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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joonProfile Articl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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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과 편법과 피곤
몇 년 전 한 미국인 친구가 집에 온 적이 있다. 나의 '음반 컬렉션'을 본 그는 놀라와했다. '아시안'이 자기 나라의 대중음악 음반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던 일이었나보다. 요즘 같으면 이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밀겠지만. 그런데 그가 정말 놀라는 일은 따로 있었다. 음반을 훑어보던 그가 꺼내본 음반은 비틀스의 LP [Sgt.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였다. 이 앨범에 몇 곡의 금지곡이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중음악 최고의 명반'이라는 칭호를 듣는 이 음반은 커버 사진 때문으로도 유명하다. 비틀스의 멤버들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유명 인물들이 서있는 커버 말이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국내 라이센스 음반은 오리지널 커버가 아니었다. 본래의 커버를 서너배 정도는 확대하여 비틀스 멤버들의 모습만을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검은 색으로 덧칠해 버렸다. 나와 그 친구는 낄낄거리고 웃는 것 외에는 적절한 반응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긴 내가 사실의 진상을 확인한 것도 음반을 구입한 지 몇 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들은 말로는 등장인물 중의 한 명이 칼 마르크스(Karl Marx)였다는 것이 '먹칠'의 이유였다고 한다. 칼 마르크스야 당시 대한민국의 적성국가의 사상적 원조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아무 영문도 모르고 얼굴을 먹칠당한 다른 인물들에게 사과라도 했는지 모르겠다. 초상권 모독 아닌가. 어쨌든 나는 이 음반이 멀쩡한 커버로 발매된 뒤 다시 샀지만 이걸 보관하고 있다. 언젠가 써먹으려고. 개인적인 경험담을 길게 늘어놓은 것은 한국 대중음악에서의 검열이 '분노'를 머금게 한다기 보다는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는 점이다. 실소는 분노보다 더 피곤한 일이다. 게다가 이런 피곤은 검열을 피해가기 위해 만들어지는 편법 때문에 더욱 가중된다. 나의 경험은 그저 한 사람의 소비자로서의 불만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음반산업계 관계자들은 피곤이 좀 더한 모양이다. 2년 전 '캐니벌 콥스 사건'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편법'이 있다. 다름 아닌 '가사 변조'다. 만약 이런 편법(혹은 불법)이 없었다면 요즘 젊은애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너바나(Nirvana)도,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도 국내에 발매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모두 '외국 음반'의 사례들이다. 국내의 경우는? 만만치 않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는 없다. "동백아가씨", "아침이슬", "돌아와요 부산항" 같은 '국민가요'들을 포함하여 225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던 '그 옛날 그 일'은 이제 더 이상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슬프면서도 '웃기는' 일이다. '패배적, 자학적, 퇴폐적'이라든가 '국가안보, 국민총화에 악영향을 주는' 등의 모호하고 막연한 금지곡 선정 기준도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 음악을 가사만 가지고 검열하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시비걸지 말기로 하자. 이런 일을 수행했던 주체인 공륜(공연윤리위원회)은 어쨌든 사라졌으니까. 공륜은 사라졌어도 '영상물등급위원회'라든가 '공연예술진흥협의회'같은 심의단체는 여전히 남아 '등급심의'나 사후심의를 수행하고 있다. 미리 검열하여 금지 여부를 결정하던 것에서 '등급제'로 바뀐 것은 분명 나아졌다고 눈딱감고 말하자. 그렇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이런 평은 음반 '제작'에 대한 심의에 관해서만 그런 거다. 이것 말고 또하나의 심의가 남아 있다. 음반을 '실연(performance)'하는 주요 매체인 방송국에서의 심의, 이른바 방송 심의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방송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대중음악 제작자들에게 방송 심의는 과거의 공륜에 의한 사전심의 못지 않은 칼이나 가위로 다가온다. '전향적'으로 바뀐 등급제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방송의존형 대중음악의 '시스템' 전체를 개혁하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계란으로 바위치기같은 과업을 누가 나서서 하리오. 그래서 피곤함은 여전하다. 최근의 예만 들어봐도 YG 패밀리의 "우리는 YG 패밀리"라는 곡은 '백색가루'라는 말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방송 심의에서 불가 판정을 받았고, 록 밴드 힙포켓의 새 음반도 비슷한 운명에 처했다. 최근 들어 발생한 새로운 검열도 있다. 뮤직 비디오의 대중화에 따라 가사 뿐만 아니라 영상이 검열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YG 패밀리의 뮤직 비디오는 "총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심의 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문제의 장면을 손질하는 등 부랴부랴 재편집을 하고 '사과방송'까지 한 뒤에야 겨우 케이블 TV에서 방영될 수 있었다. 재편집할 때의 피곤함과 스트레스는 상상만 해도 짐작이 간다. 그런데 총격과 폭력 장면은 조성모의 뮤직 비디오도 만만치 않다. 이 뮤직 비디오들은 가히 피칠갑과 줄초상이다. 요즘 유행어로는 '하드고어'려나. 하지만 아무 문제도 없다. 이유가 정말 궁금하다. 피곤함의 절정은 아마도 자기검열일 것이다. 음반기획사의 직원들은 음반을 발표할 때마다 '대책회의'를 하면서 혹시 방송심의에 걸릴 것이 없나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래서 문제가 될 만한 가사를 수정하는데 그때 마땅한 단어가 안 떠오르면 정말 대책없는 모양이다. 공륜에서 가사 고치라는 명령을 그토록 싫어 했서 분투했던 정태춘의 노력이 안타까울 뿐이다. 또하나 새로운 현상이 생겼다. 음반이 나오기 전 가사지를 들고 방송국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의견을 묻는 일이다. 공적 심의에서 사적 심의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가. 이건 웃기는 일을 넘어서 웃기지도 않는 일이 되어버린다. 검열도 좋고 심의도 좋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진지함도 없고 그렇다고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욕하는' 일도 스트레스를 더할 뿐이다. 솔직히 나는 개인적으로 피곤한 일을 당한 적은 없다. 작년 11월 한 외국 밴드를 초청할 일이 있어서 영상물 등급위원회에 자문을 구했다. '한국계' 미국인이 세 명이나 있는 밴드인데도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외국인'이고 따라서 심의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그래서 후배 한 명에게 가사를 들고 찾아가 보라고 시킨 일이 있다. 그런데 아무 문제 없었다. 오히려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는 듯한 분위기였고 사람이 찾아오니 반가와하기까지 한다고 했다. 아하 그랬구나. 간단한 문제였네. 공륜시절부터 심의는 그분들의 밥줄의 문제였구나. '성과'가 없으면 '자리'가 사라질 지도 모르니 가끔씩 '시범 케이스'를 만들어내야 했던 모양이구나. "일관된 기준이 뭔가요"라고 물으면 아마도 답변은 "촌스럽긴"일 것이다. 아, 피로가 몰려온다.
1999.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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