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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의 트렌드: 복고 2001년 대중음악계(이른바 '가요계')에
트렌드가 있다면 '복고'일 것이다. 물론 H.O.T의 해체가 훨씬 중요한
가요 팬들도 있겠지만 '자살특공대' 어쩌구 하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아직 별다른 일이 없으니 이제 '약발'이 다한 모양이다. 어쩌면 10년
동안 대중음악계를 주름잡았던 댄스가요가 퇴조하리라는 징후일지 모른다.
이 말이 TV 스크린에 수많은 댄스그룹들이 명멸하는 현상이 소멸하리라는
섣부른 예측은 아니다. 이 현상은 별다른 대안이 발견될 때까지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문제는 댄스그룹들을 통한 아이돌 스타 시스템이 이젠
'큰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고란 본래 특별히 새로운 트렌드가
없을 때 등장하는 게 시장의 법칙이다. 뭔가 혁신적인 것이 휘몰아친
뒤 사람들이 '너무 정신없다', '안정을 찾고 싶다'고 느낄 때 슬그머니
찾아와서 위로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다 보면 의외의 '대박'이 나오기도
한다. 199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제일 많이 팔린 음반은 후티 앤 더
블로우피시(Hootie & the Blowfish)의 Cracked Rear View였다. 이름도
긴 이 밴드를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음악 스타일은
'밴드가 연주하는 록 음악'인 것은 맞는데 컨트리, 블루스, 서던 록
등 '미국식 뽕짝(?)'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아무래도 한국의 록 팬들에게조차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따지고 보면 1980년대 중반의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의 이른바 '블루 아이드 소울(blue-eyes soul)'도 비슷했다(이건
한국에서 좀 인기가 있었지만). 팝 음악 깨나 들었다는 사람은 알겠지만
마이클 볼튼과 후티 앤 더 블로우피시 사이에는 1990년대 초 너바나(Nirvana)를
위시한 일군의 젊은 밴드들이 이끌었던 '얼터너티브 록'의 폭풍이 있었다.
한국의 대중음악을 미국의 대중음악과 비교하려는 것은 여러 모로 무리지만 적어도 유행의 싸이클은 비슷한 면이 있다. 음악 장르는 달랐지만 한국에서도 1990년대 초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끌었던 폭풍이 한차례 지나갔다. 서태지를 음악적 혁신자로 보는가, 상업적 기획자로 보는가는 각자의 자유겠지만 그로 인해 대중음악계의 '판'이 바뀐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거의 10년이 지나가고 있고 이제 사람들은 차분히 과거를 돌아보고 싶은 듯하다. 작년 가을 컴백한 서태지의 새로운 음악이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그의 음악 자체라기보다는 문화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편집 그리고 리메이크 올 상반기 최대의 히트상품은 [이미연의
연가]였다. 음반업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산업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히트상품일 것이다. 제목을 이미연이 '가수'로 노래부르는 것으로 오해한
사람도 많았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을 정도로 이 음반은 시장을 제패했다.
"500만장이 팔렸다"는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겠지만
많이 팔린 건 확실하다. 모두 네 장의 CD에 70곡 가량(정확히 세어보니
68곡이다)을 수록했고, 가격이 2만원을 넘지 않았으니 소비자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음반을 '편집 음반'이라고 부른다.
'기성 곡을 원곡 그대로 모은 음반'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다른 종류의
편집이 들어간 음반도 있다. 특정 가수를 기리는 '헌정 음반', 기성곡을
다시 녹음하여 앨범으로 만든 '리메이크 음반'도 넓은 의미에서 편집음반이다.
리메이크 음반은 한 가수(혹은 그룹)이 여러 기성곡을 새로 레코딩한
경우와 여러 가수(혹은 그룹)이 여러 곡을 레코딩한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올 봄에 나온 음반 중에서 핑클의 [메모리스 & 멜로디스]가
앞의 경우에 속한다면, 조성모, 유승준 등의 '현역' 가수들이 선배 가수들(예비역?)의
노래를 다시 녹음하여 [리메이크 op.01]라는 음반을 발매했다. 이런 음반들은 대체로 시장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지만 "창작력이 고갈된 것 아니냐"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실제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곡'보다 '기성곡'이 인기가
많다는 점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을 남긴다. 게다가 편집 음반의
유행은 이제 '독집 앨범'을 듣는 일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한 가수의
목소리와 일관된 음색의 사운드는 한때는 미덕이었지만 이제는 소수의
매니아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음악을 '앨범 단위로' 듣지 않는다. 버튼만
누르거나(CD 플레이어의 경우), 마우스만 클릭하면(mp3 의 경우) 다른
곡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서 열곡 정도를 들어내는 소비자는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는 그동안 유행했던 장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른바 '댄스 음악'이란 늘 새롭지 않으면 지속적 관심을 끌기 힘들다. '새로운' 것이 늘 창조적일 필요는 없었는데, 이유는 '수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래 한국 대중음악은 외국으로부터 수입된 트렌드의 쇼케이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요한 것만 들어 보아도 랩(듀스), 레게(룰라), 하우스(노이즈), 레이브(R.ef), 마이애미(박진영), 정글(박미경), 테크노(이정현), 인도음악(샤크라), 라틴(백지영) 등이 한때를 휩쓸고 지나갔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수입할 게 없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하나의 가능성은 기성곡이 아닌 신곡을 잘 편집해서 '복고'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최근 나온 음반들 중에서는 토이(유희열)의 음반이 눈길을 끈다. 토이의 프로젝트 토이는 '그룹'이나 '밴드'가 아니라
유희열의 프로젝트다. 그가 주인공이 된 음반에서 '가수'는 다른 사람(이른바
'객원 가수')가 맡는 게 일반적이다. 이번에 발표한 5집 앨범 [Fermata]도
마찬가지다. 객원 가수의 수는 자그마치 13명이나 된다. 면면을 나열해
본다면 롤러코스터, 성시경, 윤상, 이승환, 이적, 조 트리오, 김연우
등 다들 내로라하는 음악인들이다. 여기에 김광민과 함춘호 같은 거물급
연주인들도 참여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요즘같이 싫증을 잘 내는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힘들다. 그래서 이 앨범은 다채로움으로 승부한다. 이는 일단 객원 보컬들의 개성에서 충족되는 것이지만 음악 스타일과 편곡도 그에 못지 않다. "내가 남자 친구라면"은 프로그래밍된 드럼 루프와 전기 기타가 나오고, "언젠가 다시 만나면"은 "여전히 아름다운지"의 후속편같고, "안녕, 이젠 안녕"은 현악기와 피아노가 등장하는 류이치 사카모토풍의 곡이고, "Complex"는 유희열답지 않게 펑키한 리듬이 넘치는 곡이다. 남미의 서정을 담으려는 윤상의 노래와 김광민의 재즈 피아노가 만나는 "그 끝엔 너", 팻 메쓰니풍의 퓨전 재즈 연주곡 "첫 사랑",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가 만나 클래식한 느낌을 주는 "소박했던, 행복했던", 데이비드 포스터풍의 편곡에 이적이 노래하는 "모두 어디로 간 걸까", 피리(리코더)와 기타가 어우러지는 "잊진 않았겠죠"도 만만치 않은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물론 마지막은 이전 앨범들과 유사하게 유희열이 피아노와 보컬을 맡아 차분하게 장식한다. 토이의 음반은 현재 시장에서 최고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게스트 보컬을 초대한 것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니만큼 그가 특별히 '시류에 편승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1970-80년대에 음악을 들은 사람이라면 그의 음악이 낯설지 않다. 앞서 설명할 때 '아무개풍'이라고 외국의 음악인을 예로 든 것은 해당 음악이 '과거'를 떠올리게 해준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적과 이승환(예명 이철민)의 노래마저도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그들의 혈기왕성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단지 '복고적'일 뿐만 아니라 첨단적 사운드까지 담고 있다. 몇 개의 '대박'이 나온 뒤 졸속 편집음반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이 음반이 '편집음반같이' 꾸며진 것도 이 음반에 또하나의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을이나 초겨울에 발표했던 음반을 더위를 앞두고 발표한 것에서도 어떤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음악을 잘하는 사람은 기획에도 밝은 것 같다. * 월간 <질러>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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