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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설(Husserl)의 현상학 요약 <2>

당신은 번째 손님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자연적 태도를 배제하기 위하여 판단중지를 하며 이를 통하여 순수 의식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 선험적 주관에서 대상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볼 차례이다. 즉 지금까지는 의식의 순수한 영역에까지 파고 들어왔다면 이제부터는 이 출발점에서 어떻게 의식 바깥에 있는(초월적인) 대상으로 나아가는지를 살펴볼 차레이다.>

7. 순수의식

○ '절대적 존재'로서의 의식과 초월적 실재

<말이 어렵지만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즉 "다른 것과 상관없는 나의 의식과 이 의식의 세계 바깥에 있는 경험적 실재".>

― 의식은 초월적 세계와는 전혀 독립해 있고, 원칙상 그 현존을 위해서 아무 사물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식은 '절대적 존재'이다. 그러나 초월적 실재는 의식에 대해서 상대적이다. 물론 여기서의 실재, 사물은 지향된 현상적 대상을 말하며, 한마디로 "경험된 사물로서의 사물"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실재는 '의미의 통일'을 지니고 있고, 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주관이며 의식이다. 즉, 실재는 의식에 의해서 비로소 의미적 존재가 되며, 그러한 의미에서 주관에 상대적이다.

― 실재가 그 자체의 의미를 얻는 과정이 "구성(Konstitution)"이다.

○ 순수의식의 대상 형성

― 순수의식의 대상 형성은 질료, 노에시스, 그리고 노에마를 통한 구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1> 질료 :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여러 감각 여건들이다.

2> 노에시스(noesis) : 이 질료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지향적 대상을 성립케 하는 대상 형성 작용.

3> 노에마(noema) : 노에시스의 대상 형성 작용에 의해서 성립된 대상.

4> 구성(konstitution) : 노에시스가 질료를 소재로 하여 노에마를 형성하는 것이다.

― 훗설에서의 '구성'은 칸트에서의 '구성(konstruktion)'과는 다른 것으로, '대상을 표상케 함', '우리가 알 수 있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함', 즉 '그 의미를 밝힘'이라는 뜻이다.

○ 노에마의 성격

> 질료와 노에시스(대상형성 작용)는 의식에 "내실적(reell)"으로 내재한다. 그러나 노에마(대상)는 의식을 초월한 존재이다. 그렇다고 이 내실적이 아닌 노에마가 현상학적 의식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노에마는 비내실적이면서 현상학적 의식에 내재한다.

> 판단중지에 의해서 일단 배제된 의식 초월적 존재는 모두 이 노에마로서, 즉 (대상 형성작용하는, 또는 의미 부여하는) 인식주관의 상관자로서 현상학적 의식 속에 되살아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초월자는 '현상'으로서 다루어지게 된다.

○ '현상학적 내재'의 의미 변화

판단중지에 의해서 도달하는 현상학적 잔여로서의 명증의 영역은 오로지 내실적으로 내재적인 순수의식의 체험류 뿐이다. 질료와 노에시스가 이러한 순수의식의 체험류에 속한다. 이 내실적 내재 이외에 주관에 의해서 구성된 모든 지향적 존재도 현상학적 내재에 포함된다. 이렇게 구성된 지향적 존재가 '현상'이며 의미적 존재이다.

○ 이중적 존재로서의 주관

주관에는 두가지의 다른 측면이 있다. 하나는 정신물리적(심리학적) 주관이고 다른 하나는 선험적 주관이다.

> 정신물리적 주관(심리학적 주관) : 자연적 태도에서 보는 주관으로서 심리학의 탐구 대상이 되는 주관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관찰하는 다른 사람의 주관이다.>

> 선험적 주관 : 선험적 태도에서 보는 주관으로서 세계를 구성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선험적 주관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느끼는 나의 주관이다.>

― 훗설은 심리주의가 이와 같은 주관의 양의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비판단다. 그 때문에 심리주의는 선험적 환원의 본질, 즉 근본적인 태도 변경의 가능성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8. 선험적 관념론

○ 선험적 현상학은 선험적 관념론이다.

선험적 환원에 의해서 모든 초월적인 존재는 순수의식에서 구성된 현상으로 밝혀진다. 즉 선험적 현상학에서는 존재란 오로지 현상으로서의 존재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서 현상학은 "선험적 관념론"임을 알 수 있다.

○ 관념론이란?

― 훗설에게 있어서 관념론이란 관념적 존재를 객관적 인식 일반의 가능 조건으로 인정함으로써 관념적 존재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인식론의 형식이다.

― 이러한 관념론 이해는 심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주목적으로 하여 실재적인 대상 외에 개념, 명제, 진리 등 관념적 대상의 자체적 존재를 강조하고 이 관념적 존재 속에서 학문 일반의 가능조건을 인정하려는 입장이다.

○ 모든 대상은 의식의 구성작용의 산물이다.

즉 구성작용으로서의 주관이 객관에 앞선다.

○ 훗설 관념론의 특징

― 심리학적 관념론(흄, 버클리)과의 차이 : 훗설이 보기에 심리학적 관념론은 심리주의에 빠진 관념론이다. 이와는 달리 선험적 관념론은 '무의미한 감성적 자료에서 유의미한 세계를 도출'하고자 한다.

― 칸트 철학과의 차이 : 칸트는 "최소한 한계 개념으로서의 물자체의 세계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칸트는 의식과 의식 밖의 사물이 결합해서 지식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훗설에 의하면 우리의 순수의식 밖의 그 무슨 물자체와 같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즉, 선험적 주관성의 세계에서는 그 밖이란 무의미하다. 모든 초월적 존재는 순수의식 내에서 구성된 것이고, 모든 존재는 의미 및 존재를 구성하는 선험적 주관성의 영역 내에 들어온다. 따라서 거기에는 내재-초재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환원에 의해서 의식의 섬에 들어갔다면 언제 나오는가라는 질문도 성립할 수 없다.

―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선험적 주관과 거기에서 구성된 형성체뿐이다. 모든 것은 주관에 대해서 상대적이요, 주관은 여기에 절대성을 띠게 된다. 모든 실재, 세계는 의미를 부여하는 '절대적 순수의식'과 관련된 의미 통일체이다.

○ 선험적 관념론의 과제

선험적 관념론의 과제는 세계의 의미를 해명하는 것, 즉 세계가 모든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타당하고 또 참으로 정당하게 타당한 그 의미를 해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험적 현상학적 관념론은 실재적 세계의 현실적 존재를 부정하거나 또는 가상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다.(이른바 심리학적 관념론이 이러한 현실적 존재를 부정했다고 볼 수 있다.)

 

9. 절대적 관념론

○ 절대적 관념론

― 선험적 주관성은 '그 자신 완결된 존재관련'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존재 일반의 원범주 내지 원영역이요, 모든 다른 존재 영역이 거기에 뿌리박고 있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거기에 의존하여 있는 절대적 존재이다.

― 따라서 선험적 관념론은 다른 여러 철학 중의 한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종류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궁극적 기반으로서의 "절대적 관념론"이다 실로 모든 존재는 절대적 주관과의 관계에 있어서만 존재한다. 절대적 의식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 의식과 실재와의 또 하나의 관계

― 의식과 의식 초월적인 실재 사이에는 "언리 상의 구별", 또는 "원칙 상의 이질성"이 있다. 여기서의 "원리상의 이질성"이란, 실재는 결코 의식에 환원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의식 초월적이라는 뜻이다.

<훗설의 모순 : 선험적 관념론에서는 실재가 실재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의식에 의존적이라고 하면서, 여기서는 다시 실재가 의식과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결코 의식에 환원될 수 없다고 하는 데에 모순이 있지 않는가?>

○ 선험적 절대성 = 현상학적 절대성

― 의식과 초월적 실재가 이질적이라는 훗설의 주장은 의식주관이 실재의 가능성의 한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충분한 원인까지는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주관없이는 실재 세계는 그 의미를 얻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주관이 세계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의미와 객관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의미 부여작용이 바로 주관의 대상 구성작용이다.

― 구성작용은 그 의미 부여 작용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주관에는 주관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실성'이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서 주어진다. 즉 노에시스는 그 질료가 주어져야만 노에마(의미 형성체)를 구성할 수 있다. 이 질료는 현상학적 주관의 밖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주관이 스스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 정리하면 : 현상학적 주관성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주관성이다. 더 나아가서 모든 실재의 가능 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즉 상대적인 이차적인 실재에 대해서는 절대적 선험적 주관성이다. 그러나 이 주관성의 절대성은 선험적 절대성이며 실재의 한 필요조건이지 충분한 원인은 아니라는 점에서 제한된다. 선험적 절대성은 '현상학적 절대성'이지 '절대적 절대성'은 아니다.

<앞에서 질료와 노에시스가 내실적으로 내재한다고 한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다시 훗설은 질료가 현상학적 주관의 바깥에서 주어진다고 말하였다. 한편으로 노에시스가 노에마를 구성할 때에는 주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실성이 있으며 노에시스가 이 사실성에서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사실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의식 바깥에서 와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다른 철학과 현상학이 궁극적으로 비슷하지 않는가?>

○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의 실패?

이처럼 볼 때 훗설도 어떤 의미에서는 칸트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즉 구성이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형태로 밝히는 것'을 말한다. 현상학적 주관은 객관적인 것이 주어지지 않아도 자존할 수 있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 구성작용은 이러한 주어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 따라서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의 꿈은 깨어졌다.

이유 : 훗설은 애초부터 그 전제도 절대적으로 참인 학문을 찾아서 현상학을 시작하였다. 그러한 절대적인 명증을 위해서 판단중지를 거쳐서 순수의식에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막상 이제 세상에 대해서 의미있는 말을 하고자 하니까 주관 안에서 찾을 수 없는 사실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사실성은 객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잘못 알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절대적 의식 속에는 주관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불투명한 질료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선험적 관념론에서 생활세계적 현상학으로>

 

10. 생활세계적 현상학

○ 생활세계의 의미

― 생활세계란 일상적 상식적 세계를 말한다. 즉 훗설의 용어에 따르면 자연적 태도에서 체험되는 일상적인 세계이다. 특히 이것은 자연과학적 사고의 색안경으로 본 세계가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주어지고 느껴지는 자연을 가리킨다.

← 현대인의 상식은 자연과학적 사고에 물들어 있다. 즉 지구는 공전, 자전하고 있고 또 둥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과학적 지식을 객관적인 진리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느낌으로는 지구가 정지해 있고 평면이다.

― 우리는 진리란 우리의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이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직접 주어지는 자연은 주관적, 상대적인 지각적 자연이다. 이는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에서 보면 '한갖 주관적임'에 불과한 억견의 세계가 되겠지만.

― 훗설이 현상학적 환원에서 배제한 자연적 태도란 바로 이러한 자연과학주의적인 자연적 태도이다. 이와는 달리 "생활세계"란 이러한 자연과학주의에 물들지 않은 원초적 지각에 나타나는 세계, 다시 말해 모든 이론, 논리에 앞서서 우리의 감각에 최초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세계이다.

― 그러므로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학문의 세계, 논리의 세계에서, 그에 앞서는 "선논리적 세계에로의 귀환"을 말한다. 생활세계적 현상학에서는 '술어적인 명증'의 근원을 '선술어적 명증'에서 찾으려는 생활세계적 환원이 요구된다. 즉 학문적 논리적 명제는 생활세계적 체험이 추상되고 논리화된 것이니, 명증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생활세계적 환원이 더 근원적인 것이다.

○ 선험적 현상학에 이르는 훗설의 두가지 길

> 생활세계를 통한 길(=고전적 현상학) : 우선 생활세계를 통하여 선험적 현상학에 이르는 길이 있다. 이것은 객관적 학문에 대한 판단중지에 의해서 생활세계에 도달하고, 이것은 다시 선험적 환원에 의해서 선험적 주관에까지 소원되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생활세계는 주관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의미적 세계가 된다.(이것은 선험적 관념론의 형태를 취하는 '고전적 관념론')

> 종착점으로서의 생활세계(=생활세계적 현상학) : 훗설에 있어서 순수 노이시스학과 순수 질료학은 동등한 자격을 가진다. 생활세계적 현상학은 고전적 현상학이 노에시스 작용에 치중하듯이, 생활세계적 현상학은 질료 쪽에 더 비중을 둔다는 데 그치지 않고, 훗설의 현상학을 전적으로 질료의 면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 이 때 중심개념을 이루는 생활세계는, 선험적 주관의 노에시스 작용에 의해서 구성된 의미현상으로서의 세계인 "구성된" 세계가 아니라 "체험된" 세계이다. 그리고 이 체험의 주체는 이론적인 주관이 아니라 "신체를 지닌 주관"이다. 이 신체적 주관이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세계가 바로 생활세계이고 여기서 최후의 명증을 구하는 견해가 바로 생활세계적 현상학이다.

○ 생활세계적 현상학

― 고전적 현상학과의 차이점 : 생활세계적 현상학은 '질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고전적 현상학과 차이점을 보인다. 고전적 현상학에서는 주관의 구성작용에 치중하게 되고, 따라서 질료는 그저 '주어진 것'으로서만 문제된다. 그러나 질료학에서는 이 질료가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묻는다.

― 질료란 동기지어진 결과이다. : 우리가 보는 상은 '만일에(wenn)' 내가 눈을 이렇게 돌리면, '그러면(so)' 이렇게 보이고, '만일에' 저렇게 돌리면, '그러면' 저렇게 변한다. 질료란 이렇게 'wenn'이라는 동기를 주는 계기에 의해서 '동기지어진' 결과(so)이다.

― 운동감각(Kinästhese)이란? : 운동감각이란 운동(kinesis) + 감각(aisthesis)이다. 운동이란 신체의 운동이요, 따라서 이 말은 우리의 감각이 신체의 운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신체란 무엇인가? : 신체는 외적으로 볼 때 다른 여러 사물과 서로 인과관계를 갖는 사물이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언제나 '여기'로서의 방위 중심을 이룬다. 또한 신체는 내적으로 볼 때 자발적이며 자유로운 자기운동을 할 수 있는 의지기관이다. 감각적 질료는 물론 주관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질료의 주어짐은 '자기운동(Ich bewege mich)'이라는 신체의 자발성을 기초로 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사물을 지각할 때 사물과 더불어 그 배경으로서의 세계도 동시에 지각하는데, 이런 세계 또는 지평이라는 개념은 "만일에 내가 나의 경험을 이러저러하게 더해 나간다면"이라는 배경의식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신체는 세계 및 타 사물들 속에 있으면서 이 사물들과 세계를 밝혀내기도 한다.

― 생활세계 : 이러한 신체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체험되고 있는 세계가 바로 생활세계이다. 이것은 선험적 주관의 능동적인 구성작용(노에시스)에 앞서서 수동적으로 주어져 있는 세계이다. 이른바 논리적, 술어적 세계에 앞선 "선술어적" 영역이다.

― 선술어적 : 그러나 생활세계의 영역이 아직 지각이나 인식의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해서, 아무 질서도 없는 혼돈의 영역인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의 인식은 우리의 관심이나 주의작용이 어떤 대상에 쏠린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내가 책을 읽을 때, "내 귀에 들리고 있으면서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개 짖는 소리"는 아직 능동적으로 파악되는 것은 아니면서 단지 외적 인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수동적인 단계이다. 수동적이란 주관의 능동적 작용이 없다는 것, 그래서 그에 앞선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관작용에 물들지 않은 질료, 소재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선술어적"이라고 한다.

― 수동적 종합 " 그러나 선술어적 영역에 있는 저 "개 짖는 소리"는 아직 주관에 의해서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여지고는 있다. 그것도 장차 "개 짖는 소리"로 파악될 어떤 통일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구나 이 수동적인 질료의 영역에는 이런 통일체들이 서로 동질적인 것끼리 모이고 이질적인 것끼리 대조를 이루고 하는 연합의 법칙이 있어서 그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다. 이렇게 질서지워지는 것이 바로 "수동적 종합"이다. 이 때의 종합이란 인상들 상호간의 자발적인 결합을 말한다.

― 잠재적 질서 : 이러한 질서가 물론 논리적, 술어적인 드러난 질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결코 혼돈은 아닌, 따라서 일종의 질서라고 할 수 있는, 그리고 장차 거기서부터 술어적인 질서가 파악될, 그러한 질서를 선술어적 영역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므로 잠재적 질서라 할 수 있다.

― 잠재적 질서의 성격 : 이것은 객관적 사실계의 질서는 아니다. 그것은 신체적 주관이 외계와 같는 관계에서 생긴 것, 즉 의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관 자체는 더욱 아니다. 이것은 주관의 선천적 기능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훗설과 칸트의 차이점 : 칸트의 구성에서 주어지는 질료는 주관의 선험적 기능(시간, 공간, 범주)에 의해서 마음대로 구성되는 소재인데 반해서, 훗설의 구성에서 주어지는 질료는 주관의 능동적인 규제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체적 질서를 미리부터 가지고 있는 소재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구성은 주관이 구성하는 대로의 것인데 반해서 훗설의 구성은 미리 주어진 것을 밝힌다는 뜻이 강하다. 즉 훗설의 생활세계적 현상학에서는 주관의 능동작용보다는 수동적인 선소여성의 분석이 주를 이루며, 이 때에 있어서 '안다'는 것은, 이 선술어적 단계에서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밝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술어적 명증의 근원을 선술어적 명증에서 찾는다는 말이다.

※ 훗설의 기본적 확신 : 술어적 진리의 골격은 이미 선술어적 영역에 모두 주어져 있다. 즉 두 영역의 구조는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

→ 따라서 생활세계적 현상학과 고전적 현상학은 서로 다음과 같은 관계에 있다. 즉 생활세계적 현상학이 고전적 현상학의 기저를 마련해 주는 관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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