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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국적'과 지구화
오늘의 주제는 '음악과 국적(nationality)'이다. 무슨 대학교 강의 계획서에나 나올 주제같긴 하지만 기왕 그런 말 들을 바에야 하나 더. 오늘의 부제는 '지구화(globalization) 시대의 국민적 대중음악'이다(지구화라는 말은 한국 '방언'으로는 세계화다). 세기말이니까 거창한 얘기 하나 한다면 20세기는 영미 대중음악의 지구 제패가 이루어진 시대다. 이건 미국이나 영국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전세계 방방곡곡에 음반이 판매되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각국의 대중음악이 영미 팝의 영향을 받아 왔고, 영향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국민적 대중음악'이 사라지면서 '로컬 팝'만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샹송이 사라지고 프렌치 팝이 되었고, 칸초네가 사라지고 이탈리안 팝이 되었고, 메렝게는 사라지고 라틴 팝이 되었다(리키 마틴 아시죠?). 동양권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아무로 나미에가 부르는 '일본' 대중음악에는 '왜색'이 없다. 엔카가 사라지면서 'J pop'이 된 것이다. 페이 웡(한국 방언 - 오늘 이 말이 자주 나오네 - 으로 왕정문)처럼 홍콩을 본산지로 둔 음악은 중문가(中文歌)라기 보다는 칸토팝(Cantopop: 칸토는 廣東)이다. 따라서 '아, 한국 가요는 외국 음악의 침투에 맞서서 굳건히 지켜왔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바보다. 현대의 한국 대중가요 역시 '팝'이라는 보편적인 어법을 가지고 있다. 가사는 한국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은 국영문(國英文) 혼용체인 요즘 가요 가사를 들어보면 긁적긁적 해야한다. 요즘 만이 아니라 재즈와 포크로 시작하여 록, 소울, 디스코를 거쳐 최근의 힙합과 테크노에 이르는 과정은 유행이 교대되는 역사임과 동시에 팝으로부터의 영향이 한국인의 내면에 깊이 새겨지는 역사였다. 음악 어법이 변했다는 말은 그에 동반하여 감수성 구조도 바뀌었다는 말일 것이다. 국내의 어떤 음악인이 말했듯 이제 한국인은 "국악이 외국 음악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 주위에는 익숙한 이분법이 있다. 바로 '가요 아니면 팝'이라는 구분이다. 음악은 크게 안 다르면서도 '느낌'이 다르다. 영어로 노래불러봤자 그건 팝이 아니라 가요다. 이건 단지 느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말로 '시스템'의 문제다. 영미 음악산업계의 시스템과 한국 음악산업의 시스템이 다르므로 음악 스타일이나 사운드가 비슷해도 우리는 어떤 음악을 듣고 가요인지 팝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 시스템의 차이는 이것뿐만 아니다. (영미) 팝의 시스템은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수행하지만 가요의 시스템은 '로컬' 시장을 대상으로 한다. 말하자면 각국의 대중음악이란 팝이라는 공용어(이자 표준어)의 방언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이야기냐? 한마디로 '한국 대중음악'이란 없다는 말이다. 있다면 팝의 지역적 변종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문화식민지화를 걱정하고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해 일생을 바쳐야 하나? 그럴 수도 있지만 범상한 사람들에게는 버거운 일이다. 좀 더 손쉽고 '의미'도 있는 일이라면 '돌연변이적 잡종'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잡종'이란 말이 좀 거슬리지만 나쁜 뜻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뜻이다. 신중현이나 산울림이나 서태지는 모두 '외국' 대중음악의 정서와 여기 사는 사람의 정서가 잡종교배된 산물이다. 이들이 '보통의' 대중음악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의 음악은 '단순 모방' 이상이었다는 점이다. 컬럼버스의 달걀처럼 별 것 아닌 걸 처음 했기 때문에 '별것'이 된 케이스다. 그런데도 연말이 되면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한국인이 뽑은 위대한 한국가요' 등의 특집 프로그램이 방송된다. 한국인의 고정불변의 취향이 있음을 친절하게 확인시켜 주는 프로그램 말이다. 하긴 그런 게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거지 오래 전부터 주어진 게 아니다. 또하나 만들어진 취향이라면 너무 획일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취향의 국적이 너무 하나같고 확실하다는 얘기다. 하긴 살아온 방식(주입식 교육 이후 취직 그리고...)이 그리 다르지 않은 우리들이 음악 취향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나. 문화적 취향이 다양하지 못함은 직장 남자들이 옷입은 모습이나 직장 여성들이 화장한 얼굴이 엇비슷해 보이는 것과 무관치 않겠지. 이렇게 투덜거리는 이유는 별 게 아니라 딸한테 '핑클 싫다'고 말하기 힘들고, 20대 여자 앞에서 '조성모 싫다'고 말하기 힘들어서 그런 거다. 싫어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닌감. '괜히 잘난 척 한다'는 반응만 듣고 본전도 못 찾겠던데... .그만 투덜대고 오늘의 결론 : 지구화 시대에 표준어를 따라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똑같은 방언을 쓰는 공동체도 만들지 말고 '다양한' 방언을 썼으면 좋겠다.
1999.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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