될 수 없는 모든 언표를 배제하는 것이 무전제의 원칙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현상학적으로 명증적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말 쉽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무전제"라는 것은 '전제'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무런 전제없이 당연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원칙이 무전제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추리과정이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그 전제마저도 필연적으로 참이어야 한다는 훗설 현상학의 목적에서 출발한다.)

○ "명증"의 뜻과 두가지 계기

"명증", "명증" 하는데, "명증"이란 어떤 뜻인가?

그것은 '충전적'이면서 동시에 '필증적'이라는 뜻이다.

> 충전적 : 원본적 직관에 의해서 있는 그대로 파악 가능함을 충전적이라 한다.

> 필증적 :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의심스럽게 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필증적이라 한다.

<따라서 충전적이며 동시에 필증적이라는 것은 '전체를 바로' 알 수 있으면서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곧 '명증'의 의미이다.>

이런 충전적이며 필증적인 영역이 바로 의식 내재적인 현상학적 영역이요, 현상학적 환원은 바로 이러한 명증을 얻기 위해서 한다.

○ 현상학적 "명증"의 영역 = 절대 명증의 세계 = 내재적 영역

― 외적인 사물을 우리는 그것이 "음영을 지니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서 지각한다. 즉 사물은 우리에게 한 측면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물의 파악은 "충전적"이 아니다.

― 또한 그것이 "음영을 지니고" 나타나기 때문에 나의 지금의 파악은 이후에 틀렸다고 밝혀질 수 있다. 즉 사물의 파악에는 의심 또는 전적인 부정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필증적"이 아니다.

― 그러나 체험은 이렇게 음영을 지니고 한 측면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즉 체험의 대상은 공간적이아니기 때문에 음영진 파악이 되지 않고 전체적으로 남김없이 의식에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 파악은 "충전적"이 된다. 그리고 이 영역에는 가상, 또는 다르게 있음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즉 "필증적" 파악이 된다.

○ 판단중지

― 이처럼 내적 체험에서는 "있음"과 "내적으로 있음"이 일치하고 있다. 훗설은 이런 의미에서 체험류로서의 주관을 '절대적 주관'이라고 한다. (절대적으로 옳다는 의미인 듯 하다.) 이러한 명증적인 현상학적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현상학적 환원을 한다. 그러므로 이 환원은 의식 초월적인 실재와 또 그 총체인 세계에 대해서 소박하게 수락되어 잇는 일체의 존재 정립을 주장하거나 거부하는 것을 보류하며, 그럼으로써 이 정립의 현실적 지배를 '무력하게 하고', 그 소박하게 포함된 확신을 힘을 '배제하며', 그 정립을 '괄호친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조작이 '판단중지'이다.

또한 이는 개개의 존재 정립에 대해서 단계적으로 진행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태도"를 한꺼번에 송두리째 전환해 버리는 '전반적 전향', '보편적 판단중지'를 의미한다.

― 그러므로 여기서의 "판단중지"는 명증적이 아닌 모든 초재적인 것의 배제,제거를 뜻한다. 따라서 환원은 명증의 영역에의 제한, 의식 체험에의 제한이라는 부정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고 물론 초월적인 사물과 세계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 현상학적 환원에는 이렇게 초재에서 내재에로 돌아온다는 뜻만이 포함된 것은 아니다. 즉 제한적, 부정적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상학적 환원에는 "선험적 환원"이라는 뜻도 가진다. 이것이 환원의 적극적 성격이다. 그러면 '선험적 환원'이란 무엇인가?

○ 선험적 환원

― "선험적"의 칸트적 의미 : "선험적"이라는 용어를 칸트도 사용하였는데 칸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했다. 즉 "대상에 관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방식, 더구나 선천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인식 방식 일반에 관한 모든 인식"이 선험적인 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선험적"의 의미는, 첫째로 '선천적'이어야 하며 둘째로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함'을 의미한다.

― "선험적"의 훗설적인 의미 : 훗설에게 있어서 "인식 형성의 원천으로 되물어 가려는 동기"는 모두 다 "선험적"이다.

― "선험적"의 의미에 있어서 칸트와 훗설의 차이점 : 칸트에서는 대상의 선천적인 인식방식에 관한 인식에만 국한되는 데 반해서, 훗설은 대상 자체에 관계하는 인식도 그 근원을 인식의 인식 작용으로 되물어 들어가는 한에서는 모두 "선험적"이 된다. 즉 훗설에서의 "선험적"은 반드시 "선천적"일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의 시선을 대상으로부터 대상을 형성하는 주관의 의식작용으로 돌이기만 하면 그것은 곧 "선험적"이다.

― "선험적" 태도의 적극적 의의 : 선험적 태도를 단지 대상에서부터 주관으로의 방향전환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훗설은 "선천적"이라는 칸트의 첫 번째 계기는 버리지만,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두 번째 계기는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즉 대상에서부터 우리가 시선을 돌리는 인식주관이란, 단순한 표상작용을 하는 주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형성하는 주관이기도 하다. 즉 의식주관은 판단 중지에서 모든 초월적인 것이 배제되고 남는 '현상학적 잔여'에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대상을 존재케 하는 생산적 기능을 가진 존재이다. 이 생산적 기능이 바로 "선험적"이라는 개념의 핵심이다.

― 즉 우리는 판단중지를 통해서 이 선험적 주관에서 대상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소박하게 수락되어 있는 일체의 정립에 대해서 판단중지함으로써, 밖으로 향한 우리의 시선을 인식주관과 그 대상형성작용으로 돌려,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필 수 있는 자유를 얻으려는 것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판단중지를 통한 현상학적 환원은 선험적 환원이라 불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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