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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joonProfile Articl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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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대중음악, 테크놀로지
연말이 다가온다. '대중음악 평론가'라는 직업을 가진 나같은 사람은 연말이란 '한해를 정리하는 특집에 대한 잡지사로부터의 의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말 정도가 아니라 세기말'이다. 예년같으면 1년을 정리하면 그만이었고, 10년 전 이맘 때만 해도 10년을 정리하면 그만이었는데, 이번에는 100년이 아니라 1000년을 정리해야 한다. 일단 시간의 간격을 좁혀서 구(舊)천년의 막바지만을 정리해보자. 과감하게 말하면 20세기는 대중음악의 세기였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진지한 음악(serious music)'의 애호가들이 눈쌀을 찌푸리겠지만, 하던 김에 계속 우겨 보겠다. 20세기가 대중 음악의 세기라고 주장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대중' 음악이 레코딩(recording)과 복제(copy)라는 기술적 실천과 불가분하다는 점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현대의 음악은 레코딩 테크놀로지의 발전의 산물이다. 현대인이 음악을 듣는 방식의 90% 이상은 누군가가 미리 녹음한 미디어의 '재생'이다. 이 미디어는 대량으로 복제된 것이고, 우리는 각종 오디오 기기를 통해 '대량복제된 미디어로 재생되는 음'을 듣는다. '라이브 연주'조차도 각종 전기.전자장비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점은 너무 자명해서 정색하고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이야기같다. 하지만 이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은 꽤 복잡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부모님에게 물어본다면, 현재의 노인 세대들이 금세기 전반에 즐겼던 음악적 경험은 악극단의 '라이브 공연'이 지배적이었다. 축음기와 '레코드판'은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다. 라디오와 TV가 대중화된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고, 오디오를 '가구'나 '혼수' 개념으로 너도 나도 구매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년 전부터의 일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라이브 문화에서 레코드 문화로의 이행'이라는 현상은 대체로 공통적이었다. 레코드 문화로의 이행이 완료된 지금 현재 음악을 즐기는 지배적 경험은 어떤 것인가. 가장 많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TV 화면에서 립씽크를 하는 아이돌 그룹이 부르는 3-4분짜리 가요'의 모습이다. 조금 비약한다면 '세기말 한국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테크놀로지의 승리를 감상하는 것이다. '공연장'인 방송국 스튜디오에서는 사전에 미리 녹음한 음을 '틀어주고', 이 음들에는 악기음 뿐만 아니라 가수의 목소리도 포함된다. '뮤지션 없이 음악을 만드는 일'은 실제로 가능해졌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세기말이라는 화두가 '문명의 과도한 발달로 인한 인간성 상실과 불안감'과 연관된다면 대중음악계는 이 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場)일 것이다. 대중음악계의 병폐로 지적되는 '표절 시비'는 하나의 단면일 뿐이다. 논조가 비관적으로 들릴 지 모르겠다. 아니면 상투적인 '10대 중심 댄스가요 비판' 혹은 이를 조장하는 '지상파 방송 비판'으로 들릴 지도.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테크놀로지가 문화를 망쳐버렸다'는 주장이 아니라 테크놀로지와 문화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보편적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는 비틀스의 록 음악은 멀티트랙 레코딩이라는 기법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다. 비교적 최근의 국내에서의 예를 들어봐도 서태지나 조 PD의 문화적 가치는 '샘플링(sampling)'이라는 복제 기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들의 음악을 라이브만으로 연주하기는 힘들지만, 이들이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힘들다. 현대의 대중음악에서 예술가는 '엔지니어'와 잘 구분되지 않는다. 단지 음악의 생산만 그런 게 아니다. 최근 새로운 음악시장으로 각광받고 있는 'mp3 시장'은 기성의 '음반(CD, 테이프 등등) 시장'과는 판이하다. 인터넷에 접속한 뒤 마우스를 클릭하여 파일을 다운로드받은 뒤 간단한 프로그램만 있으면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굳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음반을 구할 필요가 없고, 한 번 구매한 CD와 테이프를 찾기 위해 방 여기저기를 뒤질 필요도 없다. 음악을 듣다가 싫어지면 '딜리트'하고 다른 음악을 다운받으면 그만이다. CD 레코더같은 간단한 장비만 있으면 집에서 음질의 손실 없이 복제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내내 '진정한' 뮤지션들과 일군의 평론가들은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을 비판해 왔고, '디지틀 테크놀로지가 예술적 창의성을 질식시킨다'는 주장도 들려온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문제는 좀 다른 데 있다. 앞서 언급한 'TV 화면에서 립씽크를 하는 아이돌 그룹이 부르는 3-4분짜리 가요'로 돌아가 보자. 내가 보기에 이 모습은 테크놀로지를 남용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보수적으로' 사용한 결과다. 다른 점을 차치한다고 해도, 엄청한 창조의 가능성을 가진 장비로 '3분 짜리 가요'라는 관습적 형식을 대량생산하는 현상은 좀 그렇다. 음악 수용자도 마찬가지다. 지상파 TV와 라디오같은 오래된 미디어에 집착할 뿐 '뉴 미디어'에 민감한 수용자는 주위에 그리 많지 않다. 어쩌다 그런 사람이 발견되면 '매니아'라고 규정지어 버릴 뿐이다. '니네들 여기서만 놀고 더 이상은 나오지 마'라는 뜻이다. 어쩌면 이렇게 만드는 어떤 힘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 힘은 테크놀로지의 힘이라기 보다는 사회문화적 힘 같다. 어쨌든 "21세기에 어떤 음악 장르가 등장하고 유행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심령술사가 아닌 다음에야 알 수 없다"는 말에 덧붙여 "디지틀 테크놀로지가 개방한 '기록과 복제'의 가능성이 혁신적으로 사용되는 음악"이라는 모호한 말을 덧붙일 작정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비관.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창조나 혁신이라는 말이 낯선 것 또한 사실이다. 어디서 이런 말이 들려온다. "음악이란 게 들어서 좋으면 그만이지 뭐". 맞다. 하지만 '들어서 좋게 만드는' 과정은 좀 복잡할 텐데....
199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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