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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인(Quine, W.V.O) 철학 요약

○ 요지 : 언어적인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한 자다. 그 자신은 상대주의 라고 생각하지 않은 듯 하지만 언어적인 상대주의의 가장 과격하고 정교한 측면을 제공했다 고 불 수 있다.

○ 콰인 철학의 두 단계 구분

1> "Two Dogmas of Empiricism" (1950)

여기서 콰인은 분석적 명제와 종합적 명제의 구분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전체주의적 경험주 의(holistic empiricism)를 제시한다.

2> "Word and Object" Ch.2. (1960)

원초적 번역의 불확정성을 제시한다. 원초적 번역의 불확정성이 궁극적으로 존재론적 상대 론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라고 믿는 것은 분할한 대로의 세계라는 상대 주의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 "Ontological Relativism" (1969)

○ 분석명제와 종합명제 구분

라이프니츠 이후에 현대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 중의 하나가 종합명제와 분석명제의 구 분이었다.

분석명제는 논리학이나 수학의 명제처럼 항상 참이거나 항상 거짓인 명제들이다. 칸트는 분 석명제란 주어의 개념 속에 이미 술어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명제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 어의 낱말의 뜻만 알면 이미 그 명제가 주장하는 내용도 이미 알고 있다. 분석 명제가 나에 게 제시되었다고 해서 내가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확장되지 않는다.

예) 총각은 미혼의 남성이다.

따라서 칸트는 분석명제를 설명명제라고 했으며 라이프니츠는 이성의 진리, 흄은 관념들의 연결(relation of ideas)이라고 하였다.

종합명제는 주어의 개념 속에 술어의 개념이 포함되지 않는 명제이다.

예) 파깨비는 총각이다.

이것이 거짓명제가 되면 파깨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이 그만큼 늘어난다. 칸트는 이것 을 확장판단(Erweiterungsurteil), 라이프니츠는 사실의 진리, 흄은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라고 한다.

분석명제는 세계와 아무 상관없이 참, 거짓을 결정할 수 있는 명제이다. 논리의 요청만 충족 시키면 참,거짓이 결정된다. 그러나 종합명제는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비로소 참, 거짓이 결 정된다.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 확인해야 한다. 종합명제의 참, 거짓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즉 실재와 비교해 봐야 결정이 된다고 지금까지 생각되어 왔다.

이 구분은 아주 절대적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특히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해 왔다. 그 런데 콰인은 여기에 대해서 최초의 체계적인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콰인에 의해 위 구분이 없어진다면, 그 참, 거짓이 객관적인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없어진다. 그러면 분석 명제야 논리적인 방법으로 참, 거 짓을 결정한다지만, 종합명제의 참, 거짓은 어떻게 결정하는가?

콰인이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구분에 대해서 제기하는 반론은 이런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분명한 논지가 아니고, 이 구분을 하기가 생각보다 상당히 어렵다는 정도이다. 그 구분 을 위해서는 우리는 순환론적인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는 논변이다.

○ 분석명제와 종합명제 구분 비판 : 분석성 개념 정의는 순환적이다.

우선 분석 명제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경우를 말하는지 생각해 보자.

1> 총각은 총각이다.

2> 총각은 미혼의 남성이다.

1>에서 2>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총각'을 '미혼의 남성'으로 대치하였다. 즉 동의어 (synonymity)를 대치하였다. 그 다음 단계로 '총각'과 '미혼의 남성'이 동의어의 관계에 있다 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배웠든지 또는 사전 등에서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배운대로의 말의 뜻이나 사전에 있는 동의어들은 그것들의 동의성의 개념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 그런 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총각'과 '미혼의 남성'을 동의어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밝 히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같은 의미를 가졌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때 지시하는 대상이 같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그 개념의 외연을 가지고 결정한 것이 다. 즉 개념의 외연이 같으면 그 의미는 같다. (외연론적 의미론의 입장)

'총각' 대신에 '미혼의 남성'을 바꿔넣었을 대 그 문장의 진리치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지 시하는 대상이 전적으로 똑같기 때문이다. → 진리치를 보존하는 교환가능성 (interchangeability salva veritate)

이 조건을 충족하면 두 언어적인 표현사이에는 동의성의 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2> 모든 심장을 가진 동물은 심장을 가진 동물이다.

3> 모든 심장을 가진 동물은 신장을 가진 동물이다.

3>과 4>는 참인 명제이다. 그런데,

3-a> 모든 심장을 가진 동물은 필연적으로 심장을 가진 동물이다.

4-a> 모든 심장을 가진 동물은 필연적으로 신장을 가진 동물이다.

3>은 '필연적으로'를 대입해도 진리치의 변동이 없다. 그러나 4>는 '필연적으로'를 대입했을 때는 참이 아니다. 즉 진리치가 보존되지 않는다. 이렇게 3>,4>의 경우에는 진리치를 보존 하는 교환가능성이 적용되지 않는다. 3>은 분석적인 명제이고 4>는 분석적인 명제가 아니 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분석적인 명제가 아니면 '필연적으로'라는 필연성의 개 념을 대입하면 그 진리치가 보존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렇게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분석성이 요구된다. 다시 분석성으로 돌아 온 것이다. 그 래서 순환적이다.

<결론> : 이렇듯이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를 정확히 구별할 방법이 없다. 그 구분이 된다면 분석적이 아닌 명제가 종합적인 명제가 되겠지만, 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분석적인 명제 가 감각적인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명제라고 주장을 할 근거가 없어진다.

○ 대안으로서의 전체론적 경험주의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를 구분할 수 있다고 했을 때, 전제되는 것은 한 명제의 참, 거짓을 그 명제만 떼어놓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 파깨비는 총각이다.

그러나 예의 경우 알고 있어야 하는 지식이 많다. 파깨비가 어떤 사람의 별명이고 남자라는 것, 총각도 역시 사람이고 남자이며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사실들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 명제가 참, 거짓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알아야하는 지식들이 굉장히 많다. 그 참, 거짓을 결정하는 것은 상당히 광범위한 지식체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 전체주의적 인 경험주의(holistic empiricism)

즉 현대 경험론에서 전제하고 있는, 명제를 하나하나 떼어서 경험적 사실과 1대1로 맞대어 서 참, 거짓을 결정하는 환원주의(reductionsim)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 주의는 우리가 버릴 수 없으므로, 개별적인 명제의 경험주의가 아닌 지시체계 전체의 경험 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19C의 프랑스 과학철학자인 Duheh의 전체주의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다. 우리가 과학에서 실험을 하는 것은 독립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전제의 집합 전체의 실험을 하는 것이다.

"This is white"

이 명제만 따로 떼어 1대1로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this"가 지시대명사, "white"는 색을 나타내며 사물의 질을 나타낸다는 식의, 이 명제가 의미있는 것 이 되기 위해 내가 가지고 들어가는 세계에 대한 전제가 동원되어야 한다.

이것을 더 확장시킨 것이 원초적 변역의 불확정성이며, 한 걸음 더욱 나간 것이 존재론적 상대성이다.

○ 원초적 번역의 불확정성

"Two Dogmas of Empiricism"에서 취한 전체론적 경험주의와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에 관한 논의가 하나의 포괄적인 철학적 입장으로 주장되는 것이 이 이론이다.

논의의 시작은 아주 원초적인 번역(radical translation)의 상황에서 시작된다. 언어학자가 어 느 부족의 언어를 영어로 번역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언어는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생소 한 언어다. 언어학자는 그 사람들의 언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 경우 그 언어학 자가 의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토대로 번역을 시작할 수 있는가?

그 부족의 행태(stimulus-response)를 관찰할 수밖에 없다.(일종의 행태주의) 그는 이 전제 에서 출발한다. 이 때 그 원초적인 번역은 원칙적으로 불확정적이다. (불가능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관찰하는 부족의 행태와는 일치하면서도 그들이 쓰는 언어적인 표현은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원칙적으로는 영어를 한국말로 옮길 때 등에 적용되는데, 더 극단적으로는 같 은 한국말을 쓰는 경우에도 같은 한국인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이 불확정성이 적용될 수 있 다. 심지어는 나 자신의 말 중, 일년 전에 썼떤 글을 다시 이해하려고 할 때도 적용될 수 있 다.

토끼가 지나간다. 내가 관찰하고 있는 낯선 원주민이 "가바가이!"라고 소리친다. 이 때 가능 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1> There goes a rabbit!

2> There goes an undetache part of rabbit!

3> there goes a rabbithood!

기타 등등.

그 사람의 행태(behavior)만 가지고 그 행태와 전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번역이 가능하다.

여기서 이 정도의 번역이라도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제되고 있는 것이 상당히 많다. 우선 가 바가이!가 일종의 감탄문임이 전제되어 있다. 관찰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진술들이 대상을 객체화, 개별화(individuation)하는 방법에 있어 우리의 그것과 같다고 전제되어 있다. 내가 세계에 대해 이미 전제하고 있는 working hypothesis(실질적인 가설이나 분석적 가설 (analytic hypothesis) : 번역하는 과정에서 내가 번역을 하기 위해 전제하고 있는 틀)가 여 러 가지로 많다.

그런데 이런 전제가 그야말로 전제에 불과하다. 원주민의 개별화는, 생명체가 개별화의 단위 가 아니라 생명체의 기능적인 부위들-눈, 손, 톱 등-을 기본으로 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개별화의 방법이 우리의 개별화의 방법과 같다는 전제가 되어있을 뿐이다. 이러한 분석적 가설(analytic hypothesis)이 상당히 많다. 번역을 하는 데 내가 세계를 보는 방식과 그가 세 계를 보는 방식이 똑같다는 전제를 하지 않고서는 번역기 불가능해진다. 즉 번역을 하기 위 해서는 공통적인 배경언어(background language)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배경언어의 틀 을 이루고 있는 개념적인 틀을 내가 가지고 들어간다는 뜻이다.

자극과 반응만 가지고서는 수없이 많은 번역이 가능해진다. 그 수없이 많은 번역 중에 내가 맞는 번역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그들의 배경언어와 내가 말을 할 때 똑같은 배경언어를 전 제로 할 때 가능해진다. 개별화의 원칙을 위시로 해서 여러 개념적인 원칙들이 그런 배경언 어이다.

○ 존재론적 상대성

여기서 더 나가면, 세계를 안다는 것은 그런 배경언어의 틀 속에서 아는 것이다. 의사소통을 할 때, 세계를 볼 때 배경언어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들어간다는 사실이 주어져 있으므로 가 능하다. 콰인에 의하면 따라서 배경언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없으면 언어행위도 불가능하고 세계체험도 불가능해진다.

모든 세계는 우리 언어가 만들어 놓은 세계이며 우리 언어에 의해 개별화된 세계이다. 예를 들어 희랍의 신화체계가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에 승부가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판가름난다. 이것도 일종의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방식이다. 이 런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방식과 현대물리학의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방식은 다를 게 없다. 둘 다 문화적인 구상물(cultural posits)이다. 우리가 믿는 것도 일종의 신화이다. 그러나 호 머(Homer)의 신화보다는 나은 신화이다. 우리의 체험의 흐름을 정리하는 데 더 효과적인 틀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efficacious)

그래서 콰인은 신화나 가치명제와 과학적 명제 사이에는 절대적 구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 람에 반대한다. 연속체의 지속체(continuum)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신화나 과학적 명제사이 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배경언어를 선택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부분적으로 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원칙들은 무엇인가? 별 것 아니다. 실용주의적인 고려가 작용한다.

1. 보수주의적인 원칙

가급적이면 이미 가지고 잇는 개념적인 틀에 적은 변화를 가져오는 배경언어.

2. 단순성의 추구

배경언어가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좋다.

○ 콰인 비판

콰인은 언어의 역할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아닌가? 오히려 정반대가 아닐까? 언어는 자 연환경에 대처해나가기 위한 여러 가지 도구 중의 하나이다. 우리 언어가 진리개념, 허위개 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 세계에 대처해 나가기 위해서이다. 언어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사 유에도 앞서고 실재에도 앞선다고 본다면 이런 풀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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