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01f.gif Essays:


 들뢰즈.가타리와 팝 음악 : 불가능한 접속?

 

1. 서 : 리토르넬로로의 인도

{천의 고원들 : 자본주의와 분열증 II}1)의 열한번째 '고원'의 제목은 "리토르넬로에 관하여(De la Ritournelle)에 관하여"다. 여기서 저자들은 음악이라는 테마를 다룬다. 물론 다른 고원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내용을 '음악학'이나 '미학'이라는 분과학문으로 국한시킬 수는 없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음악학(및 음악사)을 동물행동학과 접속시키는 것이다. 즉, 이들이 다루는 음악은 단지 '인간의 음악'에 국한되지 않는다.

필자의 야심은 저자들이 멈추어선 지점, 즉 '현대'의 음악에 대한 고찰이다. 물론 이런 야심을 실현시키는 작업은 이 글 하나로는 어림도 없다. 객관적으로 보아 나는 동물학과 음악학을 접속시킬 적임자가 아니다. 그 어느 한쪽에도 정통하지 못한 필자에게, 양쪽을 접속시키는 작업은 어렴풋한 윤곽을 그리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다. 그런 작업은 하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더 강하다. 아무튼 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리토르넬로에 관하여"의 약도를 그리는 작업으로 글의 절반을 채울까 한다(이런 작업은 텍스트를 읽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다. 실제 그 장소를 찾아가게 본 사람에게는 약도가 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글은 두 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다. 일단 바로 다음 절에서 나는 비판적 거리를 거두고 텍스트를 요약하고 해설을 덧붙이고자 한다. 이런 일은 불필요하게 될 확률이 크다. 또 단지 불필요한 것 이상일 지도 모른다. 뼈대만 앙상하게 추리는 일은 '증식'보다는 '환원'을 낳을 공산이 크다. 이런 '환원'만큼 저자들이 싫어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심각한 부작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텍스트를 읽는 고통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욕망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상호침투하여 분열증식하는 고통과 쾌락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은 텍스트를 직접 읽은 다음 절을 생략하고,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쾌락을 희생하고 싶은 사람은 다음 절을 읽기 바란다. 욕망은 불필요함을 포함한 모든 것을 욕망하므로...

 

2. "1837 : 리토르넬로에 관하여"의 약도

리토르넬로란 생산적인(≠재생산적인) 반복구다

리토르넬로란 본래 음악학의 용어로서 '반복구'를 뜻한다. {천의 고원}의 영역자인 브라이언 마수미 Brian Massumi는 리토르넬로의 번역어로 '리프레인 refrain'이라는 영어 단어를 선택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 번역어의 선정부터 긴장을 맞이해야 했다. 동양권에서 리프레인은 곧잘 '후렴'이라는 한자어로 번역된다. 그리고 대중음악에서는 리프레인은 버스(verse)와 더불어 하나의 곡을 구성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2)

그렇지만 서양 고전음악에서 리토르넬로는 단지 반복구의 기능을 갖는 주제(theme)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특정하게 짜여진 음악의 형식을 전제한다. 대표적인 예는 바로크 시대의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이다. 이 형식의 특징은 투티(tutti : 총주)와 솔로(solo : 독주) 부분이 번갈아 교대된다는 점이다. 필자와 함께 서양음악에 대한 무지를 공유하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널리 알려진 음악사 교재를 인용하여 설명하자. 투티가 네 번 등장하는 경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a. 투티(f), 리토르넬로(으뜸조)
b. 솔로

2. a. 투티(f), 리토르넬로의 단편
b. 솔로

3. a. 투티(f), 리토르넬로의 단편
b. 솔로

4. 투티(f), 리토르넬로(으뜸조) 3)

이때 처음 및 마지막 악장을 리토르넬로 형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두 번째 및 세 번째 악장의 투티는 리토르넬로를 변형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리토르넬로의 주제는 악장 전체에 걸쳐 다른 조(調)를 취할 수 있고, 또 동일한 형태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며, 악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만 최초의 조성으로 나타난다. 즉, 리토르넬로는 반복되지만 차이를 동반한다. 따라서 리토르넬로는 론도 Rondo, 소나타 Sonata 처럼 특정한 음악 형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확대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리토르넬로는 영토적 배치고, 탈영토화-재영토화하면서 운동한다

그런데 들뢰즈.가타리가 사용하는 리토르넬로는 더욱 확장된 넓은 내포를 가진다. 두 번째 긴장. 저자들은 리토르넬로는 단지 '음악'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으며, 운동, 동작, 시선, 색채 등에도 존재한다고 쓰고 있다. 단순 명쾌한 설명을 원하는 독자는 "시간화(temporalization)의 기초를 이루는 리듬"이라는 다른 책에서 가타리가 내린 정의를 참고할 수도 있다.4) 그렇지만 가타리가 혼자 내린 정의는 명쾌하지만 미분화되어 있고, 따라서 분석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텍스트의 앞 부분에는 "리토르넬로는 영토적이며, 그것은 영토적 배치다"(MP, p.383)라는 서술이 있다. 영토적 배치!? 이 문장이 쓰여 있는 바로 앞 부분, 그러니까 글의 서두를 훑어 보면서 시작하자.

그들은 우선 세 가지 상황을 거례한다 : 1)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노래를 부르면서 안정을 찾으려고 하는 모습, 2) 사람들이 자기 집에 있으면서 제한된 공간을 조직하는 모습. 이는 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을 그리는 행위로 비유된다, 3) 사람들과 자기 집을 벗어나 원을 가르고 개방하여 돌진하는 모습.

저자들은 이를 "리토르넬로가 가지는 세 가지 측면"(MP, p.383)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아직 몽롱하다. 그뒤 이들은 논의를 계속 전개하여카오스(chaos)에서 환경(millieux)으로, 그런 다음 환경에서 영토(territory)로 나아간다. 들뢰즈.가타리의 '기본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 책의 다른 글이나 영역본의 번역 노트를 읽어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단, 리듬이 "카오스에 대한 환경의 반응"(MP, p. 313)이라는 주장은 용어 해설만 읽더라도 충분히 해독되기 힘드니 차분히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 뒤 저자들은 여러 가지 예들, 특히 동물의 행동의 예를 들면서 리토르넬로에 대해 설명한다. 이 부분은 인내심을 가지고 숙독하거나 아니면 무념무상하게 느끼는 두 가지 독해법이 있다. 그리고 나서 리토르넬로는 재정의된다. 그것은 "리듬의 표현 질료(mati re)의 집합"(MP, p..397)이다. 또 리토르넬로의 운동은 "하나의 영토를 통해, 그리고 영토적 모티브와 영토적 대위법을 통해 전개된다"((MP, p.397)는 말로 설명된다. 마지막으로 리토르넬로란 "배치가 음향적일 때, 혹은 소리에 의해 지배될 때"(MP, p.397)를 지칭한다는 '협의의' 정의가 있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리토르넬로, 그것은 표현적이 됨에 따라 영토화되고, 영토화하면서 표현적이 된 리듬이요 선율이다"(MP, p.389) 라는 앞의 표현도 어느 정도 이해의 사정권 안에 들어올 수 있있다.

그런데 들뢰즈.가타리의 글을 읽은 독자는 느끼겠지만, 영토는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며, 부단히 다른 배치로 이동한다. 이를 "영토를 가득 채운 탈영토화 운동"(MP, p.401)5)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리토르넬로의 상이한 측면을 분류할 수 있다. 1) 하나의 영토를 추구하고 표시하는 리토르넬로, 2) 배치 안에서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영토적 기능의 리토르넬로, 3) 탈영토화-재영토화에 의해 새로운 배치로 이행하는 리토르넬로, 4) 힘을 결집 혹은 재결집하여 종종 절대적 탈영토화 운동을 유발하는 대결 내지 출발의 리토르넬로.(MP, p.401) 6)

이 네 가지 분류와 글 서두의 세 가지 측면을 비교하면 '리토르넬로가 도대체 무엇이지'라는 질문에 대한 어렴풋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셋이라는 숫자와 넷이라는 숫자는 정확하게 1 : 1로 대응하지 않는다. 일관된 이해를 위해서는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리토르넬로의 탈영토화

이제 텍스트의 말미로 가자. 저자들은 다시 한 번 리토르넬로를 분류한다.

- 첫번째는 "최소한 두 부분을 가지며,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응답하는 환경의 리토르넬로"이다. - 두번째는 "매번 대지와 영토의 틈을 표시하는 가변적 관계 그 자체에 따라 부분이 하나의 전체와 관련되는, 즉 대지의 거대한 리토르넬로와 관련되는 출생지 내지 영토의 리토르넬로(자장가, 술꾼의 노래, 사냥의 노래, 노동의 노래, 군가...등)",
- 세번째로 "그 자체가 성정 affect과 국민에 동시에 행사되는 리토르넬로, 집단을 개별화하는 가변적 관계에 따라 거대한 민중의 노래와 연관되는 민중적 내지 민속적 리토르넬로(폴로네이즈, 오베르냐, 알레망드, 마자르 내지 루마니아, 나아가 비창, 공포, 복수의 리토르넬로)"
- 마지막으로 "우주적 힘, 우주적 리토르넬로와 관련된 분자적 리토르넬로(바다, 바람)"(이상, MP, pp.428-429)

이 분류는 앞의 분류와 정확히 상응한다. 단지, 이제 그들은 인간의 음악에 보다 근접해 있다. 논의를 총괄하기 전단계로 저자들은 서양음악의 역사를 고전주의, 낭만주의(및 그 변종으로서 민족음악), '모던'의 시기7)으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서비스를 베풀고 있다. 이 또한 대략 위의 분류와 상응한다. 간략히 소개한다면, 고전주의 음악가들은 카오스와 대면하여 신처럼 그것을 조직하여 창조하고, 낭만주의 음악은 대지를 영토화하여 영웅처럼 그 힘을 더욱 심화시키고, 민족음악은 민중의 노래를 발견한다. 음악사에 대한 이들의 설명은 '간략한 소개'로 그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면의 제약보다도 지식의 제약이 더 크다. 순서대로 바하와 베토벤, 바그너와 베르디, 무소르그스키와 차이코프스키를 들으면서 상상력을 발휘해 볼 뿐이다. 다음과 같은 표가 약간의 가이드 구실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전주의
음악

낭만주의
음악

민족 음악
(?)

'모던' 음악

카오스/환경

대지/영토

민중

우주

지층화
(변코드화)

영토화
(탈코드화)

탈영토화
-재영토화

절대적
탈영토화

 

그렇다면 저자들이 '모던'이라고 부르는 시기에는 어떤 음악이 해당되는가? 달리 말해 "배치를 벗어나 대문자 기계(Machine)의 시대로, 거대한 기계권으로, 포착해야 할 힘들의 우주화의 평면으로 접어들고 있"(MP, p.423)는 시대의 리토르넬로는 무엇인가? 아니 그 시대에 리토르넬로는 어떻게 운동하는가? 그들은 초기 음렬주의의 선구자인 에드가 바레즈(E.Var se)(다른 글에서는 피에르 불레즈(P.Boulez))를 거명한다. 바레즈는 이른바 '소리의 해방', 즉 '(소음을 포함한) 어떠한 소리로도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전자시(Po me lectronique}(1958)를 비롯한 작품을 통해 비음악적 사운드를 음악적 영역에 포함시킨 혁신자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저자들의 '결론'이 나온다. 바레즈 등의 음악을 통해 저자들은 '리토르넬로의 탈영토화'를 제안한다. 탈영토화하고 분자적으로 운동하여 우주로 개방되는 리토르넬로.

물론 여기서 주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리토르넬로의 탈영토화가 소음의 카오스 속으로 함몰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분열분석이 분열자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듯이, 욕망의 정치학이 욕망을 무한 발산하는 것이 아니듯이, 언어의 정치가 방언을 사용하자는 제안이 아니듯이.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차이를 찬양하여 카오스 속으로 함몰되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을 일관성(consistence)의 구도 위에 '기계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주로의 개방을 위해서는 거의 어린애 것과 같은 매우 소박하고 단순한 수단이 필요하다"(MP, p.424)고 말한다. 그 이유는 "기계의 효과가 갖는 풍부함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배치의 간결성"(MP, p.425)이기 때문이다. 그들 식으로 표현하면 어린이-되기(becoming-child) 혹은 유추하자면 소음되기(becoming-noise)이지, 어린이(혹은 소음)로 재영토화되는 것이 아니다. 8)

팝 음악의 리토르넬로

그런데 독자들 중에는 아직 불만스러운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논의에 등장하는 '대지'나 '우주'같은 거창한 단어가 하루하루의 지겨운 일상을 버텨나가는 비루한 우리들의 삶에 얼마나 생기를 불러 일으킬지는 확신하기 힘들다. 그들이 '도래할 민중(peuple venir)'에 대해 언급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현재의 민중(peuple tre)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사유는 아메리카의 '포스트히피(post-hippie)' 사상가들의 뜬구름잡는 얘기9)와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는다.

필자 역시도 어느 정도의 불만은 공유하는 사람에 속한다. 나 역시도 그들이 '6-70년대 프랑스 지식인'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음악의 영역에서도 '고급'예술, '순수' 음악을 옹호하는 것으로 머무는 것 같다는 혐의를 가지고 있다. 이미 영향력을 상실한 예술형태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도래할 민중이 가까이서 듣고 있는 소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혐의.

그렇지만 그렇게만 단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들은 바르톡에 대한 지젤 브를레(Gis l Brelet)의 연구를 원용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우회적으로 내비친다. 브를레에 의하면 대중음악에서는 선율이 "전체 작품이고, 한 번으로 완결되며, 반복의 원천이 없다"는 점, 따라서 대중음악의 선율은 주제로 변환될 수 없다. 따라서 민중음악 그자체가 아니라 민중음악의 선율을 주제로 변환시킨 점이 바르톡의 업적이라는 것이다(MP, p.350).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우주적 리토르넬로를 생산하기 위해...영토적 리토르넬로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MP, p.431)라고 평가한다. 미니멀리즘. 그렇지만 아직 불만은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민중음악(과 영토적 리토르넬로)을 예술음악(과 우주적 리토르넬로)으로 이행하는 것이 꼭 필요한가라는 의문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한 소산이다. 그렇지만 대중음악이 하나의 선율로 종결되는 것은 서양의 민중음악, 정확히 말하면 유럽 음악의 고유한 특징이다. 다른 지역의 민중음악은 '미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영국의 팝 아카데미션 앤드류 체스터(A.Chester)에 의하면 서양의 예술음악은 외연적으로(extensionally) 복합적인 반면, 팝 음악은 흑인음악(정확히 말하면 아프로-아메리칸 음악)의 영향으로 인해 내향적으로(intentionally) 복합적이라고 한다.11) 물론 순수음악과 팝 음악을 칼로 무자르듯 이분하는 그의 주장에는 의심할 여지가 남아 있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언급은 경청할 만하다. "내향적 모델에서는 '기본적인 음악적 단위들(연주되고 노래되는 음표들)이 단순한 요소들로부터 복합적 요소들로서 시간과 공간을 통해 결합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실체는 선율, 화성, 비트의 파라미터에 의해 구성되는 반면, 복합체는 기본 음표들의 모듈레이션 및 기본 비트의 굴절에 의해 구성된다" 12)

그의 주장이 얼마나 정당한지에 대한 판단을 차치하더라도, 팝 음악이 선율 라인의 확장보다는 리듬의 상호작용(rhythmic interplay)에 비중을 둔다는 점은 음악을 들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순수음악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서도 민중음악에서도 우주적 리토르넬로를 생산할 가능성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대중음악이 그 자체로 우주를 향한 개방의 내재적 구도가 되어 버린 상황이 도래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몇 가지 '불만'에도 불구하고 들뢰즈.가타리를 아도르노의 재림이라고, 즉 '천박한 민중음악에 반대하는 순수 음악 옹호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팝 음악13)의 음의 분자들이 도처에서 새로운 유형의 민중, 즉 라디오의 질서나 컴퓨터의 통제, 원자폭탄의 위협에 특이하게 무관심한 민중을 이식(implant)하고 있는지도 모른다"(MP, p.427)는 그들의 예견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의미심장하다.

하나 더. 그들은 현대가 '배치를 벗어난 대문자 기계'의 시대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이 기계가 하나의 배치를 가져야 한다면, 그것은 신디사이저일 것이다. 모듈, 음원의 요소, 처리법의 요소, 오실레이터, 제네레이터, 변환기 등을 모아 미시적 간격 사이에 정돈함으로써, 그것은 음향적 질료를 넘어선 또 다른 요소와 관계하게 만든다"(MP, pp.423-424)라는 또하나의 예견을 추가한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신디사이저는 현실의 악기인 신디사이저, 그러니까 미리 입력된 음을 재생하는 전자 키보드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전자 합성기(合聲機)이고, 소리의 분자들이 운동하는 기계장치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극소전자(microelectronics)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소리의 미시정치(micropolitics)에 대해 사유할 가능성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절에서 우리는 이제 현대 팝 음악을 '식민화'해 왔던 록 구성체 속으로 들어간다.

 

3. 록 구성체(로큰롤 기계)와 리토르넬로

록 구성체(rock formation) 혹은 록이라는 영토화 기계

미국 태생의 '문화이론 연구자' 로렌스 그로스버그(Lawrence Grossberg)는 1992년 {우리는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14)라는 책을 발표했다. 미국 태생인 그로스버그는 영국 유학을 통해 스튜어트 홀(Stuart Hall) 등이 이끌던 이른바 '브리티시 문화연구(British Cultural Studies)'의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그람시적'인 영국 문화연구의 성과를 들뢰즈.가타리 및 푸코의 -- 그의 표현으로는 '포스트모던'한(≠ 포스트모더니즘적) -- 이론과 접속하려는 야심적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이 글이 그의 이론에 대해 검토하기에 적절한 자리는 아니므로, 나는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했는가를 따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책의 2부에 나오는 '록 구성체(rock formation)'에 대한 설명이다. '구성체'라는 용어는 "특수한 단위(통일성)의 구조를 형성하는 실천들의 형세(configuration of practices)"15)고 "특수한 역사적 접합"16)를 지칭한다. 즉, 그로스버그에게 있어서 록은 단지 음악적 장르에 국한되지 않으며 아니며 특수한 시공간을 점유하는 의미화 공간이자 성정을 투여하는 장이다.

조금 친숙하게 말하자면 록 구성체란 "대중음악과 청년문화의 특정한 형태 사이의 강력하고 직접적인 연계의 집합"17)이다. 즉, 그로스버그는 영미권에서 일반화된 록 음악에 관한 연구를 들뢰즈.가타리의 사유와 접속시키려고 한다. 음악을 '영토화 기계'로 규정하면서 그는 록 음악이 일상생활을 영토화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로스버그는 록 음악에 선험적으로 전복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록 신화주의자'들과 비판적 거리를 둔다. 그럴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탈영토화/재영토화 운동을 영유했기 때문이다. 록 음악은 특정한 영토화에 도전하여 탈주선을 만들어 나간다. 록이 만들어내는 '소음(noise)'은 이 탈주선의 청각적 신호이다. 그와 동시에 록이 만들어내는 탈주선은 자신의 영토화 기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록 구성체의 외적 극한은 없고 내적 극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록은 우주를 향하여 탈영토화하는 듯 돌진하면서도 결국은 일상생활의 안정된 영토로 귀환하는 운동을 반복한다.

분명 록 구성체는 "누구든 똑같은 리듬으로 똑같이 가속화된 운율(cadence)로 살아가게 만드는 자본주의적 리토르넬로"18)와 때로 심각한 긴장상태에 처했다. 기름바른 머리와 검은색 가죽 자켓을 입은 로커(rocker)들의 으쓱거리는 걸음걸이에서, 하이컬러 자켓과 넥타이를 산뜻하게 차려입은 모드(Mods)의 쿨한 표정에서, 길게 길러 꽃을 꽂고 찢어진(때로는 벌거벗은) 옷을 걸친 히피(hippie)들의 도사(guru)같은 어투에서, 폭주족 의상에 손에는 체인을 감은 메탈러(metaller)들의 공포스러운 인상에서 자본주의의 일상적 리토르넬로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의 등록은 쉽게 발견된다.

그렇지만 록 구성체는 너무나 빠른 템포로 자본주의의 리토느넬로에 적응되어 버린다. 거리와 클럽과 뮤직 홀(music hall)과 경기장(stadium)이 록 음악의 실제적 영토다. 록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들,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들은 록의 소음이 이 영토로부터 범람하면 시끄럽다고 항의한다. 그렇지만 록의 영토는 이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청년, 흑인, 인도인, 아메리카 원주민, 어머니, 연인 등 록 음악의 표현적 영토들은 계속 교대되어 등장한다. 19)

록 음악의 리토르넬로는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세 번째 유형, 즉 민중적 리토르넬로의 한 변종, 부단히 탈영토화하지만 재영토화하면서 새로운 배치로 이동하는 리토르넬로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그로스버그의 입장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록은 일상생활 외부의 삶을 꿈꾸지만, 탈주선은 자신의 영토화기계의 영토를 벗어날 수 없다. 록은 기껏해야 일상생활 내부에서 가능성들 - 리듬들 - 을 혼란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20)

음악의 영역으로 들어와 보자. 록 음악의 '뿌리'인 블루스(및 리듬 앤 블루스)는 '12마디의 코러스(혹은 스탄자(stanza)'를 기본 골격으로 가진다. 특히 록 음악의 초기 형태인 리듬 앤 블루스나 로커빌리는 12마디 코러스 형식의 계속된 반복이다. 후대의 록 음악과 달리 버스와 코러스(=레프레인)의 엄격한 구분은 없고, 동일한 주제와 형식이 버스로도, 코러스로도 기능한다.

예를 들어 리틀 리처드 Little Richard의 <롱 톨 샐리 Long Tall Sally>에서는 코러스가 여덟 번 반복되고, 빌 헤일리 Bill Haley의 <흔들고, 덜컹거리고, 돌려 Shake, Rattle & Roll>에서는 일곱 번 반복된다.21) <롱 톨 샐리>의 경우 첫 번째, 두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그리고 마지막인 여덟번째 코러스에서는 보컬의 목소리가 나오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코러스에서는 색소폰 솔로가 나오는 전개과정 상의 다양함이 있다. 형식 상으로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다.

그러나 만약 그 반복이 지루하지 않게 들린다면 그 이유는 록 음악의 '뿌리'인 아프로-아메리칸 음악의 특징 때문일 것이다. 흑인음악은 "비트의 정규성을 구부리고(bend), 집적거리고(tease), 전복시킨다. 그것은 폴리리듬적(polyrhythmic)이다".22) 팝 음악의 기본 요소가 멜로디의 선형적 확장이 아니라 비트의 모듈레이션과 굴절이라는 체스터의 언급도 이와 관련된다. 여기서 외연적 확대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도 차이없는 반복이 무한히 발생할 가능성이 나온다. 대중음악에 "반복의 원천이 없다"는 브를레의 주장은 시련에 처한 셈이다. 록 음악의 비트는 기계론적으로(mechanistically) 반복적인 것이 아니며, 미묘한 무수히 많은 시간적 분할과 공시적 조합에 의해 무수히 많은 굴절들을 만들어내면서 반복된다. 따라서 50년대의 로큰롤의 음악형식이 반복적이라는 비난은 일면적이다. 드럼 연주자는 단지 타임 키퍼(time keeper)가 아니라 타격의 부위와 강도의 선택에 따라 비트를 무한히 굴절시킬 수 있다. 드럼 연주자들이 드럼들과 심벌들의 재질을 중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기타 연주자의 왼손가락의 운지하는 '포지션'에 따라 음은 '슬라이드'되고, 오른손의 운동의 세기와 위치에 따라, 즉, 기타 줄의 어느 부분을 얼마나 세게(혹은 여리게) 치는가에 따라 무수히 많은 음의 분자가 생성된다. 피아노처럼 음고가 정해져 있는 악기의 경우도 사정이 달라진다. 1도, 4도, 5도의 음정을 오가면서 '셔플' 리듬23)을 만들어내는 왼손, 그리고 건반을 위에서 아래로(혹은 그 반대로) 주루룩 훑는 '글리산도(glissando)'를 만들어내는 오른손(혹은 양손).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50년대의 로큰롤이 12마디 코러스라는 형식에 얽매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자유로움은 경직된 형식과 틀을 지킴으로서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이는 이른바 '블루스 이데올로기'의 하나이다). 그렇지만 이는 혹시 가타리가 말했던 자본주의적 리토르넬로의 거울상 아닐까? 혹은 월요일부터 정상화된 리토르넬로로의 복귀를 위한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아침까지의 제한된 시간 동안의 교란? 가끔은 그루브함과 즉흥연주(improvisation)의 경계에서 마술같은 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는 대부분 매번 상이하고 다양하게 반복되는 '음표의 모듈레이션과 비트의 굴절'이라는 표현의 질을 획득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생산적 반복의 원천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4/4박자로 이루어진 12마디 형식의 원환적 운동 속으로 폐쇄된다. 24)

1967 : Cosmic Charlie's Dark Star

록 구성체의 역사에서 가장 강도높은 탈영토화 운동은 67년 샌프란시스코와 76년 런던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우리가 각각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과 펑크 록(punk rock)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운동. 두 운동에 대한 비교평가는 평론가와 팬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테마였다. 1967년 하이트 애시베리에서 3분 분량으로 레코딩된 곡 <어두운 별 Dark Star>(Live/Dead, Warner, 1970)를 2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즉흥연주(Improvisation)하는 그레이트풀 데드의 기계에 포섭되어 황홀경에 빠져들 것인가, 아니면 1976년의 런던의 101클럽에서 로봇같은 비트의 광적인 리듬과 '반(反)가창(anti-singing)'이라고 부르던 백색 소음(white noise)25) 속에 빠져 들 것인가.

나는 해묵은 문제,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지루하고 피곤해진 문제를 다시 던지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면서 어느 한쪽이 '우월'하고 다른 한쪽이 '열등'하다는 진부한 해석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이는 국내외의 많은 '소장' 록 평론가들의 결론이다). 60년대 후반의 정세에서는 싸이키델릭 록이 정당했고, 또 70년대 후반의 정세에서는 펑크 록이 상황적으로 정당했다는 '역사주의적' 해석도 내키지 않는다(이는 많은 개명한 '노장' 평론가들의 결론이다). 문제는 두 운동의 양태와 성격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다. 두 운동의 귀결의 차이는 이를 논한 다음에야 평가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단정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히피들의 사이키델리아는 우주로 개방되는 절대적 탈영토화 운동의 외양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주마저 새로운 대지로 재영토화한 듯하다. 사이키델릭 록에서는 SF식의 외계의(extra-terrestrial) 테마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테마는 특히 지미 헨드릭스 Jimmy Hendrix와 (초기의) 핑크 플로이드 Pink Floyd에서 많이 등장했다.

히피들의 '혁명'은 흔히들 60년대의 급진적 운동들이라고 불리는 갬퍼스 내에서의 지성의 자유를 위한 투쟁,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흑인 민권운동과의 연대반전운동, 흑인민권운동과의 연대투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들의 '총체적' 혁명은 현재의 체제를 일거에 부정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정신적, 문화적, 정치적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다. 이 혁명은 생활양식 되기(becoming life-style)'였고, 적어도 관습적 의미로 볼 때는 탈정치화된 것이었다. 혁명이 이루어지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체험되는(lived) 것이 필요했다.

주목할 것은 이런 경험들, 예를 들어 섹스, 드럭, 록 음악을 통한 '여행(trip)'이 신체적 감각의 찬양으로 그치지 않고 두뇌 속에서의 질서를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한 문화연구자의 말을 들어보자. "이런 경험들의 '진정성'은 다른 지도들을 사용하면서 발견되었다. 그 지도들은 현대 산업사회의 혼돈된(entropied) 의식 외부의 영토들에 속하는 것이었다 : 동양, '어머니 지구(Mother Earth)'의 리듬들, 내부의 혹은 외부의 스페이스". 26)

그런데 이들의 사이키델리아가 외부를 향해 개방되는 운동은 '잃어버린' 아메리카를 발견하려는 귀환운동을 동반했다. 즉, 유럽화되고 산업화된 아메리카가 아닌 "본래의(original), 태고의(archaic) 아메리카"27)가 '진정한' 아메리카로 부상했다. 아메리카 인디언, 카우보이, 비트, 힙스터가 새로운 조명을 받았고, 집단으로 숙식하던 히피들의 공동체 생활은 아메리카의 농촌공동체의 생활양식을 추종하는 것이었다. 도시, 그리고 산업 문명으로부터의 집단적 탈주는 대지의 심층으로 깊숙이 스며드는 은둔의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키델릭 록에 등장하는 히피들은 영웅들이다.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방랑하는 아메리칸으로 대체된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가 고독하고 비극적인 반면, 후자는 유쾌하고 희극적이라는 점이다.28) 대지의 구심작용을 통해서만 탈영토화하는 바그너의 주인공들(Hero)과 달리 그레이트풀 데드의 주인공들은 외부로의 개방을 통해서만 재영토화된다. 우주는 새로운 대지가 된다. 록은 엄마를 찾아 헤매는 아이의 송가가 된다.

<어두운 별>에서 전기 기타의 연음 사이로 비집어진 탈코드화의 틈, 이 틈은 어머니를 찾는 소년이 방랑하는 환경이었다. 그렇지만 이 균열은 곧 폐쇄회로 속에 들어갔다. 하드 록의 '파워풀'한 리프(riff)로, 아트 록의 '테크니컬'한 키보드 솔로(solo)로의 성인 남성의 욕망으로의 전도. 그리고 스튜디오와 경기장이라는 대지 없는 영토로의 이상한 안착.

1976 : Holiday in Black Hole Sun

섹스 피스톨스의 펑크는 '아무 생각 없는' 운동으로 보이고 그들의 시선은 '영국'이라는 영토를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펑크는 싸이키델리아보다 더욱 강도높은 탈주선 위에서 운동했다. 펑크는 구축해야 할 질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펑크 역시 '라이프 스타일'이었지만, 펑크의 라이프 스타일 되기는 '진정한' 영토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카오스로 빠져드는 것이다. 섹스 피스톨스의 한 멤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은 우리는 음악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죠. 그럼 뭐냐구요? 우리는 카오스에 빠져 드는 겁니다". 29)

펑크의 음악적 특징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글에서 언급되었으므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른바 DIY(Do It Yourself)의 에토스로 만들어진 3분짜리 싱글 레코드는 "수공된 원자폭탄"(MP, p.426) 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표현에 어울릴 것이다. 펑크에는 로큰롤의 뿌리인 아프로-어메리컨 음악 특유의 굴절된 비트가 주는 그루브한 리듬감조차 없다. 그렇지만 박자는 균등하게 세분되어 있는 반면, 리듬은 들뢰즈.가타리의 기계처럼 반복의 운동을 전개한다. 중요한 것은 유연한 '라인'이 없이도 아주 뾰족하고 매끄러운 선을 만들어내는 모노톤(monotone)의 목소리로 인해, 피스톨스의 음악은 노이즈로 함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린아이처럼 소박한 치한 선율적 풍경으로 모든 것을 포착하고자 하는 단순한 선. 섹스 피스톨스의 펑크는 그레일 마커스(Greil Marcus)의 표현처럼 "현대 사회의 전체주의적 동결에 대한 반응"30)이었다. 전체주의적 자본주의의 권태로운 리토르넬로에 대해 반대하는 카오스가 펑크의 리토르넬로였을까. 아니 펑크는 모든 리토르넬로의 파괴에 가까웠다.

방금 지적했던 논점으로 돌아가 보자.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했던 피스톨스가 정작 특유의 '영국성(Englishness)'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31) 그들도 결국 '영국의 무정부상태를 의도했고, '여왕을 보살피라고?'라고 비아냥거렸을 뿐이라고. 그렇지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부정' -- 물론 이 말 앞에는 '순수한', '허무주의적'이라는 수사가 동반된다 -- 이라는 용어는 운동을 의인화한 시선 아닐까? 섹스 피스톨스는 조건을 무시하는 정서적 투여를 수행했을 따름이다. 둘째 영국성에의 집착은 국지적인 운동이 마치 눈덩이를 굴리듯 분자적으로 운동하면서 초래한 카오스를 고려한다면, 그들의 '의도'를 지나치게 강조한 해석이다. 영국성이라는 영토는 급격히 탈영토화된다. 섹스, 사랑, 가족, 계급, 자본주의가 차례로 이들이 쏜 총알에 난사당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구 근대사회의 비밀인 '진보' 개념이 운동의 바퀴에 깔렸다. <신이 여왕을 보호하사 God Save the Queen>(Virgin, 1977)의 종반부의 "미래는 없어 No Future"라는 반복된 절규는 절대적 탈영토화 운동이다.

그런데 유심히 들으면 "No Future"라는 코러스의 기계적 반복 중간에는 "For You"라는 가사 뿐만 아니라 "For Me"라는 가사도 들어 있다. 리토르넬로의 탈영토화는 블랙 홀에 마주한다. 그들의 마지막 싱글 레코드 <휴일 속의 태양 Holiday in the Sun>(Virgin, 1977)에서 조니 로튼은 베를린 장벽을 넘어서 나찌의 학살 캠프로 가려고 한다32) 음악이 반복되면서 그는 백색 장벽(white wall)을 넘어 검은 구멍(black hole)으로 빨려 들어간다. "부디 나를 기다리지 마"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노이즈의 장벽(wall-of noise)은 반복의 가능성을 무화시킨다.

들뢰즈.가타리는 "시인으로 살 것인가, 암살자로 살 것인가"(MP, p.427)라고 물었다. 그런데 조니 로튼은 시인도 암살자도 아니다. 그는 공공연한 연쇄살인자로 등장한다. 군주제를 "파시스트 레짐"이라고 묘사했던 그들은 이제 스스로 파시스트의 색채로 등장한다. 미학적 테러리스트는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테러를 가한다. 펑크의 탈영토화된 리토르넬로에서는 더 이상 반복의 원천이 사라진다. 모든 것을 권총의 탄창 속에 쑤셔 넣든가, 아니면 총탄을 난사하여 모든 선들을 지워 버린다. 이 모든 것은 9개월이라는 극히 짧은 시기 동안 발생했다. 펑크는 연속적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순간(moment)이었다. 순수한 생성과 순수한 소멸의 카오스는 그자체의 황홀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혹은 그를 압도하는 공포를 동반한다. 카오스와 질서 사이에 발생하는 마법(magic)은 부재했다. 펑크는 모든 욕망이 등록되는 부재의 표면이었다.

들뢰즈.가타리는 아방 가르드 음악이 곧잘 "아이, 광인, 소음"에 고착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들은 존 케이지만을 언급하고 아방가르드 팝 음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프리 재즈, 노이즈 록(헤비 메탈?)의 일부도 그 사정권 아래 있을 것이다. 파시스트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아이같은 간결성을 가진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다. 그런데 펑크의 미니멀리즘은 스스로 파시스트를 닮아 버렸고, 블랙 홀의 균질적 공간으로 흡입되었다(블랙 홀은 균질적일까? 아무튼 이질적인 것들이 모두 빨려들어간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남은 것은?

1991 : Perfumed Fog

들뢰즈.가타리는 '선율적 풍경'과 '리듬적 인물'에 대해 논하였다. 그렇다면 음색33)은? 그들의 두뇌 속에서는 음악과 회화는 우리같은 일반인들처럼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으므로 음색은 시각적 색채와 분리되어 설명되지 않는다. 색채의 리토르넬로는 소리나 동작의 리토르넬로와 더불어 작동하므로, 음색은 별도의 고찰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34)

그렇지만 우리는 회화와 미술을 각각 시각과 청각으로 엄격히 구분하는데 길들여져 있다(아마도 어려서부터 MTV를 보고 자란 세대는 우리보다는 덜 익숙할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가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음색이 음악적 리토르넬로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적어도 내게는 정당해 보인다.

여기서 잠시 브라이언 이노(Brian Eno)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20년간 팝 음악계를 배후에서 지도하고 있는 인물이다. 앰비언트 음악(ambient music)이라고 불리는 그의 음악은 아마도 들뢰즈.가타리의 '취향'에 가장 잘 어울리는 현대의 음악일 것이다.35) 그는 "나는 아주 어린아이처럼 느끼는 일에는 흥미가 있지만, 10대처럼 느끼는 일에는 흥미가 없다"36)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어머니의 아이(Mother's boy)'에 고착된 록 음악에 대한 항의이다. 음악에서 운동은 점점 줄어들고, 신체와 환경은 동일시된다. 그래서 만약 음색의 리토르넬로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의 일련의 솔로 앨범들은 이를 가장 잘 표현해 준다. 이 음악에서 내러티브는 남아 있지 않고 모든 것은 음색으로 표현된다. 아니 음색이 모든 표현의 질료가 된다.

그런데 음에는 '뉘앙스(nuance)'가 있다. 이는 음색과는 약간 다른 차원에서 음의 짜임새[직조 texture]의 중요성을 가진다. 그래서 때로 소리는 시각적 은유(색채)만이 아니라 후각적 은유(냄새)를 통해 표현된다. 다시 한 번 이노를 인용해 보자. "현대의 음악은 잠재적으로 무한한 소리의 팔레트를 가지고 작업한다. 이 팔레트에서 색채의 등급변화(gradation)와 결합은 결코 적절한 말로 기술될 수 없고, 그런 기술을 시도하는 것은 순열의 무한성 뒤로 처져 버려야 한다"37). 그것은 '향기를 풍기는 안개(perfumed fog)'이다.

90년대의 팝 음악 중에서 '향기를 풍기는 안개'를 가장 잘 보여준 밴드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일 것이다. "<<아무 것도 아냐 Isn't Anything>>(Creation, 1988)와 <<사랑없는>>(Creation, 1991)38)은 "록 음악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39)라는 한 외지의 표현처럼, 관습적 록 음악과는 다른 냄새를 풍긴다. 관습적 록 음악의 '악취'와 이들의 '향기'를 대비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창안한 글라이드 주법은 기타 줄을 스트러밍하면서 (whammy bar) (혹은 트레몰로 암(tremolo arm))을 계속 작동하여 윙윙거리는 한 무더기의 디스토션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밀도높게 '믹스'된 음의 짜임새를 통해 음은 빛을 방열(radiation)할 뿐만 아니라, 향기를 방사(emission)한다. 남근적 리프와 질(窒)같은 노이즈는 마치 용암처럼 녹아들어가서 화학반응을 거치고, 미분화된 채 원래의 형체를 삭제당한다. 남근과 질의 색채와 냄새가 떠오르다가도 이내 사라지고 우리는 다른 영토로 옮겨가기를 계속한다. 나부끼는 리듬들, 이리저리 이동하는 조성, 신서사이저로 처리된 특수 효과, 피드백을 샘플링한 기타 노이즈, 유동하는 보컬 라인은 전면으로 부상했다가 깊숙이 침몰하기를 반복한다. 들뢰즈.가타리의 표현을 훔친다면 다음과 같은 멋진 표현이 나올지도 모른다 : 우리는 질료들, 색채들, 소리들 사이의 미시간격들(microintervals)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거기서는 모든 선들, 즉 탈주의 선들, 세계의 선들, 투명성의 선, 교차의 선들이 빨아들여진다.

관습적인 록의 '자연주의적' 레코딩 방법은 라이브 연주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기타는 여기, 베이스 기타는 저기, 보컬은 앞쪽, 드럼은 뒤쪽. 이런 식으로 록 음악의 청취자는 각자 듣는 장소를 '매스터링'한다. 그렇지만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노이즈는 이런 예측을 빗나가게 만든다. 음악의 '기본'을 아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음의 3요소의 수직적 배치, 즉 리듬이 아래에서 기초를 닦아주고, 화성이 중간에서 보강해주고, 멜로디가 위에서 '리드 라인'을 전개하는 배치도 무시된다. 믹스된 음의 다발이 여기 저기에 동시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다른 곳을 찾아간다. 드럼 소리마저 잘 들리지 않는 듯하지만 유심히 들으면 들릴 정도로 다른 소리와 긴밀하게 '믹스'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음의 3요소는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그래서 요소로의 분할이 무의미해진다. 나아가 이들의 분자적 사운드는 청각에 국한되어 지각되지 않는다. 소리와 색채와 향기는 뒤섞인다. 귀로 냄새를 맡고, 눈으로 색채를 보고, 코로 소리를 흡입한다. 감각 기관의 통상적 범위는 곧잘 무용해진다. 아! 나의 피투성이 발렌타인의 아름답도록 불길한 미아스마(miasma). 40)

피투성이 발렌타인의 신체 위에는 복수의 욕망들이 등록되지만 그 욕망들은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강렬한 에너지의 흐름은 등록됨과 동시에 강도 = 0 의 상태로 무화된다. 기관들 없는 신체. 음과 향기의 순수한 흐름, 유목적 운동, 유목인의 리토르넬로. 고정되게 반복될 수 없다는 점에서 탈영토화하는 리토르넬로.

이런 주장은 '이들의 리토르넬로가 가장 좋은 것', '우주로 개방되는 리토르넬로'라고 단정하는 것일까? 나는 문제를 좁혀 나가고 싶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비단 음악의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과 관련된 일이다. 벤야민(W.Benjamin)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현대 도시의 경험이 연속적 충격의 경험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지각하고 있는 바이다. 벤야민은 이 충격 속에서 혁명적 계기를 발견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포스트모던'한 도시의 시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들 중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아마도 보드리야르(J.Baudrillard)였다면 리토르넬로마저 함열(implosion)되었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연속적 충격은 그 주기적 싸이클마저 상실한 것일까? 강도와 에너지의 부단한 이동마저도 울혈상태에 처한 것일까?

우리는 포스트모던의 묵시록 이후의 시공간에 내던져져 있다. 그리고 나는 이 '포스트아포칼립틱(post-apocalyptic)' 시공간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기관들을 개발하고, 감각을 확대하라는 요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속한다. 아마도 들뢰즈.가타리라면 이 포스트모던한 시공간을 '비결정의 지대(zones of indeterminancy)'라고 부를 것이다. 연속적 충격의 공포 속에서 불활(inactivity)만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피투성이 발렌타인의 리토르넬로를 들을 수 있다. 아니 새롭게 조직된, 앞으로 계속 조직될 신체를 통해 그 리토르넬로를 감각의 평면에 부상시킬 수 있다.

 

4. 결론 : 음악의 파시즘을 넘어서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할 필요는 없다. 단, 한 가지 확인해 둘 사항이 있다. 다시 현 상태의 조직된 신체를 작동하면서 들뢰즈.가타리로 돌아가자. 저자들은 리토르넬로가 운동, 태도, 색채, 시선 등 모든 면에 걸쳐 있으면서도(이 글은 거기에 냄새를 추가했다) 청각적 리토르넬로에 특권을 부여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리토르넬로의 관습적 의미에도 부합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대저 무엇일까? 달리 말해 리토르넬로는 왜 통감각적이면서 유독 소리를 통해서 가장 잘 작동하는가?

가타리는 다른 글에서 이미 "음악은 가장 덜 의미화하고 가장 탈영토화하는" 41)예술 형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지만 아직 이유는 선명하지 않다. 저자들은 그 이유를 회화와 비교하여 꽤 길게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소리는 탈영토화하면서 점점 더 정련되고 특정화되며 자율적이 된다"(MP, p.429)는 속성을 들고 있다. 이는 "우선적으로 대상이 아니라 영토성에 집착하는"(MP, p.429) 색채의 속성과 대비된다. 즉, 소리는 "인도자의 역할"(MP, p.429)을 수행하면서 직접 보이는 색깔 뿐만 아니라 그와 다른 상이한 색깔들을 유도한다.

이를 음악이 다른 예술형태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음악의 거대한 모호성. 음악은 가장 탈영토화된 예술형태이기 때문에 쉽게 대지를 떠나간다. 그렇지만 대지를 떠난 음악은 우주를 열 수도 있고, 블랙 홀로 빨려들어갈 수도 있다. {안티오이디푸스}를 읽은 사람은 분열분석에서 돌파(breakthriugh)와 붕괴(breakdown)의 구분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시정치학을 읽은 사람은 파시즘이 '강렬한 탈주의 선 위에 편승한 전도된 자살적 전쟁기계'라는 분석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의 주장이 맞다면, 음악은 다른 예술형태보다도 이런 '리스크(risk)'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론을 감히 '착취'한다면 이 위험은 20세기 후반의 팝 음악의 역사를 지배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광기(craze)는 팝 음악의 '본질'이었다. 바로 이 광기로 인해 팝 음악은 가장 비극적인 자기파멸부터 가장 위대한 창조에 이르는 대중운동의 '인도자' 역할을 해 왔다. 그 중간에 창조와 혁신을 한때의 트렌드로 만드는 창백하고 지저분한 손길이 있다.

아마도 이 글은 음악의 영역에서 광기를 무릅쓰는 선 위에 올라타는 이야기를 했을 뿐, 그 자멸적인 선 위에서 일관된 자세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하지 못한 듯하다. 만약 그 선에 올라타게 된다면, 우리는 우주를 개방하느냐, 블랙 홀로 빨려드느냐의 양자택일적 질문이 만들어내는 해답의 다이어그램 위에 서게 된다. 우리는 운동하면서 서 있게 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우리는 구조나 체계가 아니라 선들과 다이어그램만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결론내릴 것이다. 그런데 확정된 상태로 유기화되지 않으면서 신체를 유기적으로 구축하는 윤리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부당한 것일까? 달리 말하면 탈영토화하는 리토르넬로의 탈영토화와 자기로의 귀환. 우리는 운동하면서 우뚝 서 있거나 혹은 선 채로 움직여야 한다. 42)

 

 

1997. 3. 4.
{푸른숲} 에 수록됨.
1999 신현준 (gilles@nownuri.net)

 

 


1) G.Deleuze et F.Guattari(1980), Mille Plateaux : Capitalisme et schizophr nie, Les Edition de Minuit. 이하에서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본문 중에 MP로 표기한다. go back to the text 

2) 보통 버스는 선율감과 리듬감이 작은 반면, 리프레인은 선율감과 리듬감이 강하다. 그런데 대중음악에서 리프레인이라는 용어는 점차 코러스(chorus)라는 말로 대체고 있다. 우리가 흔히 '팝송'(한국어로 '가요'?)이라고 말할 때는 verse - chorus - verse - chorus의 구조를 가진 곡조를 지칭한다. 특히 귀를 잡아끄는(catchy) 리프레인(=코러스)는 대중음악이 성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참고로, 코러스라는 단어도 '합창'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아니다. go back to the text 

3) R.Kamien, 김학민 역, {서양음악의 유산 I}, 예솔, 1993, p.179. f라는 기호는 forte(강하게)를 말한다. 바로크 음악의 특징은 "큰 소리와 작은 소리의 대조, 큰 악기 그룹과 작은 악기 그룹 간의 대조"이다. go back to the text 

4)F.Guattari(1979), L'inconscient Machinique : Essai de Schizo-analyse, Editions Recherche, p.110. go back to the text 

5)그 예로는 ① 원천을 향한 연어의 순례, ② 메뚜기나 핀치새의 집결, ③ 대하(大鰕)들의 긴 행렬 등이다. 이런 운동에는 동작이나 시선은 물론 특유의 '소리'가 있고, 따라서 넓은 의미든 좁은 의미든 리토르넬로가 존재한다. go back to the text

6)이상의 논의를 유심히 읽으면 카오스의 힘에 맞서서 생성되는 환경(millieux), 대지의 힘에 맞서서 형성되는 영토, 우주적으로 개방되어 탈영토화되는 운동... 등에 관한 '들뢰즈.가타리의 사유의 리토르넬로'를 들을 수 있다. 달리 말해, 이런 사유의 리토르넬로는 각 고원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것이 차이를 동반하여 생산적으로 반복되는 리토르넬로인지, 아니면 기계론적으로 재생되어 반복되는 그들의 클리셰(clich )인가는 독자의 '취향'이다. 물론 취향은 개별화 효과(individualizing effect)를 갖지만 개인적(individual)이지 않고, 따라서 '가변적'이고 '정치적'이다. go back to the text

7)이런 시기 구분에는 저자들의 독창적 시각과 필자의 자의가 개입되어 있으므로 몇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다. 먼저 저자들은 바로크 음악을 고전주의 음악에 바로크 음악을 포함시킨다. 두 번째 '민족음악파'라는 용어는 저자들이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다. 넓게 본다면 민족음악은 낭만주의에 포함되는데, 필자가 여기서 이를 세분한 것은 저자들이 낭만주의 중에서 "바그너적이지 않은 경로들의 집합"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통상 라틴 계통의 음악(예를 들어 베르디 Verdi)은 민족음악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오해를 줄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음악사에서는 통상 모더니즘이라는 단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도 "모던(moderne)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가 있다면..."(MP, p.422)라는 정도로 말할 뿐이다. 이 용어를 '현대음악'이라고 불러도 되겠지만, 문학이나 예술에서 설정되는 '모더니즘'에 가깝기 때문에 '직역'하였다. go back to the text

8)들뢰즈.가타리가 아방가르드 예술의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존 케이지(John Cage)에는 비판적 거리를 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 케이지의 음악은 "우주적 기계를 생산하는 대신, 재생 기계에 되빠져 모든 선을 지우는 서투른 그림을 재생하는 것으로 끝나거나, 모든 소리를 지워버리는 소음으로 끝나고 만다"(MP, p.424). go back to the text

9)포스트히피 사상가들이란 '60년대의 꿈'이 폭발해 버린 뒤(이때 배경화면 안토니오니 감독의 {자브레스키 포인트 Zabreskie Point}에서의 폭발 장면. 배경음악은 핑크 플로이드 Pink Floyd의 <유진, 그 도끼를 조심해 Careful with That Axe, Eugene>) 인간잠재력 운동(human potential movement)이나 채식주의 운동(vegetarian movement) 등으로 경사된 이들을 말한다. 이들의 논의에 대해 '뜬구름 잡는'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들의 사유나 행동이 심오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탈정치화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70년대 중반 이후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 : 이것도 운동일까?)를 거쳐 여피 문화의 한 지류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뒤에 살펴 보듯 이 점은 60년대의 히피 반문화운동에서 이미 맹아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필자의 일시적 불편함도 그들의 시야의 범위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효과의 성격 때문에 나오는 듯하다. 한편 '탈정치적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무시'한다. go back to the text

11)A.Chester(1970), 'Second thoughts on a rock aesthetics : The Band', New Left Review, 62, pp.78-9. go back to the text

12) Ibid. go back to the text

13) 팝 음악은 프랑스어 원문에는 pop'musique이라고 쓰여 있다.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지 모르지만, 대중음악(popular music)과 팝음악(pop music)은 상이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들뢰즈와 가타리도 대중음악과 팝음악이라는 용어를 상이한 맥락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자가 영어권 이외의 대중음악도 포함하는 반면 후자는 영어권의 대중음악만을 포함한다는 차이 이상이다. 팝이라는 용어는 50년대 중반 이후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당시에는 '상업적', '하루살이성(ephemeral)' 등과 거의 동일한 의미였다(예를 들어 '팝 콘'처럼). 즉 팝음악이란 다국적 음악산업에 의해 일회적(disposable) 대량소비를 목적으로 대량생산되는 음악이다. 이런 정의가 그 이후의 시기에 어떤 변모를 겪는지는 여기서 논구할 주제는 아니다. 관심있는 독자는 신현준 편, {얼트문화와 록 음악 2}(한나래, 1997)의 서론을 참고하라. 일단은 팝 음악이 다국적 음악산업의 의사결정과 통제 하에 있으면서도, 그 결정과 통제는 절대적이지는 않으며 항상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해 두자. 음악산업의 '논리'의 곤란함은 '비논리적'인 취향을 논리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go back to the text

14) L.Grossberg(1992), 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 Routelege.
go back to the text

15) L.Grossberg(1992), p.398. 이 개념 이외에도 그의 개념들의 의미는 독특하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전통적(맑스주의적?) 개념을 원용하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얼터너티브 록의 문화이론적 버전이다. 한편 구성체라는 원어와는 다른 용어 이외 별다른 대안적 번역어가 없다는 사실에 용서를 구한다. 그 외의 용어는 어감이 안좋거나, 느낌이 오지 않는다. 우리의 '익숙함'에 의존하는 수밖에. go back to the text

16) L.Grossberg(1992), p.70. go back to the text

17) L.Grossberg(1992), p.133. go back to the text

18) F.Guattari(1979), p.111 go back to the text

19) 이 중에서 가장 지배적인 영토는 '청년(혹은 10대)'일 것이다. 록 아카데미션 사이먼 프리스는 그의 주저 Sound Effect(1983)에서 록 이데올로기의 특징이 '포크음악으로서의 록'과 '예술로서의 록'의 결합이라는 점을 탁월하게 분석해 내었다. 국역, 권영성.김공수 옮김, {사운드의 힘}, 1995, pp.79-90. 국역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원제의 의미를 살리는 편이 좋을 것이다. go back to the text

20) L.Grossberg(1992), pp. 155 go back to the text

21) 이 곡의 오리지널은 흑인 리듬 앤 블루스 뮤지션인 조 터너(Joe Turner)의 레코딩이다. 원곡에서는 코러스가 9번 반복되고, 악기편성은 재즈에 가까우며, 가사도 보다 '노골적'이다. go back to the text

22) I.Chambers, Urban Rhythms : Pop Music and Popular Culture, MacMillan, p.11 go back to the text

23) 셔플 리듬(shyffle rhythm)이란 하나의 비트를 불균등하게[부등하게] 세분(subdivision)하여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보통은 ♩♪ 으로 표기되지만 그 음가는 정확히 2 : 1이 아니다. 셔플 리듬은 리듬 앤 블루스나 로큰롤 특유의 '그루브(groove)'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반면 '백인적' 록 음악은 대부분 '비트의 균등한 세분(even subdivision)'에 기초하여 리듬이 짜여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go back to the text

24)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록 음악의 형식은 12마디 형식을 탈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대부분은 서양 대중음악의 스테레오 타입인 버스-코러스 구조를 복귀시키면서, 그 댓가로 비트의 굴절의 약화를 동반했다. 음악적 풍부화는 퇴화와 더불어 일어났다.
go back to the text

25) 백색소음(white noise)이란 높은 음과 낮은 음이 동시에 섞인 소음을 말한다. 카오스. go back to the text

26) I.Chambers(1985), p.93. go back to the text

27) J.Fiedler(1972), The Return of the Vanishing American, Paladin, p.23. 또한 비트 시인 게리 스나이더 Gary Snider는 "백인을 죽여라, 자기 속에 있는 아메리카인을 죽여라"라고 말했다. go back to the text

28) "우리는 가야 할까, 그대와 나 / 우리가 할 수 있는 동안 / 이행해 가고 있는 밤을 지나 / 다이아몬드 가득한"(<어두운 별>의 가사). 한편 영국의 소장 평론가.학자인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는 웨스트코스트의 애시드 록을 "전원적 허무주의(pastoral nihilism)"라고 불렀다. S.Reynolds(199?2), Sex Revolt, , p.?. go back to the text

29) I.Chambers(1985), p.180에서 재인용. go back to the text

30) G.Marcus(1980), 'Anarchy in the U.K.', in Rolling Stone Editor(1980), The Rolling Stone Illustrated History of Rock'n' Roll : 1950-1980(revised & updated), Random House/Rolling Stone Press Book, p.452. go back to the text

31) 예를 들어 D.Hebdige, Subculture : The Meaning of Style, Methuen, p.66
go back to the text

32) 음악과 표지에 드러난 소리와 색채의 풍경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Marcus(1980), pp.460-461을 참고하고, 그 '요약본'은 신현준 외(1996), pp.을 참고하라.
go back to the text

33) 음향학에서는 소리의 3요소를 높이(pitch), 세기(loudness), 음색으로 구분한다. 이들 중에서 높이는 주파수(frequency), 세기는 데시벨(decibel)이라는 물리적인 양적 측정 단위를 가진다. 반면 음색에는 아직(어쩌면 영원히) 물리적 측정 단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go back to the text

34) 불친절하게 설명하여 미안하지만 본문을 참고하라. 특히 MP, p.387의 새와 물고기의 색채의 역할을 숙독하기를 권한다. go back to the text

35) 물론 브라이언 이노 외에도 (초기의)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캔(Can), 그리고 최근의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 등을 이런 '전통'에 함께 놓을 수 있다. 재즈에서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말할 것도 없고. go back to the text

36) S.Reynolds(1995), p.202에서 재인용. 한편 이노는 Ambient 4 : On Land(EG, 1982)의 라이너 노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음악을 만드는 행위가 어느 정도는 장소 -- 풍경, 환경 -- 에 대한 감각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은 On Land를 만들기 이전부터 몇 년 동안 수차례 떠오르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그것을 정신적 선반[암초]으로 격하시켰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단지 또 하나의 아이디어라는 것 이상으로 부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동하고 호흡하는 음악이라기 보다는 다이어그램이었다. 되돌아 보건대, 이제 나는 이 아이디어의 영향력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많은 은밀한 시도들을 보고 있다. 이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중심적 테마처럼 내가 발매한 작업들 대부분을 경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신에게도 발생한다 : 당신은 가능성으로 충만한 어떤 영토를 상상하고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 사유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어느날 갑자기 주위를 돌아보면 마치 그곳에 오랫동안 있어 왔다고 깨닫게 된다". 이노 역시도 '영토를 가득 채운 탈영토화의 운동'이 항상 이미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는 듯하다. go back to the text

37) Details, July 1992. go back to the text

38) 물론 1990-91년의 시기는 이 앨범 뿐만 아니라 너바나(Nirvna)의 <<신경쓰지 마>>와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하향 나선 Downward Spiral>이라는 기념비적 앨범이 나온 해이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과 더불어 이들은 남근적 리프를 여자의 질같은 노이스 속에 용해시켰다. 그렇지만 과감히 말한다면, 이들은 '좌절한 소년의 절규'라는 로큰롤의 원죄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go back to the text

39) Alternative Press, November 1996. go back to the text

40) 사전을 뒤지면 미아스마(miasma)는 소택지 등에서 발생하는 독기(毒氣) 혹은 불쾌한 안개 모양의 두꺼운 구름 혹은 나쁜 영향을 주는 분위기라고 번역되어 있다.
go back to the text

41) F lix Guattari, Molecular Revolution: Psychiatry and Politics, trans R.Sheed, New York, Penguin, 1984, p.107. go back to the text

42) 다시 한 번 브라이언 이노에게 돌아와 보자. 그는 신서사이저를 전자 키보드 이상으로 사용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런데 앞에 언급한 글에서 그는 초기의 실험 과정에서 신서사이저가 '유기적(organic)'이지 않고 '다이어그램적(diagrammatic)'에 그쳤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를 유기적 상태를 지향하는 이노와 다이어그램적 상태를 지향하는 들뢰즈.가타리의 긴장으로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이노가 '일관성'을 '유기성'으로 오해했다고 비판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손쉬운 일이고, 따라서 부질없는 일이다.
go back to the text

the others:

check01b.gif  평론가 아저씨, 인디 밴드들 기웃거리기부터 잔소리하기까지 Dec.17th.1999

     그대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하리: 1980년대 문화적 정세와 민중문화운동 Oct.23rd.1999

     대중음악과 웃음 혹은 안면성 Jul.20th.1999

     20세기의 대중문화 : 기록의 상품화로부터 문화의 재산화까지 Jul.2nd.1999

     한국 대중음악의 미래는 있는가? Apr.14th.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