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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아저씨, 인디 밴드들 기웃거리기부터
잔소리하기까지

 

1995년 여름 매스 미디어에서 펑크가 분출하다

1995년 여름이라고 기억된다. 집에서 가요 순위 프로그램인 <가요 톱 텐>을 지켜보면서 삐삐 밴드라는 존재의 데뷔를 보았다. 골때리는 여자애 하나와 '아저씨' 두 명이 나와 <안녕하세요>라는 곡을 부르고 있었다. 립씽크였는지 아닌지는 잘 기억이 안난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도 모른다. 여자애는 말도 안되는 가사를 계속 악쓰면서 불러댔다. 연주 중간에 남자 멤버 하나가 '이동식' 채소장수나 생선장수가 사용하는 시뻘건 확성기를 들고 개짖는 소리를 흉내내기도 했다.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라면 '노벨티 펑크(novelty punk)'라고 할 만한 음악이었다.

삐삐밴드의 데뷔는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박미경과 DJ Doc와 솔리드(이제 이런 이름도 '원로'처럼 느껴진다)를 보러 온 아해들이었으니까. 3분 동안의 퍼포먼스를 마친 뒤 무대를 떠나는 그들의 모습은 내 눈에는 조금 고독해 보이기까지 했다.

두 아저씨의 이름은 강기영과 박현준이었다. 그들이 누구지? 1980년대에 음악 깨나 들은 사람들 치고 이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억력을 더듬어 보면 박현준은 1989년 경 MBC TV에서 방영된 주말 드라마 <고개 숙인 남자>에 출연하기도 했다. 마치 뽕맞은 사람같은 모습으로 방황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연기한 박현준은 화면발이 받쳐 주는 마스크와 더불어 알만한 사람의 기억에는 남아있으리라.

삐삐 밴드는 신문과 잡지 등 주류 미디어에도 자신들의 이름을 남겼다. 여기서 이들은 '펑크'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마케팅했다. 1970년대 후반 토킹 헤즈, XTC, B-52's를 주워들어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펑크라기 보다는 '뉴 웨이브'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이건 평론가의 습성일 뿐이다. '올드' 웨이브가 있어야 뉴 웨이브가 있지. 그런데 하다 보면 말이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올드 웨이브에 해당된다면 이른바 '정통 록'일 것이다. 평론가의 습성을 한번 더 들춘다면 정통 록이란 authentic rock의 한국판 번역어일테지. 옳거니 맞췄다. 나는 다시 기억을 떠올렸는데 앞에 언급한 드라마가 방영되던 무렵 같은 방송국의 쇼 프로그램에 박현준이 있던 밴드가 출연한 사실이 있었다. 밴드의 이름은 H2O였다. H2O의 음악은 뭐라고 설명하기 곤란한데, 당시에는 이런 밴드들을 모두 '헤비 메탈'이라고 불렀다. 헤비 메탈이야말로 정통 록이었고, 정통 록은 곧 헤비 메탈이었다. 이게 한국에만 특유한 것인지 그렇다고 해도 정도가 특히 심했는지 아닌지는 좀 검토를 요하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H2O로부터 삐삐밴드로'는 '메탈에서 펑크'로인가? 그게 맞다고 해도 한 밴드의 변신인지, 전체 씬(scene)의 변화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갑자기 나는 1980년대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씬을 더듬어 볼 필요를 느낀다. 하지만 나는 이 씬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소장하고 있던 비닐 LP레코드가 꽤 있었고, 때는 마침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역사'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필명을 날리던 인물들의 전성기였기에 정보를 얻기도 용이했다.

 

펑크 이전엔 뭐가 있었나?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언더그라운드라는 용어가 모호한 감은 있다. '언더그라운드가 아니라 언더브로드케스팅(underbroadcasting)이다'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런 용어법의 시시비비는 일단 무시하기로 하자. 또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언더그라운드 전반이 아니라 '록 언더그라운드'다. 록 음악에 대한 자의식을 가진 언더그라운드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록 음악'에 대한 자의식이 확립된 것은 헤비 메탈이 도입되면서부터다. 그 이전에 록 음악이라고 불릴 만한 음악들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 스스로 '우리는 록 밴드다'라고 말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의중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신중현, 산울림, 송골매, 윤수일 밴드 등은 모두 '그룹 사운드'라고 불렸고 본인들도 그 단어를 기피하지 않는다.

저렇게 '뜬' 사람들 말고 언더그라운드에서 대중성을 누렸던 들국화나 다섯 손가락까지도 '그룹 사운드'로 불렸다. 작년에 들국화의 재결합 공연을 갔다가 전인권이 '그룹 사운드'라는 말을 쓰는 걸 듣고 '아직도 저런 말을 쓰다니...'라고 속으로 투덜거렸던 일이 떠오른다. 이런 투덜거림은 그룹 사운드라는 단어가 '영국이나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어'가 아니라 '일본에서 만들어진 영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 나온 것이다. 나 역시 '일본식 조어는 경계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에 동감하는 대세를 따르기 때문이라서.

반면 헤비 메탈은 '그룹 사운드'가 아니었다. '그룹 사운드 송'은 '가요'의 하나였던 반면, 헤비 메탈은 그 이상이고자 했다. 또한 그룹 사운드는 아마추어였던 반면 헤비 메탈은 프로페셔널(리즘)을 지향했다. 헤비 메탈 밴드의 음악에 신중현, 산울림, 송골매, 들국화 등의 음악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런 전통을 자부심을 가지고 계승했다고 볼 수도 없다. 한국에서 헤비 메탈의 발원지가 어딘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역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고등학교'라는 장(場)을 설정하면 추가적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서울, 그 중에서도 강남 지역이 가장 활발했지만 다른 지역이라고 무풍지대는 아니었다. 내가 잘 몰라서 그렇지.

그런데 나같은 사람이 당시에 헤비 메탈을 '경시'했던 이유를 여기서 밝히기는 좀 그렇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라는 말이 이유가 될 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물론 헤비 메탈이 '경시받을 만한' 음악이라는 시건방진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의 경시는 다른 게 아니라 한국의 헤비 메탈이 '모방과 재현 단계'를 잘 넘어서지 못했다는 자의적 판단에 근거한다. 직접 본 것은 몇 번 안되지만 당시를 살았던 이들의 '편파적' 증언에 의하면 메탈 공연장에서는 그들만의 송가가 울려 퍼졌고 그 대부분은 '외국 곡'이었다.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로 시작하여 아이언 메이든과 모틀리 크루를 거쳐 메탈리카와 슬레이어로 레퍼토리가 바뀌긴 했지만. 달리 말해 '창작곡'이 연주되는 게 오히려 드문 경우였다. 청중들도 창작곡보다는 '카피곡'을 선호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들은 마치 '모방과 재현이 신성한 사명인 것처럼' 연주하고 있었다. 창작곡을 발표하는 경우도 영어 가사가 대부분이었고, 어찌 보면 이미 전세계적으로 검증이 끝난 오리지널곡에 비해 여러 모로 딸릴 수밖에 없는 건 당연했다.

물론 앞에 얘기했듯 나는 헤비 메탈을 1990년대 들어 몇 개의 음반으로 경험했을 뿐이다. 백두산, 시나위, H2O, 카리스마, 부활, 블랙 홀, 블랙 신드롬, 아발란쉬 등등. 내가 뒤늦게 이들의 음반을 구해 들었을 때 이들 대부분은 이미 해산한 상태였다. 듣는 사람의 젊음이 이미 지나간 뒤였기 때문에 고등학교때 딥 퍼플이나 블랙 사바스를 들을 때의 감흥을 재현하려고 했던 의도 자체가 무리였다. 그러던 차에 1993년 라디오에서는 거친 기타 사운드 위에 감미로운 멜로디를 가진 곡이 흘러 나와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부활의 <사랑할수록>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고음으로 '록 발라드(혹은 뽕 발라드)'를 열창하는 머리 긴 가수의 노래도 들을 수 있었다. <대답없는 너>라는 곡이었고 가수의 이름은 김종서였다. 그가 시나위와 부활과 카리스마를 오가면서 보컬리스트로 활동했다는 소문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 무렵 CD에 밀려 사라지기 시작하던 LP를 '떨이'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 건진 앨범들 중 하나인 시나위 4집의 커버에 적혀 있는 문구들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베이스 주자의 이름이 '서태지'라고 적힌 것을 봤다. 그랬구나. 이때를 전후하여 조금 떴던 최민수도 아발란쉬 출신이라든가 그전부터 떴던이승철이 부활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이전까지는 건성 들었지만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많은 발라드 가수들이 학창 시절 '한 메탈'했던 존재라는 사실도. 이승환과 신성우로 시작하여 김정민과 김경호와 김성면으로 이어지는 한국형 록 발라드의 찬란한 족보여! 헤비 메탈 공연장에서는 여전히 "Rock-will-never-die"를 외치고 있었지만 그곳 출신의 일부는 주류 대중음악계에서 록이 아닌 음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매스 미디어에서는 록이 아닌 음악(아니면 '음악 아닌 음악')을 '록 발라드'라는 범주로 선별적으로 포괄하였다. 서태지는? 이건 좀 다른 문제지만 이 글의 논지와 별 상관없는 문제이므로 다음에 얘기하자.

그래서 1990년대 전반기는 1980년대의 메탈 언더그라운드가 주류를 돌파한 시기라기 보다는 주류의 관습에 적응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삭제하고 있던 상태였다. 아마도 일반인들에게 '록'이나 '로커'의 이미지는 적응 과정을 통과한 메탈 생존자의 이미지일 것이다. 청바지 광고에 나온 신성우처럼 수려한 외모와 긴 머리를 하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이미지 말이다. 화려한 미디어의 조명발에 윤색된 '반항적이고 자유로운' 이미지 말이다. 솔직히 이 점은 내 눈에 거슬렸다. 일본 순정만화에 나오는 '로커'의 이미지도 취향이 아니거니와, 이들의 히트곡들 대부분이 '떠나간 여자에 대한 사랑'을 테마로 했다는 점도 내게는 영 와닿지 않았다.

 

또다른 주류에서의 록 스토리

솔로 가수가 아니더라도 그룹으로 나와 성공을 거두는 경우도 가끔씩 등장했다. 삐삐 밴드와 비슷한 시기에 신성우가 만든 지니(Geenie)와 걸(Girl)은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등장한 록 밴드'였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걸 그냥 '가요'로 들을 뿐이었다는 점이다. 본인들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먹고 살려면 별 수 있느냐'는 생각도 다분히 있었을 듯하다. 다른 대안이 없었으니까.

언더그라운드에서 메탈 밴드들은 계속 만들어졌지만 아무래도 전성기는 지나간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뭔가 돌파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록 발라드 가수' 말고 메탈 밴드로서의 자존심도 살리면서 주류에서도 성공을 거두는 길 말이다. 1990년대 전반기에 메탈 생존자들 중에서 '그룹'으로 명맥을 유지한 존재로는 넥스트(N.EX.T)와 크래쉬(Crash)가 있었다. <남행열차>를 리메이크하여 잠시 파란을 몰고 왔던 프로젝트 그룹 멍키헤드도 있었다. 넥스트의 음반들은 여섯 자리 수 넘게 판매되었고 크래쉬도 다섯 자리 수는 가볍게 넘었다. 음반에 담긴 사운드의 질도 1980년대보다 많이 나아졌다. '사운드'가 안나와서 그토록 애타했던 1980년대의 메탈 밴드들로서는 '드디어 제대로 된 록 음반'이라고 할만한 음반이 나온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성에 안차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아마도 1980년대에 뚝심으로 저변을 만들어 놓았던 메탈 언더그라운드의 저력이리라.

이들을 둘러싸고 메탈 매니아들 사이에는 논란이 꽤 있었다. 특히 넥스트는 리더인 신해철을 둘러싸고 설전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한국에서 '주류 록'이라는 게 성립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나고 보니 이들은 '돌파형'이라기 보다는 '종합형'이었다. 달리 말해 '1980년대 메탈 공동체의 숙원'을 주류의 일각에서 실현시켰다는 점은 있지만 그걸 넘어서 1990년대의 '새로운 흐름'이라고 보기는 좀 미진했다. 어쨌든 넥스트나 크래쉬를 인디펜던트의 선조로 보는 사람은 없다.

시간을 좀 건너뛰어보자. 1990년대 전반기 '한국에서의 록'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이벤트로는 1996년 여름 잠실에 있는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樂 made in Korea]가 있었다. 한 대기업 계열사에서 후원하여 치러진 연합 공연이었는데 이 날의 메인 밴드는 크래쉬와 넥스트, 그리고 재결성된 시나위였다. '인기는 넥스트가 가장 많았고, 반응은 크래쉬가 가장 좋았다'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잦은 멤버 교체에 시달리던 시나위는 인기와 반응 양면 모두에서 중용적이었고, 새로운 보컬 김바다를 맞이하여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보기에 따라선 '시류에 편승한은 너바나 워너비(wannabe)'로 비칠 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 공연에서 '새롭다'고 할 만한 존재는 배드 테이스트(Bad Taste)와 노이즈가든(Noizegarden)이었다. 다른 밴드들이 '정통'을 추구하는 느낌이 있었던 반면, 두 밴드는 '대안적'이고 '모던'한 느낌을 주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른 밴드들이 자기도취적이고 외향적인 분위기인 반면, 이들은 어둡고 내향적이었다. 노이즈가든은 4인조라는 표준 편성을 가지고 있었고, 배드 테이스트는 원종우의 '원맨 밴드'였다(이 날의 공연에서는 몇 명의 세션을 구해서 치렀다).

대략 이 정도로 1990년대 전반기의 '주류 록'의 상황을 정리해 두자. 여기서 원종우라는 인물에 종합해 보자. 지금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위 공연에서 들을 수 있듯 그는 연주력 뛰어난 기타리스트였다. 기타리스트의 실력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왈가왈부할 일이 많지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그가 '인디 음반'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때 인디라는 용어는 자가제작이라는 뜻이다. 부연하면 음반사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든 음반, 음반의 홍보를 위하여 머리와 의상을 치장할 필요 없는 음반이라는 뜻이다. 1996년 봄에서 여름 사이에 인디라는 용어는 이렇게 다가왔다. 묘한 것은 원종우가 만든 인디 음반이 'BMG 코리아'라는 다국적 음반기업의 한국 지사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선진국에 본사를 둔(BMG의 경우 독일) 다국적 음반사가 한국의 어떤 음반사보다 '인디'에 더 많은 관심을 갖다니. 물론 그 관심은 지속적인 것도 책임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한 번 내줘보고 어떻게 되나 지켜본 것에 가깝다. 어찌 되었든 '인디'라는 말이 서서히 퍼져나가게 만드는 데 원종우의 선구적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배드 테이스트와 노이즈가든의 출신을 추적해 보는 일로 시작하자.

 

사이버 밴드의 탄생(1)

삐삐 밴드가 등장하기 이전 '얼터너티브 록'을 표방하여 주류 진입을 시도한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신성우 3집을 말하는 건 아니다. 1994-5년 경 토마토, 뮤턴트, U & Me Blue, 이한철, 퓨어 등이 '얼터너티브 록'을 들고 나왔다. 그렇지만 이들의 '얼터너티브 록'은 본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외국에서 전파된 하나의 유행을 추종하는 것 정도로 인식되었다. 또한 언더그라운드에서의 오랜 라이브로 연주실력을 다진 것도 아니었고, 'PD 메이커 방식에 의한 음반 제작 → TV와 라디오 등 방송 홍보 → 소극장 라이브 공연'이라는 1980년대 이후의 음반제작 방식에서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 점에서 이들은 1997년 이후 등장하여 이들보다 나은 판매고를 기록한 주주 클럽, 레드 플러스, 아일랜드, 더 더 등의 밴드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조금 일찍 등장하여 상대적으로 더 실패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대안적인 '길'이 없는 상태에서 대안적 록을 연주하는 일의 어려움은 이들의 불운과 직결되었다. 이들 중 탄탄한 기본기와 작곡 능력을 가지고 있던 U & Me Blue가 해체의 비운을 맞이한 점은 아쉽다. 1980년대의 '동아기획 사운드'와 얼터너티브 록을 결합시켜낸 이한철의 데뷔 음반이 묻혀 버리고 아직도 그가 '방황'하고 있는 점도. 하긴 이한철과 고구마(권병준: 토마토의 보컬)가 1998년 이후의 인디 씬과 어느 정도 관련을 맺고 있기는 하다. 그러면 그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살펴보아야 할 듯하다. 방금 언급했던 원종우와 배드 테이스트로 돌아가 보자.

배드 테이스트가 다른 밴드들과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면 '기성의' 길을 밟지 않았다는 점이다. 배드 테이스트를 소개했던 미디어들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소개한 글들은 하나같이 원종우가 PC 통신 하이텔의 '언더그라운드 음악 동호회' 출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PC 통신'이라는 매체가 주류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해서 소수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과연 이 새로운 미디어가 '인디 음악'과 어떻게 관련을 맺을까에 대한 해명이 이 절의 논제다.

언더그라운드 음악 동호회('언더동')의 성격은 '음악 팬들의 모임'이었다. 한국에서는 '음악 매니아'라고 이름붙이는 게 의사소통이 더 편할 듯하다. 이름처럼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주로 듣는데, 대부분은 외국 음악이었다. 외국 음악을 만든 주체가 그곳에서도 언더그라운드인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 듯했다. 포크(및 포크 록), 아트 록, 헤비 메탈, 재즈 등의 분과가 있었고,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도 다루고 있었다. 나름대로 음악의 위계 서열을 가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음악을 '많이' 좋아하는 만큼 매니아 특유의 설전도 전개되고 있었다. 원종우는 부산에서 스쿨 밴드를 경험한 뒤 1980년대 말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1990년대 초부터 언더동을 결성하고 오랫 동안 이 모임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배드 테이스트는 이곳의 음악 취향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원종우는 이른바 '기타 속주'에도 능하지만, 들국화나 시인과 촌장 등 19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그룹으로부터 영향받은 서정적 멜로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인디의 '시스템'은 고사하고 '레이블'도 없는 상황에서 이 음반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지만. 불운한 선구자여.

언더동 인근에는 '메탈동'이라는 곳도 있었다. 언더동보다 회원 수가 더 많았고, 음악의 선택 폭은 언더동보다 '좁고 깊어' 보였다. 한마디로 '골수' 메탈 매니아들이 모인 곳이었다. 특이한 것은 이곳도 메탈이 아닌 록 음악도 다루고 있었는데 동호회의 이름이 '메탈' 동인 것은 앞에서 말한 한국에서 '진정한 록 = 메탈'이라는 등식 때문이리라. 뒤에 또하나의 통신 서버인 나우누리에 생긴 록 음악 동호회의 이름도 지금까지 '메탈 체인'이다.

메탈동에서 '한국 록/메탈' 게시판을 담당했던 인물이 노이즈가든의 기타 연주자이자 리더인 윤병주였다. 또한 노이즈가든 초기에 보컬을 맡았던 인물은 메탈동의 시삽을 역임했던 정재준이었다(음반 데뷔 이후에는 박건으로 교체). 따지고 보면 노이즈가든은 연배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크래쉬의 선배였다. 물론 음반이 늦게 나왔지만. 내가 이들을 본 것은 앞서 언급한 <<락 메이드 인 코리아>> 공연이 처음이므로 그때까지 이들의 활동은 다른 자료를 참고하라.1) 단지, 이들이 1994년 톰보이 록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만한 일이다.

노이즈가든은 멤버들의 나이가 20대 중반이 된 1996년 겨울에 신보를 냈다. 이 음반은 밴드의 데뷔 음반같지가 않았다. 음악은 블랙 사바스로부터 사운드가든에 이르는 무겁고 장중한 스타일이고, 그래서 베테랑 록 밴드의 3집 정도는 되어 보였다. 가사의 경우 데모 음반이나 라이브 공연에서는 영어로 노래 불렀지만 데뷔 음반은 한국어 가사로 되어 있다. 음반은 한마디로 훌륭했다. 사운드의 질이 뛰어났고, 작곡과 연주력 모두 탄탄했고, 무거우면서도 고루하지 않았다.

되돌아 본다면 배드 테이스트와 노이즈가든은 1980년대의 헤비 메탈 씬과 1990년대의 인디 록 씬 사이의 가교를 놓는 존재였고 '맏형'으로 추앙받을 만한 존재들이다. 그렇지만 배드 테이스트는 데뷔 음반을 발표한 뒤 간헐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다 마침내 해산의 비운을 맞이했고, 노이즈가든은 1998년 말 2집 <>를 발표했지만 최근에는 밴드 내부의 이견으로 시달리다가 급기야는 리더격이었던 윤병주가 탈퇴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이들이 확립한 음악으로부터 영향받은 동료나 후배들이 현재 인디 씬에서 다수인 것 같지도 않다. '유행이 지나서'라고 말하면 속편한 평이겠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볼 게 있다. 신중하게 한 가지만 지적하겠다.

두 밴드는 메탈 씬과는 감성 면에서는 차별적이었지만 프로페셔널한 음악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만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건 굳이 '메탈 씬과의 연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프로페셔널리즘은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의 지상과제이자 음악 매니아의 전반적 문화였다. 블루스 록이나 퓨전 재즈 등 능숙하고 탁월한 기량을 가지고 연주하는 음악이 감상자들의 취향이자 연주인들의 소망이었다. 문제는 이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인들, 이른바 '인프러스트럭처(infrastructure)'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악기 연주 기량, 음반 프로듀싱 테크닉, 라이브 공연의 노하우 등등. 예술가적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기술적, 재정적인 뒷받침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이를 위한 '시장'의 조건들은 척박하기만 했다. 대중적인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표현을 하는 '전업적'인 뮤지션을 지향한다는 것은 고단하고 피곤한 삶이 아닐 수 없고 이건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다.

원종우는 미국으로 음악 유학을 떠났다는 소문이 들린다. 훌륭한 연주인이 되어서 돌아오길. 그리고 윤병주는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고 있다. 사실 윤병주는 앞에서 한 '프로페셔널리즘 지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는 직업적 활동에 대해 충분한 대가가 없는 음악 시스템 뿐만 아니라 '전업'으로 음악을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음악인의 풍토가 자기와는 안 맞는다고 사석에서 밝히곤 했다. 동의한다! 단, 본인은 자기가 '프로'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한국에서 그만한 기타리스트를 본 적이 없다. 그가 '여가형 음악인'으로 음악 활동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사이버 밴드의 탄생(2)

'록 프로페셔널리즘'이란 불가능한가? 전업적인 뮤지션을 지향한다고 해도 '현재의 실정'에 맞는 길도 있을 수 있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이런 길이 보다 현실적이었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하이텔 메탈동 내에 '모던 록 소모임'이라는 좀 안 어울리는 이름의 분과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여기서 1990년대 후반 인디 씬의 맏형격이 되는 두 밴드가 탄생했다. 언니네 이발관과 델리 스파이스가 그들이다. 이들은 노이즈가든의 영향을 받아 음악을 시작했다. 이건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이석원(기타, 보컬)과 델리 스파이스의 리더 윤준호(베이스, 보컬)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추구한 음악 스타일은 노이즈가든이나 배드 테이스트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멤버들마다 편차는 있지만 이들은 '1980년대 팝 음악'을 듣고 자랐고 성장한 뒤에는 인디팝에 주목했다. 여기서 팝과 록이 다른 것이냐, 다르다면 뭐가 다르냐 이런 문제를 또 논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 이들이 특이한 것은 영미권의 대중음악에 영향받으면서 '정통 록'과 다른 스타일에 주목한 케이스라는 점이다. 이석원은 펫 숍 보이스(Pet Shop Boys)를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 바 있고, 윤준호는 듀런 듀런(Duran Duran)의 팬이라고 말한 바 있다. 펫 숍 보이스나 듀런 듀런은 1980년대의 메탈돔에서는 '싸구려 팝' 이상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또한 나름대로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는 면도 이전의 밴드들과는 달랐다. 이석원은 산울림을 비롯하여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의 '아마추어적'인 그룹 사운드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말을 몇 차례 공언한 바 있었는데, 여기에 어떤 인적 유대같은 건 없었다. 이는 산울림에 대한 재조명이 한창이던 시점에서 어떤 울림을 낳았다. 델리 스파이스의 또한명의 리더인 김민규(기타, 보컬) 역시 산울림의 영향과 더불어 하덕규(시인과 촌장), 조동익(어떤 날), 김창기(동물원) 등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했다. 물론 산울림의 '풋풋함'이 양자의 공집합이었다면, 나머지는 이들의 차이를 보여준다.

츨발은 이석원의 언니네 이발관이 빨랐다. 뛰어난 글빨과 입심 덕택에 통신 동호회에 일찍이 스타덤에 오른 그였고, 음악으로 데뷔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경로를 현명하게 활용했다. 매니아용 라디오 프로그램인 <전영혁의 음악세계>에 나가 '가상의 밴드'를 결성하는 '대담함'이 언니네 이발관의 시작이었는데, 그러니까 그 당시 언니네 이발관은 실존하지 않는 밴드였고 나중에 실체가 꾸려진 셈이다. 그가 했던 '뻥'을 두고 시비걸 수는 있겠지만, 그가 개척한 길이 '남들이 하지 않은 방식'이었다는 점은 시비의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주류 평론가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통해 그는 새로운 세대의 감성을 체현한 인물로 표상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설왕설래가 많았지만.

언니네 이발관은 1996년 말 데뷔 앨범 {언니네 이발관}을 발표했다. 석기시대라는 레이블(사실은 음반 소매점 이름이자 1인 제작자)이 제작하고 킹 레코드(지금은 신나라 레코드)라는 메이저 레이블을 통해 배급되는 음반이었다. 노이즈가든의 윤병주가 프로듀서로 참여하였고, 제작 과정에서도 충분한 자율성이 보장되었다. '아마추어적 풋풋함'으로 상징되는 이 음반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부업 뮤지션으로는 만족스러운 수준이지만, 전업 뮤지션으로는 다소 불만스러운 수준이었다. 이런 모호함이 한국에서 '음악을 계속 하는 것'에 힘든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절감하는 것은 몇 년 뒤의 일이다.

언니네 이발관의 음반이 나온 지 한달 쯤 뒤 나는 홍대앞의 클럽인 '푸른굴 양식장(현 마스터플랜)'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언니네 이발관과 델리 스파이스가 출연하는 공연이 치러지고 있었다. 그걸 보고 나는 '음반도 발매하지 않은' 밴드를 중앙일간지에 이렇게 소개했다(그래서 '신현준의 어쩌구 저쩌구'하는 코너는 두 번 연재된 채 '개편'되었다). 델리 스파이스는 '데모를 들고 음반사를 알아보는 과정'의 어려움을 겪은 밴드다. 어떤 대기업 음반사와 계약을 알아보았지만 대기업 특유의 '질질 끄는' 관행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이들은 '언더그라운드의 컬트'가 되어 있던 것이다. 나는 그걸 이제까지의 프로페셔널한 뮤지션십과는 다른 방식의 뮤지션십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음악은 "유약해 보이지만 강인했고, 부드러워 보였지만 거칠었다" 등등의 수사를 요한다. 양면을 모두 지닌 아름다운 음악이고, 대중적이면서도 '열렬한 소수'의 취향에 부합하는 묘한 것이었다.

델리 스파이스는 그후 '메이저' 음반사인 뮤직 디자인과 계약하여 1997년과 1999년 두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그 전까지 이들은 주로 영어 가사로 연주했는데 그때는 마치 '브리티시 인디 밴드'같았다. 하지만 한국어 가사는 단지 '개사'라고 보기에는 시작인 아름다움까지 갖춘 것이었다. 1집과 2집은 어느 정도의 판매고도 달성했고 그래서 그들이 경력을 쌓아나가는 과정은 '승승장구'는 아니라도 하나의 '돌파'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1집과 2집의 윤준호와 김민규는 최근 라디오 방송의 DJ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노이즈가든과 배드 테이스트까지 포함하여 총괄해 보자. 지금 시점에서 던질 질문은 '인디 음반', '인디 밴드'가 도대체 뭔가라는 것이다. 이들 '사이버 밴드 4인방'은 인디 밴드라고 부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그들은 공중파를 통해 '스타'가 되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그 점에서 인디의 태도(attitude)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독자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목적의식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 결과 음반 제작 과정에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확립된 이른바 'PD 메이커' 방식(노이즈가든과 언니네 이발관의 경우)을 따르거나 더 오래된 방식인 전속 계약(델리 스파이스의 경우)을 맺었다. 이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무언가 과도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앞서 말한 델리 스파이스의 묘함은 달리 말하면 '어정쩡함'이 될 수도 있는데, 조금 그런 면이 있다. 계약관계는 메이저급이지만, 활동방식은 인디급인 그런 어중간함 말이다.

원종우의 음반은 인디 음반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인디 레이블 없는 인디 음반'은 모순되어 보인다. 당시 한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현재의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대안으로서 '독립 기획사(이게 인디 레이블이다)'의 설립을 제시하면서, 1인 제작 방식은 그 전단계의 과도적 전략이라고 밝혔다. 그의 말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실현되지 못했다. 인디의 신조가 '너 스스로 해라(DIY: Do It Yourself)'라고 할 때 당시의 시스템에서는 음반 제작의 DIY는 실현될 수도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좀 묘연해진다. 제작만이 아니라 배급과 유통의 '시스템'은 어떻게 확립될 수 있을까.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 또하나의 길일 수 있을까?

 

드럭에 중독된 펑크 키드들

1996년 가을 서울의 몇 군데 대학에서는 <인디펜던트 록 페스티벌 소란 '96>이라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를 주최한 사람은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alt.virus라는 '느슨한 음악평론 동인'이었다. 길게 말하면 자화자찬밖에 안되겠지만 워낙 초라한 행사라서 길게 말할 건덕지도 별로 없다. 야외 페스티벌이라는 형식을 빌린 인디 밴드들의 연합 공연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반화된' 현상이었다. 소란도 그 중의 하나.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배드 테이스트와 델리 스파이스도 출연하여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 행사는 '드럭'이라는 클럽에 소속된 밴드들을 위한 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뭐니뭐니 해도 드럭은 1990년대 인디 씬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탄생지였다. TV 중심의 주류와 대비되는 인디의 '라이브 문화'는 페스티벌 이전에 클럽에서 먼저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1995년 가을로 기억된다. 이미 30줄도 훨씬 넘어가던 나는 그때 홍대앞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별볼일 없는 인물들 중의 하나였다. 얼트 바이러스(alt.virus)는 당시 존재하고 있던 '음악 동호회'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소닉 유스, 허스커 두, 사운드가든, 니르바나 등 당시로서는 매우매우 새롭고 경이로왔던 미국의 '얼터너티브' 음악을 듣고 '썰' 풀다가 그것도 공허해지면 한국인들의 영원한 여가 수단인 '술'을 찾아 시내 거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홍대앞에 '라이브 클럽'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건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처음 찾아간 곳이 왜 하필이면 '드럭'이라는 곳이었는지는 지금도 궁금한 일이다. 아마도 '펑크 클럽'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한 1년 뒤 쓴 어떤 글에서 처음 드럭을 찾아갔을 때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지금도 생각에 큰 변화는 없으니 좀 길지만 인용해보자.

홍익대학교 정문에서 극동방송국 쪽으로 걸어가다가 다소 오르막길이 나올 무렵 왼쪽 골목을 쳐다 보면 클래쉬의 <<런던 콜링>> 앨범 커버가 그려 있고 Alternative Bar라는 글씨가 써 있는 광고판을 볼 수 있다. 그곳 건물의 지하실이 펑크 클럽이자 인디 레이블인 드럭이다. 필자가 이 클럽과 조우한 날은 1995년 가을의 어느 토요일 저녁이었다. 그 날은 '병아리 가요평론가'였던 필자가 평론 활동을 위해 급조한 모임 alt.virus의 정규 모임, 그러니까 요즈음 통신 동호회 용어를 사용하면 '음감회' 비슷한 것을 마치고, '술이나 먹지'하는 마음으로 홍대앞 부근을 어슬렁거릴 때였다. 그러다가 한 시커(seeker)의 레이다망에 클럽 드럭이 걸렸다.

드럭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계단 우측은 벽이 있지만 좌측에는 난간이 없다. 발을 헛디디면 굴러 떨어질 판이다. 계단 위에 깔린 빨간색의 카페트는 무언가 질퍽질퍽해 보이고, 여기저기 더럽혀져 있고 담배로 지져진 자국이 눈에 띤다. 벽에는 스프레이와 매직으로 쓴 낙서가 어지러이 적혀 있다. 처음 오는 사람들은 그 낯선 분위기에 긴장한 가슴을 쓸어내려야 한다.

계단을 내려와 드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육중한 철문을 열어야 한다. 문을 열어주지 않고 막는 사람은 없어도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는 자연스럽지 않다. 그리고 문을 열면 입구 왼쪽으로 간략한 판매대가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무대가 있었다. 그 사이에는 마치 '드럭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심사를 가진 듯한 스무명 안팎의 젊은애들이 지랄을 해대고 있었다. 무대에서는 조그만 체구의 4인조 밴드가 있었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밴드가 크라잉 너트(Crying Nut)였다. 부라보콘 선전에 '말달리자'라고 소리지는 애들 말이다).

보컬은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발음'을 하고 있었고, 연주자들은 연주를 하는 게 아니라 소음을 내고 있었다. 가장 그로테스크해 보였던 것은 앰프 밑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제 소주 박스, 그리고 난타를 거듭하여 흉하게 일그러진 하이해트 심벌이었다.

이런 곳을 만든 사람이 나보다 더 '아저씨'같이 생긴 사람임을 알고는 더욱 놀라왔다. 이런 인상과 더불어 지금도 기억나는 건 드럭 특유의 '냄새'다. 동물들이 배설물로 자신의 영토를 표시하는 듯한 그 냄새는 지금도 상상만 하면 떠오른다. 이런 환경 속에서 크라잉 너트, 옐로 키친, 벤치, 리본 핑크, 갈매기, 노 브레인 등의 밴드들이 속속 결성되고 있었다. 드럭은 여러 클럽들 중의 하나였지만 가끔씩 라이브 무대를 갖는 다른 클럽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이건 일종의 연습실이자, 연주공간이자, 생활공간이자, 공동체였다. 또한 '드럭 밴드'들은 여건이 갖추어질 때 가끔씩 라이브 공연을 갖는 선배 밴드들과 달랐다. 그들은 일상 생활처럼 음악을 연주했다. 음악을 연주하는 애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드럭을 찾아왔다가 드럭에 '중독'된 (물론 드럭에는 마약이 없다) 애들은 '드럭 키드'가 되어 뮤지션들과 동고동락했다.

드럭 밴드들은 서두에서 언급한 베테랑 뮤지션들에게는 조카뻘쯤 되고, 조금 전에 언급한 '통신계 출신 뮤지션들'에게는 막내동생뻘 쯤 되는 연배의 '애들'이었다(가장 나이많은 뮤지션이 1974년 생으로 기억된다). 드럭은 '펑크'에 관한 담론의 중심지이자 '견학지'가 되었고, 여기에 펑크는 '신세대 매니아의 음악'이라는 의미가 추가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펑크 밴드는 곧 '드럭 밴드'였고, 인디 밴드는 펑크 밴드였다. 삐삐 밴드의 펑크는? 크라잉 너트의 한 곡의 제목은 였는데(뒤에 라고 제목을 바꾼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넌 이름을 바꾸지 / 새로운 걸 볼 때마다 / 넌 이름을 바꾸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지 / 난 이곳에 머문다 원하는 건 많지만 / 난 여기 난 펑크 로커 / 내가 개지랄 한다고 너희를 위해 하는 건 아냐". 후렴은 "분노한다 / 열 받는다 / 신경 끄고 / 이발 해라"2)다. 드럭 밴드들은 삐삐 밴드의 '펑크'가 익명의 대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클럽 드럭의 무용담은 음악 잡지나 단행본 여기저기서 소개되었고 이 책의 다른 글들도 다룰 것이므로 생략하자. 드럭이 '홍대앞 클럽 씬'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주류 미디어의 기자들이 '홍대앞 클럽'을 주목하게 된 것에도 드럭의 역할은 크리라. 드럭의 '개지랄'은 클럽 안에서 뿐만 아니라 거리로 진출하기도 했다. 드럭은 1996년 여름 홍대앞과 명동의 거리에서 '스트리트 펑크 쇼'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괴상하게 염색한 머리카락을 한 애들이 스테이지 다이빙이나 모싱(moshing), 포고(pogo) 등을 선보였다. 아마도 '최초의 충격'이라고 할만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가을에는 '진짜' 인디 음반인 {아워 네이션 vol.1}을 발표했다. 녹음을 몇 일만에 후딱 해치워버린 이 음반은 한국에서 인디 록을 논할 때 '기념비적' 음반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드럭을 둘러싼 논란'이 없지는 않았다. 주류 미디어에서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왔다갔다 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렇게 펑크를 하나의 '패션'이나 유행으로 만드는 것을 꼴사납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드럭 밴드들이 다른 밴드들과 잘 '융화'되지 못했다. 음반 제목에서 느껴지듯 드럭 밴드들은 '우리들만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골수 집단이었다. 몇번의 연합공연에서 사운드와 연주의 질을 중시하는 '보통'의 밴드들에게 '기자재를 함부로 다루는' 드럭 밴드들의 태도는 못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다 하더라도 '드럭의 충격' 이후 '클럽 밴드'라는 용어가 한 시기를 풍미했다. 그런데 드럭만 있었는가?

1996년 경부터 라이브 클럽들이 속속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클럽 밴드는 '인디 밴드'와 잠재적으로 등치되었다. 인디 밴드는 음반을 자가제작하는 존재 이전에 클럽에서 '라이브'로 청중과 만나는 존재라는 인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장르가 무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롤링 스톤스'에서 연주하는 하드 록 스타일이든(마루, 프리다 칼로, 존 도우 등) , '하드코어'에서 연주하는 무자비한 스타일이든(삼청교육대, 닥터코어 911, 쇠파이프 등), '재머스'에서 연주하는 훵키한 스타일이든(청년단체, 내 귀에 도청장치, 고스락), '스팽글'에서 연주하는 '노이지'한 밴드든(97년 이후의 옐로 키친, 애스트로노이즈 등)과 '마스터플랜'에서 연주하는 '모던'한 스타일이든(델리 스파이스, 코스모스 등), '빵'에서 연주하는 '아마추어리쉬'한 스타일이든 모두 '클럽 밴드'로 불렸다. 재머스의 경우는 1997년 드럭에 뒤이어 두 번째 클럽 소속 밴드들의 컴필레이션 음반인 {록, 닭의 욹음소리}를 발매했다.

그런데 이들은 왜 클럽 밴드가 되고 싶어했을까. 클럽의 어려운 사정은 이들의 연주 행위에 대해 충분한 금전적 대가를 지급하지 못했다. 이건 지금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인식은 클럽이 경제적 업소라기 보다는 문화적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클럽 밴드들은 "그냥"이라든가 "좋아서 한다"는 말로 모든 질문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들의 행위에 과도한 문화적 해석을 부여하는 것도 마뜩찮아 했다. 그렇다면 뭐가 좋은 것일까. 전기 기타를 치거나 드럼을 두드리는 일이 주는 물리적 쾌락이 전부 다일까. 이건 1970년대의 아마추어 그룹 사운드 시절부터 있어왔던 종류의 쾌락이다. 모방의 즐거움? 자기가 좋아하는 외국의 밴드의 사운드랑 비슷한 사운드를 낼 수 있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1980년대 헤비 메탈 씬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즐거움이다. 그렇다면 달라진 것은 '유행'이 바뀌었다는 것밖에 없는가. 오래된 록 음악 대신 '대안적' 록 음악들, 예를 들어 그런지, 네오 펑크, 하드코어, 브릿팝, 슈게이징, 슬로코어 등등의 유행 말이다.

당사자가 아니라서 나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쩌면 이유를 몰라도 상관없을 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색다른 취향이 발생했고 그 취향의 주체들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싫어한다는 점이다. '설명하기 싫어한다'는 것은 중요한 특징일 수 있다. 대부분의 클럽 밴드들은 과묵하고 사교성이 없으며, 경제적 문제나 장래 문제에 무신경하다. 내가 제일 처음 클럽 밴드 멤버로부터 들은 말은 "우리들을 '관찰'하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1997년으로 접어들면서 이전 시기와 달라진 것은 클럽들 사이에 연대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이들의 목소리가 '집단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앞서 본 델리 스파이스, 노이즈가든, 언니네 이발관, 델리 스파이스 등도 클럽 씬에서 활동했지만 이들의 경우는 '개별 밴드와 그들의 팬'이라는 관계가 중심적이었다. 그렇지만 1997년부터는 밴드가 아니라 클럽, 나아가 개별 클럽이 아니라 클럽 '씬 전체'가 문제였다. 주류 대중음악에 대한 대안을 추구한다면, 아니 이런 거창한 말이 아니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이 판(=홍대 앞 클럽 판)과 관계를 맺으며 활동해 나가는 게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1997년 초 개방적 클럽 연대라는 단체가 만들어졌고, 이 단체에서는 클럽을 순회하는 밴드 연합 공연인 <땅밑달리기>를 매월 개최했다.

 

이합집산 1997

지하와는 조금 다른 세계 이야기를 해보자. 1997년 주류 음악계에서 록 음악은 어떤 모습으로 표상되었는가? 1996년 봄 서태지가 사라진 다음 '록'을 조금 띄우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넥스트, 신성우, 강산에, 윤도현 등의 모습이 종종 등장했고, 신중현 트리뷰트 공연을 전후하여 EP를 발표한 시나위와 모습도 가끔 TV에 등장했다. 이런 베테랑 밴드들 말고는? 앞서 언급한 주주 클럽, 레드 플러스, 아일랜드, 더 더, 패닉 등 기성 시스템 하에서 만들어진 밴드들도 TV와 라디오에 '10대 댄스 그룹들 사이에 간간이' 등장했다. 이들과는 좀 다르게 클럽 씬과 관련을 맺으며 오버로 진출한 케이스도 있었다. <Hey, Hey, Hey>를 TV와 라디오 차트에 올려놓은 자우림이 대표적이고, <챠우챠우>를 라디오 방송에 올려놓은 델리 스파이스도 선전하고 있었다.

이들 중 델리 스파이스는 현재도 인디 씬과 '정서적으로' 연대하고 있지만, 자우림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들을 '인디 밴드'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도 활동 초기에 클럽 씬과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자우림의 전신이 <소란 96>에 C.C.R.(Choco Cream Rolls)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밴드였다는 점은 지금은 거의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다. 물론 그때는 밴드의 핵심인 여성 싱어송라이터 김윤아가 없었다. 그녀가 가입한 뒤 미운오리라는 이름으로 잠시 활동하던 이 밴드는 자우림으로 이름을 최종 확정하고 '블루 데빌'이라는 클럽에서 연주해 오고 있었다.

한마디로 자우림은 홍대앞 클럽 출신으로 최초로 '셀링 아웃'을 단행한 케이스일 것이다. 뭐 '욕'을 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잘 하고 있으니까. "저는 단순하게 생각해요.제가 발언하는 것은 굉장히 개인적인 것이고,그냥 내 생각을 말하는 게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죠]"라는 소신도 있으니.3) 그리고 현재의 판세에 대한 다음같은 지적까지. "록이 주류라고 해도 문제예요.그러면 역시 껍데기 뿐인 음악이 대거 쏟아질 거고.문제는 음악의 다양성이죠.우리 공연에 오는 팬들을 보면 무슨 록 스피릿이다 저항이다 이런 것 생각하고 오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냥 취하고 싶은 사람들,몰입하고 싶은 사람들,다시 말해 우리 밴드 성향과 비슷한 사람들이 와서 즐기고 간다는 거죠.4)

자우림의 '언더' 시절의 모습을 보기 위해 1997년 6월 27일 홍대 앞의 '블루 데빌'이라는 클럽으로 가보자. 그리 오래 되지도 않은 시점이다. 이 날 '블루 데빌'에서는 내가 본 클럽 공연 중에서는 가장 많은 관객이 몰렸다. '블루 데빌'은 홍대 앞의 다른 클럽들과는 조금 달랐다. 다른 클럽이 있는 후줄근한 건물들과는 달리 유수한 출판사 건물에 있었고, 무대도 넓고 음향도 상대적으로 수준급이었다. 또한 무대 뒤에는 지미 헨드릭스의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어서 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다. 가장 비슷한 클럽이라면 인근에 위치한 프리 버드(Free Bird)일 것이다(이곳에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누드 사진이 걸려 있다). 일도양단한다면 이곳은 펑크보다는 '히피'에 가까운 취향이었다. 이곳의 여주인이 <전인권 클럽>을 운영하던 사람이라는 정보를 알면 그럴 듯한 말이다. 이곳에서는 U & Me Blue, 신윤철(현재 원더버드의 기타리스트), 포커 페이스(할리퀸의 전신), 임현정 등 클럽 밴드보다는 조금 나이들고 따라서 프로페셔널한 밴드들이 연주했다. 이들의 연주 역시 즉흥 잼을 즐겨하는 등 '1960년대'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자우림도 이곳에서 몇 개월 동안 연주해 왔다.

그 날 블루 데빌에서는 '개클련'라는 이름의 단체가 주최하는 월례행사인 '땅밑 달리기'라는 릴레이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개클련이란 '개방적 클럽 연대'의 약자이고 홍대앞 라이브 클럽들 사이의 연대 기구였다. 연대는 그리 느슨하지도 않고 그리 긴밀하지도 않았는데, 블루 데빌처럼 속성이 조금 다른 클럽도 여기 가담한 것은 '느슨함'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개클련의 일원이 된 블루 데빌에서 땅밑달리기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었다. 초반에 나온 자우림은 조금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연주했는데 그건 아마도 청중의 주류를 이루었던 '펑크 키드'들이 자우림의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 듯했다. 옐로 키친은 특유의 시끄럽고도 몽환적인 연주를 펼쳤고 크라잉 너트는 '달리자 펑크'로 난리굿을 벌였고,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삐삐 롱 스타킹이었다. 삐삐 롱 스타킹은 해체된 삐삐 밴드의 두 멤버인 강기영과 박현준이 토마토 출신의 권병준을 영입하여 만든 밴드다. 이들은 그해 2월 15일 TV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나가 '손가락을 치켜 들고' 카메라에 침을 뱉는 불경스러운 해프닝을 벌여 '전방송 1년간 출연 금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 뒤 이들은 내부 문제도 겹쳐서 해체를 선언한 상태였다. 이 날 삐삐 롱 스타킹의 마지막 연주는 훌륭했다. 보컬이 잘 들리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이 날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가진 밴드들이 정서적으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고, 상이한 세대를 관통하는 '어떤 에토스'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의 베테랑인 한영애도 '크라잉 너트의 팬'을 자처하면서 이 날 클럽을 찾았다. 침소봉대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내게는 상징적으로 보였다. 이날 모인 사람들에게 삐삐 롱 스타킹의 멤버들은 이후 '클럽'이나 '인디'와 어느 식으로든 관련을 맺을 것이라는 예감을 주었다. 예감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뭉치기 음반의 시절

1997년의 암중모색은 이합집산을 동반했다. 삐삐롱 스타킹의 멤버들처럼 '메이저'에 속한 일부의 뮤지션들이 인디와 손을 잡거나 아예 인디로 '하방'했고, 자우림의 경우처럼 '언더'에 속하는 뮤지션들 일부는 메이저로 입성했다. 이런 이합집산은 '컴필레이션 음반'이라는 형태로 자기 색깔들을 드러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땅밑달리기에 모인 이들은 각자 다양한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이든' 뮤지션의 경우 삐삐롱스타킹은 동료인 김형태(황신혜 밴드), 강산에, 황보령, 이상은, 백현진(어어부 밴드) 등과 더불어 도시락(圖詩樂) 레이블을 만들어 {도시락 특공대}라는 컴필레이션 음반을 냈다. 이때 이후 도시락 레이블의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여기 모인 인물들은 나름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이 컴필레이션 음반은 황신혜 밴드와 어어부 밴드라는 특이한 밴드의 존재로 인해 더욱 주목받았다.

'30대 개구장이'이자 미술가인 김형태가 이끄는 황신혜 밴드는 삐삐 밴드(및 삐삐 롱 스타킹)보다 더욱 언더그라운드적이고 '키치'적이었고 이미 'PD 메이킹' 방식으로 데뷔 음반 {萬病通治}를 발매한 상태였다. 김형태 역시 '통신족'에 속하는데, PC 통신 하이텔의 [산울림 팬클럽]을 통해 특유의 익살과 해학을 담은 글을 통해 회자되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가 통신에 올린 '강혼과의 인터뷰'는 '록 스피릿'을 주장하던 평론가 강헌의 입장을 패러디한 것으로 유명하다. 황신혜 밴드는 1996년부터는 라이브 공연을 통해 주류 미디어로부터도 주목을 받았고, 일본과 한국의 클럽을 순회하는 공연도 조직했다.

이들의 후배이자 동료인 어어부 밴드는 더욱 아방가르드적이었는데, 특히 촌스럽고 상투적이고 '한국적'인 것의 부조리함을 초현실주의적이고 아이러닉한 이미지와 메시지로 표현하는 데 독보적이었다. 이들의 라이브 공연 공간은 '홍대앞 라이브 클럽'에 국한되지 않았고, 공연 내용도 퍼포먼스와 전시를 혼합한 독특한 것이었다. {개, 럭키스타}는 황신혜 밴드와 더불어 이들을 '클럽 밴드'라고 못막기는 힘들지만 특이한 음악성으로 인디 음악계의 내실을 풍요롭게 만들었고, 당시 절정을 이루었던 '주류 미디어에서의 인디 씬 소개'에도 보다 많은 뉴스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한편 조금 아래 연배의 음악인들도 발빠르게 움직임을 보였다. 삐삐롱 스타킹에서 보컬을 맡았던 고구마는 토마토 시절의 선배이자 동료였던 성기완과 더불어 강아지 레이블을 만들었다. 레이블 설립을 전후해 발표한 {One Day Tours}는 '레이블 주체의 컴필레이션 앨범'으로서는 최초일 것이다. 이 음반에서는 뒤에 강아지 레이블을 통해 음반을 발표하게 되는 밴드들이 참여했다. 드럭에서 나와 새로운 사운드 실험을 시작한 옐로 키친, 옐로 키친보다 더욱 실험적이고 노이지한 퓨어디지틀사일런스(당시에는 애스트로노이즈라는 1인 프로젝트로 참여), 기타 밴드가 아니라 힙합 듀오인 갱톨릭 등의 트랙이 특히 돋보였다.

이렇듯 1997년의 이합집산은 클럽이나 레이블을 중심으로 컴필레이션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내었다. 앞서 언급했듯 클럽 재머스는 {One Day Tours}가 나온 지 한 달 뒤인 8월에 앞서 언급한 컴필레이션 음반 {록, 닭의 울음소리}를 발표했다. 클럽으로는 하드코어, 빵 등의 음반이, 레이블로는 라디오와 디플라워 등이 해를 넘긴 뒤에 결실을 맺었다. 그래서 인디의 1997년을 달리 표현한다면 '컴필레이션 음반'의 시기였다. 땅밑 달리기 행사가 클럽과 레이블 사이의 연대, 즉 '뭉쳐야 산다'는 인식의 소산이었다면, '컴필레이션 음반'의 발매는 인디 씬 전체의 뭉침 속에서도 개별 클럽과 레이블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가지려는 행동의 일환이었다.

이런 각개약진이 진행되는 와중에 대부분의 '나이 어린' 클럽 밴드들은 1997년 후반 '오디션'이란 걸 보게 되었다. 주최측은 '레이블 인디'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앞서 본 도시락의 경우는 나름대로 이제까지 쌓아온 경력과 '연줄'이 있는 경우였고, 강아지도 '어느 정도는' 그랬다. 즉, 주류는 아니더라도 기성의 시스템과 어느 정도의 관련을 맺으면서 일해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경우였다. 단적인 예로 도시락 레이블의 컴필레이션 음반과 황신혜 밴드의 음반은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메카'인 동아기획에서 발매되었다. 반면 아무런 '빽'이 없는 클럽 밴드들 중에서 '음반'을 발매하고 싶은 사람들은 레이블 인디로 몰려들었다. '레이블 인디'가 만들어진 것은 인디라는 단어가 음반의 자가 제작 뿐만 아니라 음반의 독자적 배급까지 의미한다는 인식의 산물이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예술적 자립성 뿐만 아니라 경제적 자립성을 갖추려는 시도였다.

레이블의 고유 이름을 '인디'라고 만들어서 '인디 레이블'이라는 일반명사와 혼동시켜 의사소통의 장애를 주었다는 점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레이블 인디가 만들어지면서 이제 인디 밴드는 단지 '클럽 밴드' 이상의 의미를 가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니까.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음반을 자가제작하는 것은 물론 배급도 주류의 배급망 외부에서 배급하는 존재'라는 인디 밴드의 '전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셈이다. 그래서 인디는 이제 좀 복잡한 개념이 되어 버렸다. 범(凡)인디 속에 골수 인디가 따로 있었다. 그해 말 정동 문화체육관에서는 <정축년 독립만세사건>이라는 인디 록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이 페스티벌은 범(凡)인디의 축제가 아니라 클럽에서 오랜 동안 '바닥에서 기어온' 밴드들 그리고 그들의 팬들의 축제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인디 록 페스티벌의 '평균적' 청중 수에도 불구하고 열기만큼은 후끈했다. 인디의 원년(元年)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 그러나 이와 동시에 'IMF 구제금융'이라는 국난(國亂)도 동시에 발생했다. 재수가 없으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레이블 인디, 그리고 제 발로 서기

IMF 구제금융이라는 험난한 시기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1998년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인디 원년이라고 부를 만하다. 무엇보다 '독립 배급망'의 주축이 되는 레이블 인디가 본격적으로 음반을 발매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개시했다. 레이블 인디는 1998년 한 해 동안 열 개가 넘는 타이틀의 음반을 발표하여, 인디 씬의 구심이자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인디는 '클럽' 뿐만 아니라 '레이블'과 등치되기 시작했다. 드럭과 재머스처럼(뒤에는 빵과 마스터플랜도 가담) 클럽의 명칭을 곧바로 레이블의 이름으로 만들어서 '클럽 사운드'를 '레이블 사운드'로 확장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클럽과는 별도의 레이블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강아지, 라디오, 카바레, 디플라워 등의 인디 레이블이 그들이다. 레이블 인디가 독립적 네트워크의 구심격이었다면, 여타 레이블들은 각자의 독자적인 '레이블 사운드'의 가능성을 모색했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 인디 밴드를 정의하기는 더욱 쉬워졌다. '인디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매하면 인디 밴드'였다. 인디 밴드들은 '클럽에서 자신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을 위해 연주하는 존재'에 머물지 않고 '스튜디오 레코딩'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인디 밴드를 접하는 방법에 클럽을 찾아가는 것 외에 음반을 사서 듣는 일도 추가된 셈이다.

그런데 인디 음반은 '어떤' 음반인가? 음반의 제작과 유통 등 경제적 측면에서 정의하기는 쉽지만 내용물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즉, 그 주인공은 인디 밴드는 '어떤' 음악을 담았는가? 단칼에 몇 마디로 정리하기는 힘들다. 일단 과거와 비교하면서 말해보자. 1990년대 인디 밴드들이 1980년대의 '출중한 연주력을 갖추었던 선배 밴드들'보다 진일보한 점이 있다면, 처음부터 '카피곡(정확한 용어는 커버곡)'이 아니라 '자작곡' 중심으로 연주했다는 점이다. 물론 클럽에서 카피곡을 연주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그게 '중심'은 아니었다.

이런 자작곡이 충분한 '오리지낼리티'를 갖췄는가는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인디 밴드들은 1990년대 초 미국에서 너바나 등이 선도한 '얼터너티브 록(정확히 말하면 그런지 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직후 등장한 그린 데이(Green Day) 풍의 '네오 펑크(저쪽 용어는 뉴 펑크 팝)'로부터도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드럭에서 1995년에 처음 열었던 라이브 공연, 따라서 최초의 인디 밴드 공연의 제목이 '커트 코베인 사망 1주기 추모 공연'이었다는 사실이 그 영향력의 일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면, 영향의 '정도'는 1997년 9월 범(凡) 인디계 밴드들이 연합하여 <>라는 트리뷰트 앨범을 만든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음반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국내의 여러 밴드들이 너바나의 원곡을 직접 연주한 것이다. 개중에는 너바나의 레코딩과 비슷한 사운드를 추구한 경우(예를 들어 위퍼)부터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많은 변형을 가한 경우(예를 들어 언니네 이발관)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영향력의 정도는 알 수 있지만 영향력이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는 불분명하다. 어쨌거나 이건 자작곡 음반이 아니라 트리뷰트 음반이었다. 과연 자작곡을 레코딩한 인디 음반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클럽과 스튜디오가 전혀 다른 공간이라는 점이다. 현재의 클럽에서는 사운드가 그렇게 잘 나오지 않는다. 음반을 듣는 것보다 못하다. 그래서 인디 음반 제작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클럽에서 라이브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실제로 톤을 잡고 할 때의 차이들을 많이 느꼈다. 개개인이나 팀 별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현격히 느낀 편이다.... 음반 낸 것 중에 평균적으로 어떤 것은 좋다고 평가받을 거라고 했을 때 좋게 평가받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다. 어떤 것은 녹음 잘 되었다고 밴드나 우리나 만족했는데, 찬반양론이 심한 음반도 있었고, 우리는 내야 하나 말아야하나 하고 냈는데 너무 좋다는 얘기를 들으면 당혹스럽다. 이런 편차가 많았다" 5)

결국 이런 문제는 인디 음반의 '사운드의 질의 기준'이라는 문제를 던졌다. 사운드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좀 골치아픈 문제다. '들어서 좋으면 좋은 것'이라는 동어반복의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솔직히 말해도 좋을 지 모르지만, 대다수의 인디 음반들은 자신들이 전범으로 삼은 영미권 밴드들의 사운드와 비슷한 사운드를 내고 싶어 한 듯하다. 코코어는 너바나 등의 그런지 밴드를, 고스락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등 훵키한 스타일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를, 프리다 칼로는 70년대의 하드록 밴드를, 오딘은 90년대의 블랙 메틀 밴드를, 마루는 (국내의) 윤도현 밴드를 각각 전범으로 삼은 것처럼 들린다. 이런 말이 '인디 밴드들은 모방 단계에 머물고 있다'라든가, '인디 밴드들은 외국 트렌드의 추종자들이다'라고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몇몇 밴드들은 모방의 차원은 넘어서 진정한 자기표현의 단계에 이른 것들도 많았다. 문제는 이들이 레코딩의 과정을 통제할 정도의 경험이 없다는 점, 그리고 이들을 '조련'하여 레코딩 아티스트로 육성하는 노하우가 아직은 부족했다는 점이다. 처음에 하는 일 치고 시행착오 없는 일은 없겠지만 아쉬운 점이다. 나아가 데모 테이프라도 광범하게 유통된 다음 씬 내부의 평가를 거쳐 정식 레코딩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충분히 밟은 것 같지 않다는 뒤늦은 생각도 하게 된다.

조금 더 하대하자면 영미권 등의 외국에서는 이미 '주류'를 차지한 사운드를 이상적 기준으로 삼았다는 핀잔도 하게 된다. 레코딩의 기술적 과정에 무지한 나같은 사람이 하는 지적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운드에 대한 평가가 주관적인 경우가 많다면, 나의 주관을 피력할 수밖에 없겠다. 한국의 인디 음반의 사운드는 '그곳에서는 대중적이지만 이곳에서는 낯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이곳에서 음악 깨나 듣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사운드이기 때문에 특별히 '인디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1998년 레이블 인디에서 발매한 음반들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음반이 클럽 하드코어에서 발매한 컴필레이션 음반 {클럽 하드코어 아싸 오방 첫 번째 앨범}이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컴필레이션이 주는 '종합선물세트'라는 장점을 제외한다고 해도 이 음반은 골수층만을 겨냥했고 그래서 골수층 대부분을 끌어들인 듯하다. 개별 밴드로 가장 성공적인 음반이 앤(Ann)의 {Skinny Ann's Skinny Funky}였다는 점도 또하나의 '이변'이라고 할 수 있다. 앤은 홍대 앞 출신도 아니고 서울 출신도 아닌 부산 출신이다. 부산에서 연주할 공간이 없어서 새로운 팬을 찾아 서울로 올라온 이들의 음악은 무언가 독특했다. 펑크를 기본으로 스카와 하드코어(정확히 말하면 '한국에서 하드코어라고 부르는 스타일의 음악')을 뒤섞은 스타일, 본인들 표현으로 '하이브리드 록'의 스타일이 듣기에 신선했을 뿐만 아니라 사운드가 매끄러운 듯하면서도 풋풋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블 인디에 소속된 밴드는 아니지만 또하나의 부산 출신 밴드 레이니 선(Rainy Sun)의 음반도 수작이었다. 물론 이들은 가사를 영어로 써서 대중화의 기회를 사전에 막아버렸지만(한국에서 영어 가사로 된 음악은 '가요'가 아니므로 가요 프로그램에서 방송될 수 없다. '팝' 프로그램에서 방송될 수는 있지만, 몇 개 안되는 팝 프로그램에서 '코리안 팝'에 자리를 할당해 주기는 힘들다. 좀 이상한 구조이긴 하다).

 

'레이블 인디'가 아닌 인디 밴드들

레이블 인디가 아닌 다른 레이블의 경우는 어떨까? 먼저 앞서 언급한 강아지 레이블부터 가보자. 강아지는 1997년 말에 발표된 99와 옐로우 키친의 합동 음반 {99/옐로 키친}에 이어 1998년 들어 퓨어디지틀사일런스, 갱톨릭, 허클베리 핀의 음반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들 중 가장 공들인 음반은 허클베리 핀의 음반으로 보이는데 이 음반은 앞서 본 레이블 인디에서 제작한 음반과 비슷한 케이스로 보인다. 사운드는 '그런지'하다기 보다는 외국의 평단에서 '매끄럽다(slick)'라고 표현하는 프로듀싱을 통해 나온 듯하다. 이런 프로듀싱이 '주류에서의 성공'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별 문제 없겠지만 아직 그 가능성은 시험된 바 없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성공했을 것'이라는 평을 들은 적이 있는 여성 보컬 남상아의 열창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은 '한국 인디 씬'의 상황에서는 불운한 운명을 맞이했다.

다른 한편 퓨어디지틀사일런스는 옐로 키친에 이어 '노이즈'를 본격적으로 실험한 음반이다. 두 밴드는 로파이 홈 레코딩으로 몇 개의 데모 테입을 만든 밴드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음반의 경우도 '로파이 홈 레코딩'과 '정규 스튜디오 레코딩' 사이의 간격을 아주 잘 메운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옐로 키친도, 퓨어디지틀사일런스도 음반을 발매한 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레이블과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단절되고 말았다. 갱톨릭의 경우는 '힙합 음반'이었는데, 힙합의 프로듀싱을 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던 상태에서 '이걸 내야 하나'라고 망설이다 발표한 음반이 예상밖으로 좋은 반응을 얻은 경우였다. 물론 '좋은' 반응이란 '록 팬들이 좋아하는 힙합 음반'이라는 반응을 말한다.

강아지는 '레이블 사운드'를 강하게 지향하는 것같지는 않다. 반면 '초저예산 레이블' 카바레는 뚜렷한 자의식을 갖고 있다. 오르가즘 브라더스라는 밴드의 멤버이기도 한 이성문의 지휘 하에 카바레는 볼빨간과 이성문의 음반을 발매했다. 이 음반이 눈길을 끄는 건 무엇보다도 CD의 주얼 케이스가 없다는 점이었다. 낮은 지질(紙質)로 만들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씌운 게 전부였고, 가격도 6,000원이었다. CD도 '앨범'이 아니라 '싱글' 혹은 EP에 가까웠다. 일단 시각부터가 '저예산 음반'의 표본이라고 할 만하다. 이성문의 음반은 마국에서 '로파이 인디록'에 가까운 사운드를, 볼빨간은 지루박을 패러디한 테크노 음반이었다. 카바레 레이블의 특징은 여기에서 '인디'의 실정에 걸맞는 사운드를 목적의식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이었다. 1999년에 음반을 발매한 은희의 노을도 보다 부드럽고 멜로딕하지만 여전히 '카바레식 인디 철학'을 갖춘 음반 {Spring}을 발표했다. 이런 특이함이 한국의 인디 씬 전체를 아우르는 특징이 될 지 이들만의 특유함이 될 지는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가장 독특한 '레이블 사운드'임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블루스, 포크 등 좀 오래된 음악으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한 레이블인 라디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1998년 말에 발매한 미선이의 앨범 {Drifting}이 예상밖의 짭짤한 성공을 거두었다. 정규 밴드가 아니라 조윤석(기타/보컬)과 김정현(드럼)의 2인조로 구성된 미선이는 포크로부터 영향받은 친숙한 멜로디를 몽롱하고 중독성있는 사운드 속에 침잠시킨 레코드를 만들어냈다. 특이한 것은 미선이가 라이브 공연에서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밴드였다는 점이다. 역으로 미선이는 '음반'을 통해 자기 발로 서는 케이스라는 점에서는 인디 씬에서 최초라고 할만한 밴드였다.

결국 1998년이 지나가면서 인디 씬은 많은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클럽에서 신나게 노는 일' 이상의 자기의 고유한 미학을 갖추는 일 말이다. 미학이라는 말이 거창하다면 '다른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노하우라고 해도 좋겠다. 달리 말해 인디 음반이 클럽 씬의 확장 이상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현재 인디 밴드들의 고민거리다. 따지고 보면 이제까지 인디 밴드들은 '싫다'는 말로 출발했다. 음악같지도 않은 놈들이 설치는 주류 댄스음악계가 싫었고, 연주력을 지상과제로 생각하는 록 프로페셔널리즘이 싫었고, 신기한 동물원 바라보는 듯한 주류 미디어나 평단도 싫었다. 그래서 '네 멋대로 해라', '누구나 할 수 있다'라는 정신이 1990년대 중반까지 클럽을 중심으로 하는 인디 음악계를 지배했다. 이제는 '네 멋대로 하되 네 스스로 해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다'는 분위기가 인디 씬을 감돌고 있다. 다시 또 어떻게 바뀔 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1997년에 절정을 이루었던 '주류 미디어의 인디 씬 주목'이라는 현상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또한 '어쨌든 록 음악'인 인디 록과는 상이한 흐름들인 힙합과 테크노 등이 도입되면서 인디 록도 한물 간 게 아니냐는 '이상한' 말들도 나오고 있다. 다들 인디 씬을 하나의 '유행'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시스템이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남은 일은 유행에 끌려 다니는 일이 아니라 유행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것도 주류의 단기간에 떴다가 사라지는 유행과는 다른 유행을.

 

도대체 인디 밴드는 무엇일까

여기까지 쓰고보니 도대체 왜 나는 '인디'라는 말에 주목했는가에 대해 새삼 성찰하게 된다. 대자본이 지배하는 시장경제의 강제 하에서 독립적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경제적으로, 예술적으로 독립하는 건 가능한 일일까? 생각 좀 더해봐야 겠다. 아마도 삶과 음악에 대해 자유로운 태도가 가능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 때문에 인디라는 말에 주목해 왔던 듯하다.

그렇지만 예술적 자립성과 경제적 자립성은 종종 모순된다. 영미권에서 한때 '인디펜던트'하고 '얼터너티브'했던 밴드가 메이저 레이블로 영전하면서 '완전한 예술적 자립성(정확한 용어는 자율성)을 확보해 준다는 조건으로 계약했다'는 말을 종종 한다. 그게 단지 변명을 위한 수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또한 그곳의 메이저와 이곳의 메이저를 똑같은 시스템으로 간주할 수도 없다. 아무튼 부업을 가지고서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 인디 씬에서는 음악 활동에 '전념'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궁핍하고 절박하지 않은 상황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얼마나 '자율적'인지는 의심이 간다. 그 반대로 경제적 자립을 고수하는 상태가 예술적 자율성을 그대로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지만.

각설하고 이런 생각은 든다. 인디의 시스템이 갖춰지려면 짧지 않은 시일이 요구될 것이다. 이런 시스템의 문제는 '뮤지션'의 몫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디 밴드라는 인디 씬의 주체들은 그 사이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뭐 내가 '이렇게 하자'라고 주장할 주제도 아니고 그래봐야 듣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같은 평론가 아저씨가 보기에 현재의 인디 밴드들은 '경제적 자립'의 의지가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건 레이블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섬세한 감성의 뮤지션에게 '경제적 자립'을 요구하는 일은 무리로 보인다. 시비걸 것은 '우리는 좋아하는 음악을 할 뿐이다'라는 다음의 말이다.

이것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좋아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얼만큼 노력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적잖은 인디 레이블 관계자들은 '인디 밴드들은 연습을 안한다'라고 불평한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라면 문제다. '인디의 에토스는 게으름'이라는 말은 웃자고 하는 얘길 수는 있어도 한국과 같이 '열심히 일하는 사회'에서는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면 아득바득 노력하자고? 그건 주류 한국 사회의 모든 직업을 가진 사람이 걷는 길이다. 갑자기 묘연해진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전업적 인디 밴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건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전세계의 인디 밴드가 다 마찬가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러면 '부업을 가지면서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밴드'가 인디 밴드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그렇게 만만한 부업이 있을까? 부업을 갖는 인디 밴드는 유연한 노동시간을 가진 직업이 널려 있고 실업수당만 받아도 쏠쏠한 '선진국' 사회에서나 가능한 환상인가? 아마도 이런 길을 개척하는 밴드가 진정으로 '인디펜던트'한 밴드일 것이다.

이런 특이함이 한국의 인디 씬 전체를 아우르는 특징이 될 지 이들만의 특유함이 될 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현재 인디 뮤지션들의 '원로급'들은 이제 30대에 막 접어들었고 '먹고 사는' 문제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있다. '결혼'과 '취직'이라는 주류사회 진입의 세레모니도 현명하게 다루어야 한다. 아마도 이런 문제들을 잘 다루어서 '꾸준히' 음악을 할 수 있는 밴드가 나올 수 있을까. 외국의 인디 록과 비슷한 사운드를 내는 밴드가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인디 밴드나 인디 레이블의 '정형'을 설정하는 일은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하고 싶은 음악을 해라! 그리고 자기 발로 서라!

그런데 이런 말이 인디 밴드들의 귀에까지 들어갈까. 들어간다고 해도 "그 아저씨 잔소리 되게 많네, 흥" 그러지 않을까. 어찌 되었든 이제 하나의 순환이 끝나 보인다. 한번 다 돌았다는 뜻이다. 거품이 빠지면 지저분한 찌꺼기도 남지만 떠내려가지 않는 알맹이도 남는다. Anyway indie survives!

 

1999. 12. 17.
해냄출판사에서 발행 예정인 '인디 록'에 관련된 단행본에 수록될 글의 초고.
1999 신현준 (gilles@nownuri.net)


1) 조원희, "노이즈가든, 본토보다 큰 섬", {리뷰}, go back to the text 

2) 이 가사는 클럽에서 연주하던 시절 그들이 직접 적은 가사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좀 다른 버전도 있다. go back to the text 

3) {중앙일보}, 1999.4.13 go back to the text 

4) 위의 글. go back to the text 

5) 공윤영 외, "좌담: 한국 인디 씬의 현황, 문제점 그리고 대안", {서브}, 1999.2.에서 김종휘의 발언. go back to the text

 THE OTHERS:

     그대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하리: 1980년대 문화적 정세와 민중문화운동 Oct.23rd.1999

     대중음악과 웃음 혹은 안면성 Jul.20th.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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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 가타리와 팝 음악 : 불가능한 접속?  Mar.4th.1999