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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여성용?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알 수가 있나. 한 가지 어림짐작하는 것이 있다면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가운데 하나는 'TV 드라마를 보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건 일종의 마약같은 거다. 막상 경험하면 별 것도 아닌데 안 보면 뭔가 허전하다. 혹시라도 다른 일이 생겨 한 회의 방영분이라도 놓치면 재방송이라도 봐야 된다. 요즘엔 동네마다 유선방송 하나 이상 보지 않는 집이 드물고, 그러면 그 중에 재방송 전문 채널이 하나 이상 있으니 모든 드라마를 독파하는 일은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어렵지 않다. 중독이 더 심하면 같은 시간대에 방영하는 다른 방송사의 드라마를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해 두었다가 나중에 보는 사람도 있다. 아침 드라마의 경우는 지상파 방송 3사간의 암묵적 협정이 있었는지 3개의 드라마가 같은 시간대에 방영되는 경우가 없다. 이 모두 '드라마에 중독된 여자들'을 위한 배려다. '여자'라는 단어는 주로 '아줌마'(비하할 의도 전혀 없습니다!)를 지칭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문화적으로 세련되고 첨단적인 '언니들'도 드라마를 즐겨 보고 남자라고 해서 거기서 예외는 아니다. 한국 의 중산층 가정에서 TV는 거실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안방이나 다른 방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요즘은 웬만해서는 TV 수상기를 두 대 이상 보유하고 있으니 거실에 한 개 있는 것은 일반적이다. 거실에는 소파가 있게 마련이니 휴식을 취하려고 하면 TV를 보지 않기는 담배끊기보다 힘들다. 11시 이전의 어떤 시간대이든 지상파 방송 3사 중에 하나도 드라마를 방영하지 않는 시간대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거실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것은 '드라마를 본다'는 것과 동의어다. 물론 남자들은 그런 이야기가 '시시하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일단 보게 되면 우두커니 보게 되는 것이 TV의 마력이다. 보고 나서 투덜거려봤자 사라져간 시간을 되찾을 수는 없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언론에서 드라마에 대해 비판하는 일이 간혹 있지만, 대세에는 지장 없다. '맨날 똑같다', '신파다', '질질 끈다'는 식의 비판은 여성의 감성이라는 '권력' 앞에서는 무력하기 만하다. 간단히 말해서 남자에게는 드문 경우를 제외하곤 '채널 선택권'이 없다. 그런데 예외가 생겼다. <왕건> 이야기가 아니다. KBS 2 채널에서 방영한 주말 연속극 <푸른 안개>다. 이 드라마는 예외적인 가정에서만 시청할 수 있다. 예외적인 가정이란 다름 아니라 남자에게 채널 선택권이 있는 집이다. 한 일간지의 칼럼은 "요즘 중년 유부남의 불륜을 다룬 KBS 2TV 주말 드라마 <푸른 안개>가 중년 남성들을 브라운관 앞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조선일보>, 2001. 5. 17)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앞에서 말한 '드라마는 여성용'이라는 주장과는 모순되는 셈이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고 '통속적'이다. '여자들'이 저 드라마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때 여자들에는 '아줌마'나 '아가씨' 모두 포함된다. 시청률조사기관인 TNS 미디어코리아에 따르면, "<푸른 안개>의 주 시청자층은 여자 50살 이상―남자 50살 이상―여자 30대-여자 40대 순이다. 특히 50살 이상 남녀의 점유율이 시청률의 2~3배에 이르는 반면, 20대 여성의 점유율은 시청률의 절반에도 못미친다"(<한겨레, 2001. 4. 20>)고 한다. 물론 싫어하는 이유는 다르다. 아줌마들이 히스테리에 가까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반면, 아가씨들은 무관심에 가까운 썰렁한 반응을 보인다. 한편 위 조사에 의하면 남녀 공히 50대 이상의 시청률은 매우 높다. 아마도 이들은 이 드라마를 '부담없이' 지켜보는 듯하다. 어이없게도 나는 이 드라마를 처음부터 죽 지켜본 사람은 아니다. 나 역시 TV에 관한 한 가정에서의 권력이 그다지 큰 편은 아니라는 이유도 전혀 작용하지 않았으리라고 말하기 힘들다(이렇게 말하면 이걸 읽은 마누라한테 잔소리 깨나 듣겠지만). 하지만 이 글은 작품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코드에 대한 이야기다. '진지하게' 논한다면, <푸른 안개>에는 몇 개의 문화적 코드가 자리잡고 있다. 쉬운 말을 괜히 어렵게 하려고 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하나는 섹슈얼리티고 하나는 세대다. 섹슈얼리티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한국 사회의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남자와 여자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유지된다. '40대 남자'와 그의 부인인 '40대 여자', 그리고 40대 남자가 사랑에 빠진 '20대 여자'는 표현만으로도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앞에서 사용한 용어를 빌면 아저씨, 아줌마, 아가씨고, 다른 기준을 적용하면 유부남, 유부녀, 처녀다. 이 드라마를 소개하면서 '유부남의 불륜을 다룬 드라마'라고 소개하는 평은 드라마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단칼에' 규정해 버린다. 더 이상의 설명은 '토를 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더 심한 표현도 있다. 이른바 '원조교제'라는 표현이다. 이런 입장을 취한다면 작품이 소재를 어떻게 다루는가는 문제가 안 된다. 무엇을 다루는가에서 논의는 끝날 뿐만 아니라 그 '무엇'이 사실은 여러 가지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하나'에 집중된다. 이는 소재의 다양성을 희생할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를 도덕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가, 잘못된 일인가가 논의의 초점이다. 이에 대한 '대안적' 시각은 사랑을 절대화하는 시각이다. 도덕과 사랑은 원래부터 어울리지 않았다라든가 사랑하는 사이라면 결합되어야 한다는 다분히 낭만적 시각이 그것이다. 앞의 시각과는 대조적으로 이런 시각에서는 도덕적으로 옳은가 아닌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랑없이 결혼한' 구 세대의 관습이 비판대에 오르고, '조건을 따져 결혼하는' 신세대의 관습도 예외는 아니다. 드라마에서 두 주인공의 관계는 한편에서는 패륜의 상징이지만, 다른 편에서는 순수의 초상이다. 실제로 이 드라마의 공식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은 이런 상반된 시각의 대립이었다(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의 논조는 매우 '격렬'했다). "가정을 파괴하는 독버섯, 불륜을 정당화하는 드라마"라는 글이 한쪽의 견해를 대변한다면, "<푸른 안개>를 보고 있노라면 자꾸 그 사람 생각이 나 눈물이 납니다"라는 글은 다른 한쪽의 견해를 대변한다. 유심히 두 글을 읽어보면 두 개의 시각의 대립은 남녀 대립이 아니라 여여(女女) 대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대립에는 어떤 코드가 개재하는 것일까. 다름 아니라 이미말해버린 세대의 문제다. 세대 4월 22일 방영분에서 두 여주인공이 처음 대면한다. 카메라는 누가 보아도 의도를 알 수 있도록 양자를 대비한다. 의상의 경우 멋진 정장 대 찢어진 청바지, 립스틱의 경우 짙은 자주색 대 화사한 분홍색, 목걸이의 경우 세련된 디자인 대 간결한 디자인이 대비된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쨉이 안되는' 것이지만, 좌절하는 쪽은 아줌마다. 좌절하는 이유는 '젊음'에 기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두 여주인공 가운데 한쪽은 '아줌마' 혹은 '유부녀'고, 다른 한쪽은 '아가씨'이고 '처녀'라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아줌마'나 '처녀'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어서 미안하다. 이건 여자의 두 유형이 아니라 여자인가, 아닌가의 문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아줌마와 유부녀는 무성적(無性的)인 반면, 아가씨와 처녀는 성적 매력으로 충만하다. 정말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담론이 너무나도 막강하고 그건 단지 말이 아니라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 '예쁜이 환장병'이라고 표현한 현재 한국 사회의 정신병적 분위기에서는 그렇다. 인생의 정오를 지나버린 여자를위해 예비해둠직한 단어들인 '아름답다'든가 '곱다'라는 표현도 이제는 사어(死語)가 되어가는 것 같다. 모두들 젊어지기 위해 환장한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가를 따지는 것이 필요할까. 그렇지만 '청년'이라든가 '젊음'이라는 것이 중요한 문화적 코드로 등장한 것은 기껏해야 1950년대 이후, 더 넓게 잡아도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청년이라든가, 젊은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성인이 되기 위한 과도기'로서만 존재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청년이란 아직 섹슈얼리티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지칭했다. 이렇게 말하니 너무고루한 인간처럼 보일 것 같다. 맞다. 이건 이조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따지고 보니 '정통 사극'이라고 부르는 드라마에서는 궁중 세계에서 여인들간의 음모를 다룬 극을 말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섹스를 통한 권력의 작용'이라는 코드가 개재해 있는 듯하다). 그런데 젊음에 대한 상찬 역시 시대착오적이다. 엉뚱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1980년대 미국에서는 '청년은 죽었다'는 말이 유행했다. 젊은애들이 죽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요즘 젊은애들은 세속적이고, 영악하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나홀로 집에>나 <태양의 제국>같은 영화가 이런 '애늙은이'들을 상징한다). 미국의 경우 1990년대 들어 사태가 뒤바뀌기는 했지만 한국은 여전한 듯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1980년대는 정치적 이유로 애늙은이가 되어야 했다면, 1990년대 이후에는 경제적 이유로 그렇다. 핸드폰, 화장품, 액세서리, 스티커, 영화감상, CD 플레이어. 등을 갖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외국의 한 학자가 '뷰티 캐피털리즘(beauty capitalism)'이라고 표현한 경제적 논리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음에 대한 상찬이 계속된다면 그 이유는 '성인의 시각'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3-40대들은 '정말 좋았던 젊은 날'을 보낸(혹은 그랬다는 환상을 가지고 사는) 세대에 속한다. 그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이 현재 '여론선도층'으로 있기 때문에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별 말이 아니라 지금 젊은 세대들은 '젊은 게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갈수록 꽉 짜여져 가는 사회구조 속에서 삶의 불안정성에 시달리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물론 여기에서도 예외는 있다. '돈만 많으면' 그럴 필요 없으니까. 계급 그리고 한국인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40대 여자의 모습이 그렇게 초라한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드라마의 주요 고객인 중년 여성들이 이 드라마를 외면하는 이유는? 주요하게는 '젊은 여자한테 마음을 빼앗긴 중년 남자'가 괘씸해서겠지만 그것 말고도 40대의 여주인공이 '잘 먹고 잘 사는' 계급에 속하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할 말 다하면서 '집에 돌아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이혼한 뒤에도 확실한 대안이 있는 것도 '보통 아줌마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여자 연예인의 이혼에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유와 비슷하다. 그러고 보면 결혼 못지 않게 이혼에도 계급차별은 깊게 개재하고 있다. 삐딱하게 본다면 20대 여주인공이 중년 남자와 '순수한 사랑'에 빠진 것도 현 세태에서는 예외적이라서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극중에 나오는 또한명의 아줌마가 "요즘 계집애들 얼마나 약아빠졌는데...."라는 주장에 동조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드라마의 구성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전문가적' 지적이 아니라 '낭만적 사랑'과 '과잉감정'에 너무도 약한 한국 대중문화의 관습에 대한 지적일 뿐이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셈인데 한국인에게 마약은 드라마라는 형식 자체라기보다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테마인 것 같다. 그 테마는 '인간이면 누구나'라고 얼버무릴 성질의 것이라기보다는 한국에 특유한 양식이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저것마저 없다면 이렇게 힘들게 일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정신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물질적·정신적 비용이 너무 큰 현실을 간혹 보게 된다. 개인적 한탄을 추가하자면 한국 사회는 '어떻게 나이들어가는가'에 대해서 가르침을 보여주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주관적 바램을 피력한다면 지배적 도덕과 규율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윤리'를 제시해주는 사람의 가르침을 얻고 싶다. '그런 걸 가르침을 받아야 하느냐', '개인이 해결할 문제다'라고 우기면 더더욱 할 말이 없지만. 윤리란 세상에 대한 관계가 아니라 자기에 대한 관계다. P.S.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까먹을 뻔했다. 극중에서 두 사람의 '불륜' 행위에 어느 정도의 윤리를 회복시켜주는 중개자는 40대 남자의 딸로 등장하는 여자아이다. 그 아이야말로 순진무구함의 상징이고, 20대 여주인공이 반성하는 계기 역시 '내가 어렸을 때 저랬다'라는 설정이다. 그렇지만 이 점은 상투적이자 비현실적이고, 소설가 김영하가 영화 <눈물>을 평하면서 말한 '10대 오리엔털리즘'같은 것이다. * 월간 <문화예술>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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